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술의 혁명

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는 천재다. 그가 남긴 5만여 점이나 되는 방대한 작품의 양과 질을 불문하더라도 그가 20세기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그는 고전주의 회화가 지향하던 원근법을 큐비즘이라는 새로운 시점으로 바꾸었다. 모든 화가들의 미적 표현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였던 아름다움을 벗어나 ‘못난 것도 곧 또 다른 아름다움’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 것도 피카소다. 피카소 자신의 삶이 곧 피카소 예술이기도 하다. 영국의 더 타임스와 런던의 사치갤러리가 1900년대 이후 최근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 2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피카소가 최고의 예술가로 뽑혔다. 2위는 폴 세잔이 꼽혔고 구스타프 클림트와 클로드 모네, 마르셀 뒤샹이 뒤를 이었다. 한마디로 피카소는 ‘20세기 최고의 예술가’로 현대사에서 아인슈타인, 다윈, 프로이드, 칼 마르크스와 동등한 역사의 인물이었다.미국의 극작가이자 피카소와 절친했던 거트루드 스타인(Gert rude Stein 1874~1946)은 피카소를 가리켜 “…스페인은 피카소를 만들었고, 피카소는 20세기 회화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20세기에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전혀 있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물을 해체하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작가라고 극찬했다. 이전의 보편적 인식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진보보다 혁명이 쉽다는 말로 표현하곤 하는데, 피카소야말로 20세기 미를 보는 눈을 바꾼 진정한 혁명가였다.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의 말라가에서 화가인 아버지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와 어머니 마리아 피카소 로페스 사이에서 태어난다. 피카소는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바르셀로나에서 보통의 아이들처럼 성장했다. 하지만 미술재능은 남달랐다. 아들의 소질에 감탄한 아버지는 피카소가 천부적 재능이 있음을 간파하고, 자신의 팔레트와 물감을 모두 아들에게 넘겨 준 다음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붓을 건네 준 행위는 모든 스페인 어린이들이 꿈꾸며 동경하는 가업의 전수행위로‘알테르나티브(Alter native)’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투우 견습생이 황소를 쓰러뜨릴 수 있는 진짜 투우사가 되는 순간을 의미한다.피카소가 투우를 본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다. 원형 투우장의 화려한 광채와 열광, 이글거리며 김을 내뿜는 황소, 그 털 위에서 번들거리며 흘러내리는 검은 피, ‘올레!!!’를 외치며 흥분하는 관중, 날개처럼 퍼덕이는 사람들의 갈채, 그리고 조명을 받으며 가슴을 쭉 펴고 서 있는 투우사. 이 모든 것에 대한 열정을 아버지 호세는 아들 피카소에게 물려주었다.피카소는 훗날 바로셀로나 유년시절을 회고하며 “음악에서와 달리 그림에서는 완전한 천재 아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조숙한 천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린 시절의 천재일 뿐, 나이가 들면서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 아이는 언젠가 진정한 화가, 심지어는 위대한 화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나는 어린아이의 상상의 단계를 매우 빨리 뛰어넘었다. 남들이 소년과 같은 나이에 나는 어른스러운 아카데믹한 데생을 하고 있었다. 내 데생의 정밀성과 정확성이 나를 질리게 하였다. 내 아버지는 데생교사였다. 나를 남보다 일찍 이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조숙한 천재의 솔직한 고백이다. 피카소의 그림은 언어였으며 삶의 다른 표현이었다. 종이에 연필 크레용 과슈, 100x81cm, 1972, 피카소미술관, 앙티브]>피카소의 삶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브로샤이, 데이비드 등 당대 최고의 사진가가 피카소의 일상을 찍은 사진과 거트루드 스타인, 앙드레 말로, 조르주 타바로 등 피카소와 교유했던 최고의 지식인이자 문인, 언론인들의 피카소에 관한 전기를 통해서다. 피카소를 몇 마디로 요약하기란 쉽지 않지만 굳이 말한다면, 그는 자유주의자이자 대단한 열정과 야망을 가진 ‘성공한 예술가’였다. 1932년, 피카소는 자신의 소유인 노르망디의 작은 성 부아줄루에서 백작인 에티엔 드 보몽, 작곡가인 에릭 사티, 피아니스트 아르튀르 루빈스타인, 시인이며 평론가 영화감독 극작가인 장 콕도, 디아길레프의 친구 미시아 세르와 같은 파리의 명사와 교유하고, 파리의 연극이나 발레 초연을 자주 관람했으며, 늘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과 함께 화려한 파티나 리셉션에 참석했다.피카소의 작업실은 어떠했을까. 사회적 명성과 개인적 욕망이 맞물려 화려한 가구와 호사로운 취미는 갖추지 않았을까. 파리의 피카소 작업실은 잡동사니가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아파트였고, 중산층에 어울리는 가구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으며, 너다섯 개 되는 방에는 대리석 벽난로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여기에 차곡차곡 쌓인 그림들과 데생, 상자, 종이꾸러미, 그리고 조각상의 거푸집, 책 더미, 물감과 붓, 여러 가지 오브제들이 벽을 따라 뒤죽박죽 놓여 있고, 먼지로 덮인 바닥에도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다. 피카소는 평생 새로운 작업환경을 찾아 작업실을 옮겼다. 그때마다 피카소가 사랑했던 공간은 멋지고 화려한 실내장식이 아니라 텅 빈 공간이었다. 왜냐하면 비어 있어야 자기가 작업해서 그 공간을 작품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이 작품으로 채워지면 피카소는 또 다른 여인과 함께 새로운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새 술은 새 병에 담는다는 말과 같은 이치다.피카소는 하나의 사물을 창조하는 과정에는 불가피하게 추(醜)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창작을 위해 열정을 쏟으며 인간은 투쟁하고 그 결과 늘 어떤 추함이 나타난다. 시간이 흐를수록 뒤에 나타나는 작가들은 더욱 잘 할 수 있고, 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사물은 이미 창조되어 있고, 이들은 투쟁할 필요가 없으며,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들은 창조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추함을 두려워한다. 심지어 일반대중은 말할 것도 없다. 잘못 그리는 것, 즉 닮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창조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피카소 그림의 못생김이 새삼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하루는 피카소가 훗날 바로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초대관장이 되는 오랜 친구 사바르테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충분히 집중하지 못해. 세잔이 세잔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지. 그가 나무 앞에 서 있을 때, 그는 주의 깊게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았지. 그는 마치 잡고 싶은 동물을 마주한 사냥꾼처럼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어. 그림이란, 보통 관찰에 지나지 않네. 여기에 모든 집중력을 쏟아 부어야지 하지…” 집중력이야말로 화가가 지녀야할 가장 큰 덕목이다. 여기에 관찰의 중요성까지 언급하는 파카소의 식견이 그를 모델 없이도 펜과 종이만 있으면 쓱쓱 신기하게 그려내는 예술가로 만들었던 것이다. 화가가 귀감으로 삼을 만한 훌륭한 지적이다.피카소의 눈은 타는 듯 이글거리는 야수 같은 광채로 가득하고, 두툼한 손은 예술가의 손이라기보다는 노동자의 손 같이 투박하다. 하지만 그의 정신과 열정은 가늠할 수 없이 깊고 강하며, 열정으로 가득하다. 피카소의 열정은 작업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그의 화력 80년간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였다. 일찍이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이 “피카소는 큐비즘이나 초현실주의를 대변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채 이름 붙일 수 없는 다양한 이즘을 총체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이것은 그저 ‘피카소 작품’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듯이, 그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발견했고 한곳에 오랫동안 머물기를 거부했다. 늘 새로운 대상, 새로운 표현을 발견하고 표출하면서 하나의 양식에 안주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피카소 자신의 걸작들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재현 반복하지 않았다. 이는 큐비즘, 고전적인 방식의 재해석, 콜라쥬, 도자기, 조각, 판화 등 자신의 예술영역을 확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피카소의 이러한 열정은 선천적 기질도 한 몫 했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 넣어주는 아름다운 피카소의 여인들이 곁에 있었다. 올가 코흘로바를 위시해 마리테레즈 발터, 도라 마르, 프랑수아즈 질로, 쟈클린 로크 등 모두 피카소와 애증을 함께한 ‘피카소의 여인’들이다.피카소의 그림에는 야수와 신화적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예컨대 켄타우로스와 미노타우로스 등이 그가 즐겨 다루던 소재들이다. 반은 사람이고 나머지 반은 소인 미노타우로스는 당시 그가 머물던 지중해를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피카소는 마치 자신이 미노타우로스라도 된 듯 오래전부터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이 같은 신화적인 존재사이로 어느 순간부터 또 다른 동물하나가 등장했다. 올빼미였다. 한 번은 누군가가 피카소에게 상처 입은 올빼미 한 마리를 가져다주었다. 피카소는 이 올빼미를 정성껏 치료하였는데, 그 사이 피카소는 빛을 내며 꿰뚫어보는 듯, 초연하게 먼 곳을 응시하고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올빼미의 눈에 매료되었다. 피카소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새를 몹시 좋아했다. 피카소는 올빼미에 신비적이고 미신적인 의미를 부여했는데, 올빼미의 동그란 얼굴과 이글거리는 눈빛에서 자기 자신의 열정을 느꼈던 것이다. 어느 날 피카소는 장난삼아 자기 눈을 확대한 사진위에 올빼미 머리를 그린 종이를 겹쳐놓고 두 개의 구멍을 오려 냈다. 올빼미의 이글거리는 눈은 피카소의 눈이었다.1972년 겨울은 혹독했다. 아흔한 살의 피카소로서는 견디기 힘든 겨울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4월 8일, 피카소는 92세의 나이로 무쟁의 노틀담 드 비 별장에서 영원히 눈을 감았다. 평생 수없이 많은 기사와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던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의 장례식은 마지막 부인 쟈클린의 독단과 과욕으로 쓸쓸히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4월 10일, 엑상 프로방스의 생트빅투아르 산 위로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1958년 피카소가 구입한 보브나르그의 성문이 열리고 다시 닫혔다. 비밀리에 이루어진 장례행렬은 서너 대의 자동차에 불과했다. 지독한 적막감이 성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뜨자 피카소의 시신은 정원에 묻혔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들, 화가들과 시인들을 멀리한 채 쓸쓸히 우리 곁을 떠나갔다.피카소의 죽음 이후 피카소의 연인들과 그의 자식들은 피카소의 상실로 인한 우울과 쟈클린과의 불화로 비극적 삶을 마감했다. 장남 파올로는 쟈클린의 거부로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자 심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피카소 죽은 지 2년 후에 죽고, 피카소의 손자이자 파울로의 아들 파브리토가 아버지가 죽자 3개월 후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다. 또한 당시 17살에 마흔 여섯의 피카소를 만나 사랑했던 마리테레즈는 피카소 죽은 지 3년 뒤, 피카소를 만난 지는 꼭 50년 되는 날, 차고에 목매 자살했다.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쟈클린은 피카소가 죽은 후 보브나르그 성에 검은 커튼을 내린 채 한 번도 열지 않고 피카소 무덤을 지키다가, 피카소가 사라진 현실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986년 권총자살로 세상을 마감한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비애가 스친다.최선호 111w111@hanmail.net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뉴욕대학교(NYU)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 SADI 교수 및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역임, 현재 전업 작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글·사진 최선호(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