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을 와인답게 하는 것은 다양성이다. 나라별로 지방별로 스타일별로 아무리 많은 와인을 마셔도 여전히 새롭고 신선한 게 남아 있는 곳이 와인의 세계이다. 이런 와인의 다양성은 지치지 않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번 순례지는 유럽 한복판에 있지만 아직 낯선 오스트리아다. 다양성이라는 지고의 명제가 안내하는 목적지로.오스트리아 와인산지 캄프탈(Kamptal)은 명산지 바하우와 최대산지 바인비에르탈 사이에 있다. 다뉴브 줄기의 곁가지로 뻗은 실개천이 흐르는 캄프탈은 화이트와 레드와인 모두 품질이 좋다. 중심마을인 랑겐로이스에는 와인박물관 로이지움이 들어서 관광객들의 필수코스가 되었다. 포도밭에 덩그러니 서 있는 양철 마감의 현대식 디자인을 입고 있는 이 박물관은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감각적인 건축양식을 대변한다.캄프탈도에는 리슬링과 그뤼너 벨트리너가 공생한다. 산 기슭이나 평탄면에는 그뤼너 벨트리너, 경사면에는 리슬링식이다. 하지만 둘의 생존방식은 다르다. 후자는 물이 부족한 힘든 환경에서도 특유의 끈기와 생명력을 발휘하여 열매를 맺지만, 전자는 그렇지 않다. 출장이든 여행이든 비엔나 근처에 간다면 꼭 한번 들러볼만한 대표적인 양조장 세 곳을 소개한다.수년 전에 수입상 수미르상사에 의해 수입된 유르취치(Jurtschitsch)는 셀러가 무척 아름답다. 700여 년 전에 구축된 지하 셀러는 한 여름에도 섭씨 12~13도를 유지할 만큼 서늘하다. 삼형제가 운영하는 이곳은 특히 그뤼너 벨트리너의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매년 화가의 화려한 그림으로 라벨을 입고 그뤼베(GrueVe)라는 브랜드를 달고 나오는 이 화이트와인은 오스트리아의 베스트 셀러다. 그뤼베는 그뤼너 벨트리너의 축약형으로서 이 양조장이 만든 신조어이다.유르취치의 와인 스타일은 우선 포도밭부터 살펴야 설명이 가능하다. 이곳은 포도밭의 생태계를 친환경적으로 유지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곳이다. 양조학교를 갓 졸업하고 가족 일을 돕는 알빈 유르취치(Alwin Jurtschitsch) “땅 속의 환경이 지난 세기처럼 자연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생산한 그뤼베는 바닐라의 향취가 진하며, 벨벳 같은 감촉이 돋보이며, 농익은 포도를 통해 집중된 힘과 구조를 지닌 와인이다.목소리가 우렁차고 씩씩하게 들리는 핸드볼 선수출신의 루드빅 히들러(Ludwig Hiedler)도 역시 힘과 구조가 돋보이는 와인을 만든다. 하지만 단지 오크통의 효과에만 의지하지는 않는다. 그는 “집안에 어느 누구도 와인전공자가 아니며, 자신도 스스로 와인을 배웠다”고 한다. 고작해야 1979년 토스카나의 이졸레 올레나 양조장에서 몇 달간의 수련생활을 한 게 그가 한 와인공부의 전부이다. 그는 짧았던 토스카나의 수련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산지오베제 묘목을 반입하여 와인화하는 데 성공했다.연 25만 병 정도를 생산하는 히들러 양조장을 방문할 때에는 꼭 2층에 올라봐야 한다. 1층과 지하는 양조장이고, 2층은 집으로 설계된 이 건물은 주변경관과 참 잘 어울린다. 히들러는 늦수확을 좋아한다. ‘November’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November’와 함께 맥시멈(Maximum)이라는 이름도 함께 쓴다. 맥시멈은 집중도를 최대화한다는 의미. 이렇게 생산된 ‘No- vember’, 혹은 맥시멈은 맛이 진하고 파워가 있으며 숙성력도 좋다. 뿐만 아니라 이 와인은 균형이 좋고 싱싱한 산도가 여전하며, 여운도 좋아 더 오래 숙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30년 정도는 문제없다”고 자신했다.수도원이 양조장으로 변한 고벨스부르그성(Schloss Gobelsburg)도 꼭 가봐야 한다. 이곳의 특징은 양조 방식에 중세 수도사들의 기법이 녹아 있다는 점이다. 1985년 오스트리아에서 발생한 와인 스캔들로 인해 애호가들은 오스트리아산 와인을 믿지 못했다. 자국민조차 오스트리아 와인을 외면했을 때, 고벨스부르그는 미사 와인인 메스바인(Messwein)을 판매하여 큰 신뢰를 얻었다. 수도사들이 전통적으로 만드는 양조법대로 만든 와인이라면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소비자 가격을 7유로로 책정한 것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벨스부르그 양조장 최고의 브랜드는 ‘트래디션(Tradtion)’이다. ‘트래디션’은 이름대로 과거 방식에 따라 제조된다. 1171년에 세워진 이 성의 양조방법은 로마시대부터 19세기까지 별로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소믈리에 출신의 마이클 무스부르거(Michael Moosbrugger)는 말한다.고벨스부르그성을 총괄 관리하는 그는 가족과 함께 이 큰 성을 지키고 있다. 그가 트래디션이라는 와인 브랜드를 만든 배경은 이렇다. 책임을 맡자마자 그는 전 책임자였던 수도원장과 194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올드 빈티지 시음을 했다. 시음을 통해 그는 오래된 와인일수록 품질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전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 필요가 있음을 절감했다. 이후 그는 포도밭에서 포도를 밟아 짜고, 양조장으로 옮겨 즉시 발효시키는 옛 방식을 따랐다. 이곳에서는 온도를 통제하지 않는 나무통을 쓴다. 그리고 서너 달에 한번씩 통갈이를 실시하여 효모찌꺼기를 제거한다. 오늘날 효모 찌꺼기를 통에 남겨 해당 와인의 숙성력을 더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그러면서 14개월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2년 정도를 묵힌 후 병입한다.그는 최고의 포도밭에서 나온 포도의 절반을 트래디션으로, 나머지 절반은 포도밭 고유의 이름으로 병에 담는다. 가이스베륵(Gaisberg) 언덕에서 나온 리슬링은 가이스베륵과 트러디션으로, 렌너(Renner) 기슭에서 나온 그뤼너 벨트리너는 렌너와 트러디션으로 병입되는 것이다.옛방식으로 생산된 화이트와인은 고품질을 자랑한다. 토양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은 고벨스부르그 화이트 와인은 맑고 순수한 울림이 있다. 마이클 무스부르그는 일부 생산자들이 이국적이고 진한 향취를 위해 귀부 포도를 혼합하는 행태에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좋은 와인은 건강하고 실한 포도로만 만들어야 포도의 특성이 투명하게 드러난다고 믿기 때문이다.조정용 와인 평론가 ilikewin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