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인터뷰 날짜를 잡으려고 전화를 건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목소리도 그랬거니와 검은색 면바지에 검은색 셔츠를 입은 평범한 모습의 첫인상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져 나올 때에는 생각이 바뀌어 있었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한해 배출되는 수만 명의 졸업생 중 전업 작가로 남는 확률은 사법고시 합격률보다 낮을 만큼 예술가를 직업으로 삼기는 어려운 일. 확률적으로 쉽지 않은 그 길을 걷고 있는 그는, 알고 보니 진정한 작가였다.“수업 시간에 창밖의 먼 산 풍경을 바라보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풀잎들이 물결같이 일렁이는 5월의 산야는 정말 눈부셨죠. 책은 책상 위에 항상 펼쳐놓고 시간마다 과목 책만 바꾸면 그만이었어요”라며 그는 학교 공부가 재미없어서 도피처로 미술을 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발단은 도피였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보면 그림을 그릴 ‘팔자’였기 때문이었던 듯하다.또래 친구들이 세계문학전집이나 위인전을 읽으며 생각을 키워갈 때 그의 관심은 ‘도(道)’에 쏠려 있었다. 노자나 장자의 인생 철학도 좋았지만 그보다 사주, 주역, 한의학 등에 더 많은 흥미를 느꼈다. 평론가들이 그의 작품을 가리켜 ‘한국적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기실 이런 도가나 불교 같은 동양 철학적 사고가 작품에 묻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예전 작업 중 바늘 없는 시계에 호랑나비가 앉아 있는 모습의 작품이 있다.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추억과 현실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고자 하는 이상을 형상화한 것이며, 작품의 소재인 나비는 장자의 ‘호접몽’에서 암시하는 초월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동양 철학에 심취하게 된 데는 성장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스님인 아버지와 침술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산 동래의 어느 자그마한 산기슭 마을 뒷산에 조그만 절이 있었는데, 그 절 아래채가 바로 나고 자란 곳. 자연스레 어려서부터 절 집을 드나드는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특히 괴짜 한학자나 동래 기생 출신 할머니들은 그의 무의식 속에 강하게 작용을 했다.“나이가 들어 일선에서 물러선 퇴기(退妓) 할머니들은 연세가 많아도 아주 곱고 예뻤어요. 그림도 그리고, 가야금 연주도 하고, 창도 부르고, 춤도 잘 추고 여염집 여자들보다 재주가 많은 분들이었어요. 당시의 예술가와 다름없죠. 할머니들이 동양화 그리는 것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식상해서 대학에 입학할 때 서양화과를 지원했는데 유화가 내 체질에 잘 안 맞는 것 같았어요. 무심코 둘러보면 제가 동양화과 화실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고요.”1970년대에 미술을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힘든 요소가 많았다. 특히 물감이나 그림 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질도 형편없었다. 흰색으로 칠한 그림이 1~2년만 지나면 누렇게 변할 정도였다. 대학 재학 중, 부산의 재력가였던 같은 과 학생의 부모님이 일본에서 수입한 고급 물감을 선물로 준 적이 있었는데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뚜껑만 열었다 닫았다 했던 적도 있었다고. 마침내 4학년 졸업 작품전 그림을 그릴 때 썼는데, 어찌나 귀하게 느껴지는지 꼭 피를 찍어서 바르는 것 같더란다.“재능 있고 실력도 좋은 선배가 돈이 없어서 미술을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졸업을 하면서 저도 방향을 결정해야 했죠.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번 다음 마음껏 그림을 그리자 결심하고 미술 학원을 열었습니다. 처음 몇 달간은 학생이 한 명도 안 와서 고전을 면치 못했어요.”그런데 개원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잭 팟’이 터졌다. 부산 미대 수석 합격생을 비롯해 상위권 입학생이 모두 그의 학원 출신이었던 것. 유명세를 얻으면서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새벽별 보고 출근해 별 보고’ 퇴근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그렇다 해도 작업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고 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지도하는 데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판이었다. 어느 날 저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감 값만 벌어서 그림 그리는 게 목적이었는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싶었다.요즘 물가로 환산하면 수 십억 몸값의 운동선수 연봉이 부럽지 않을 만큼 당시 그의 수입은 상당했다. 그러나 거금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하지 않던가. 부산 출신으로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던 김광문 작가는 가족들을 이끌고 상경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그러나 2년 동안은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10년 넘게 아이들 가르치는 데에만 열중하다 나만의 온전한 시간을 갖게 되니 공황 상태가 오더라는 것. 세계 각지로 여행을 다니며 마음을 추스렸는데, 역시 그의 성정에 맞는 나라는 인도였다. 처음 그곳에 다녀왔을 때에는 마치 ‘그림 속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었다고 한다.초기 작업은 오브제를 활용한 작업을 많이 선보였다. 우편함, 되, 몽당연필, 불상 등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지난 시절 물건이나 전통 신앙과 관련된 소품들을 캔버스에 부착해 함께 구성했던 것. 근작 은둔일기 시리즈는 기존 작업 방식과 확연히 구별된다. 화면 위에 에폭시, 한지 등을 겹겹이 발라 (어떻게 표현한 것인지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낯선 색감과 질감을 만들어 내고 그 위에 꽃이나 식물을 그린다. 작품의 주된 소재인 화면 속 꽃과 식물은 조선 시대 책가도처럼 역원근법으로 그리고, 색을 칠했지만 각각이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묻혀 수묵 담채화 같은 느낌을 주며 묘한 매력을 지닌다.“그림을 잘 그리려면 우선 재료의 물성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유화도 1년 정도 써보니 재료의 성향을 알겠더군요. 저는 아크릴이나 유화 같은 미술 재료만 써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공업용 재료나 도구로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화학 냄새가 많이 나기도 하고 기법이 어려운 점이 많지만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다가 나만의 방식을 찾아냈을 때의 기쁨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지요.”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도를 닦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치열하고 피곤한 일이지만 그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아느냐고 반문한다. 내면에서 미적인 갈등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의 미감을 끌어내기까지의 시달림은 빚쟁이한테 빚 독촉 받는 시달림과는 천양지차라는 것. 예술이라는 것은 반복함으로써 익숙해져서 되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하기에 늘 외줄 타는 기분이 든다고. “그런데 해볼 만은 합니다. 내가 그림을 그려서 정말 행복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를 보니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었다.동양화가김광문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