디자인을 전공한 컬렉터 원현정 씨는 얼마 전까지 신사동에서 갤러리를 운영했다. 남다른 심미안을 가진 그녀가 컬렉션의 대상으로 점찍은 것은 시계와 디캔터. 아르데코 스타일을 특히 좋아하는 그녀의 컬렉션 세계를 엿보았다.렉터들의 집을 방문하다 보면 현관에서부터 남다른 심미안을 엿보게 된다. 집안을 장식한 그림이 그것인데, 대부분의 컬렉터들은 기본적으로 적잖은 그림을 수집하고 있다. 원현정 씨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현관에서부터 거실, 복도 등 집안 곳곳에 그림이 걸려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거실 벽면 한 쪽을 가득채운 작가 이진용의 그림. 앤티크풍의 여행 가방을 소재로 한 작가 이진용의 작품이 집안 전체에 고풍스러운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공간을 압도하는 그림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원 씨가 다과를 내왔다. 조용히 자리에 앉은 그녀는 갤러리를 하며 이진용 작가와 친분을 쌓았다고 했다. 그녀의 시계 컬렉션에 이 작가가 선물한 시계도 있다며, 방으로 향했다. 잠시 후 나타난 그녀의 손에는 이 작가가 선물한 푸른색의 탁상시계가 들려있었다. 다탁에 시계를 내려놓은 그녀는 다시 거실 벽면에 걸려있던 그림을 보여주었다. 바로 그 시계를 소재로 그린 그림이었다.작가 김미숙이 그린 이 작품은 원 씨가 운영하던 갤러리 가인로의 개관 10주년 기념전에 전시된 작품이다. 2009년 4월 열린 기념전은 ‘시간’을 주제로 5명의 작가가 참여해 ‘시간을 그리다’라는 이름의 기획전으로 열렸다.“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장신구, 회화, 조각, 사진 등 다양한 분야의 미술 작품들을 전시 기획했어요. 지난 10년은 갤러리 가인로에 있어 많은 것들을 남게 해준 뜻 깊은 시간이며, 가인로와 인연이 있었던 모든 이들에게도 소중하고 가치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기념전은 그 10년을 더듬어보는 자리였어요.”기념전에는 미술작품과 함께 그동안 그녀가 모은 시계들도 함께 전시됐다. 그녀가 시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법 오래전의 일이다. 학창시절부터 수집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그녀에게 오래된 시계는 매력적이었다.주요 관심품은 회중시계와 손목시계. 그러나 손목시계는 컬렉션을 하기에는 가격이 너무 비싼 게 흠이다. 2008년 여름 뉴욕시내에 있는 앤티크 빌딩을 방문한 적이 있다. 빌딩 한 층에는 시계 전용 전시장이 있었는데, 금으로 도금된 시계 등 갖고 싶은 앤티크 시계가 즐비했다. 너무 예뻤지만 가격이 너무 부담돼 결국 포기해야 했던 아픔이 있다. 그에 비해 탁상시계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싸서 그나마 나았다. 시계 중에서도 그녀의 관심을 끈 것은 아르테코 스타일의 시계이다.아르데코(Art Deco)는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현대장식미술·산업미술국제전’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파리 중심의 1920∼1930년대 장식미술을 일컫는다. 아르데코 디자인은 형태를 제한해 더 간결하게 만들고, 식물 넝쿨이나 나뭇잎 등의 모양을 패턴화하고 기하학적으로 표현, 이국적인 장식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고딕양식이나 바로크, 로코코도 있지만 심플하면서도 모던한 아르데코 스타일이 좋더라고요. 대학원 졸업 논문 주제도 아르데코 시대 주얼리였어요. 가격대도 바로크나 로코코 시대보다 싸니까 부담이 덜 하죠.”그녀는 현재 탁상시계 15점, 빈티지 손목시계 5점 등 20여 점의 시계를 갖고 있다. 컬렉션 중에는 해외 여행길에 산 것도 있지만 주로 인터넷을 통해 구입했다. 해외 컬렉터 중에는 아르데코 시대 시계만 수백 점을 가진 이들도 있다. 이들이 내놓는 제품은 진품일 확률이 높아 신뢰할 수 있다.컬렉션 중에는 친정 부모님과 시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시계도 있다. 친정아버지가 생전에 쓰던 오메가 빈티지와 세이코는 아버지의 체취가 남아있어 애착이 간다. 얼마 전에 시아버지에게 받은 오래된 롤렉스 시계도 아끼는 제품. 시아버지가 차고 다니던 롤렉스 시계가 고장이 났다는 말에 새 시계를 사드리고 받아왔다.“쓸모없는 것은 잘 버리지만 의미 있는 것을 버리는 데는 익숙하지 않아요. 초등학교 입학할 때 명찰이나 고등학교 때 쓴 다이어리는 못 버리겠더라고요. 기본적으로 오래된 것에 애정이 가요. 몇 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쓰시던 안경이며 시계 등을 지금도 갖고 있어요.”디자인을 전공하고 갤러리스트로 키운 심미안과 오래된 것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컬렉터가 가져야 할 좋은 자질이다. 여기에 공부도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그녀는 7년 가까이 컬렉션을 공부하고 있다. 컬렉션 모임을 통해 박물관 투어를 다니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정보를 나누기도 한다. 디캔터(Decanter)는 그녀가 컬렉션을 공부한 후 모으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와인과 함께 서양의 식탁을 지켜온 디캔터는 컬렉터들의 주요 수집 대상이었다. 그녀가 컬렉션한 디캔터는 빅토리아 시대 십 디캔터와 클라렛 저그가 주를 이룬다.특히 그녀는 클라렛 저그를 좋아한다. 클라렛 저그는 크리스털, 혹은 유리와 은으로 만들어진 손잡이가 달린 디캔터다. 영국에서 유래한 클라렛 저그는 19세기 이후 프랑스나 중부 유럽, 이탈리아, 미국 등지에서 폭넓게 제작 사용됐다. 고급 앤티크 클라렛 저그는 유리로만 만들어진 크리스털 디캔터에 비해 가격은 비싸지만 앤티크로 가치를 인정받아 컬렉터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그녀가 수집한 빅토리안 시대 클라렛 저그는 다양한 디자인이 특징이다.디캔터 컬렉션은 와인을 좋아하는 남편의 든든한 지지를 받는다. 감성이 풍부해 요리를 즐겨하고 크리스털 제품을 좋아하는, 섬세한 성격의 남편은 컬렉션 후원자이자 디캔터 애용자다.사람 좋아하고, 모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그녀의 집은 친구들의 주요 모임장소가 된다. 인터뷰 이틀 전에도 친구들이 모였는데, 제각기 좋아하는 디캔터를 꺼내 와인을 마셨다. 진열장에 진열된 디캔터는 가끔은 와인뿐 아니라 막걸리 디캔터로 바뀌기도 한다. 그녀는 그런 재미가 쏠쏠하다고 자랑했다.이처럼 디캔터는 활용도가 높을 뿐 아니라 선물하기도 좋다. 그녀는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아 컬렉션으로는 그만이라고 말했다. 현재 그녀가 수집한 디캔터는 40여 종. 사람 좋아 주변사람들에게 잘 퍼주는 남편 덕에 개수가 많이 줄었다.“집에서 혼자 컬렉션을 보면서 감탄할 때가 있어요. 그게 컬렉션을 하는 가장 큰 매력인 듯해요. 그런 점에서 두고 보기에 예쁘고, 직접 마셔볼 수 있는 디캔터가 시계보다는 더 좋은 거 같아요. 디캔터는 또 관심 있는 분이 많아 좀더 좋은 제품으로 갈아타기도 수월할 것 같아요.”컬렉션은 삶의 궤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녀가 컬렉션을 계속하는 이유다. 하지만 서두를 생각은 전혀 없다. 세월의 더께가 앉은 앤티크 제품처럼, 10년, 20년 긴 시간을 두고 편안하게 컬렉션하고 싶다. 그렇게 컬렉션이 쌓이다 보면 그녀의 삶도 풍성해질 거라고 그녀는 믿고 있다.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