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공예의 정수 에밀 갈레

르 누보는 유리공예의 르네상스였다. ‘아름답다’는 표현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유리작품들이 짧은 기간 안에 대량 출현했던 시기다. 유리가 가지는 장점을 가장 잘 뽑아내 예술로 승화시킨 예술가들은 대중들을 열광시켰다. 이전까지 유리는 식기나 화병 등 대칭을 이루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갈레의 화병은 비대칭이었다. 갈레의 작품들을 보면 음식을 담기에는 너무나 강렬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특히 유리 공예는 프랑스의 낭시(Nancy)가 중심이 되어 출중한 예술가들을 배출함으로서 ‘낭시파’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프랑스가 유리 공예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는 역사를 잠깐 돌아보자. 프랑스는 18세기까지 그렇게 좋은 유리를 생산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영국이나 독일로부터 유리가 수입되고 있었으며, 19세기가 되어서야 바카라 공방이 기술개발에 주력하여 프랑스 유리산업이 힘을 얻는 정도였다.이윽고 프랑스에서도 ‘베르 오파린(유백색 유리)’이 만들어졌다. 19세기 중반부터 유리 제조 산업이 크게 발달해 새로운 기술이 연구되고 다양한 제품들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갈레의 부친 샤를로가 유리장사를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샤를로는 1855년과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했다. 에밀 갈레는 철학 광물학과 함께 건축, 장식미술을 배우며 글라스 크라프트를 수학했다. 1889년과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에밀 갈레의 글라스 크라프트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시기부터 그의 명성은 전 유럽에 알려진다. 갈레, 랄리크, 티파니의 유리 작품들은 지금까지 유리그릇의 수준을 벗어나 장식이나 감사용으로 처음부터 구상되고 만들어졌다.갈레는 대단히 많은 화병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당시 수요가 많았다는 증거가 된다. 포슬레인과 함께 유리공예품은 당시 집안에 장식품으로 상당한 규모의 시장을 형성하게 됐는데 이는 아르 누보의 발전을 지탱하는 시장 기능으로의 역할을 했다. 19세기부터는 귀족 사회가 붕괴하게 되고 누구나 돈만 있으면 미술품을 수집할 수 있는 대중사회가 출현하게 된 시기다. 미술관 화랑, 박람회 등에서 미술품들이 전시돼 발자크의 ‘사촌형 폰즈’의 주인공 폰즈 와 같은 아마추어 예술품 수집가들이 증가했다. 신흥 부자들은 응접실을 앤티크로 장식했다이제 미술도 선전 광고가 필요해졌다. 필립 가너는 ‘1900년의 글라스(1979년 출판)’에서 갈레, 랄리크, 티파니는 각각 다른 스타일을 지녔지만 예술가와 기업가의 공통점이 있다고 썼다. 사업가 적 안목과 자질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상의 표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당시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물량을 제작해야 하나 오리지널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제를 안고 있었다. 이는 서로 모순되는 메카니즘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필자도 처음 앤티크 시장에서 당시의 시대적 이해가 부족한 나머지 어떻게 갈레나 티파니의 작품이 이렇게 대량으로 출현 할 수 있는 것인지 납득하지 못하였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당시는 기업가와 예술가가 공존 할 수 있는 좋은 시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갈레의 경우 1900년에 그의 공장에 300명의 기능공을 가진 대기업을 운영했다. 오리지널 작품을 계속 만들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대중과 나누어주기 위해 대량의 복제품을 만들어 팔았다. 이는 미(美)는 대중의 것이어야 한다는 모리스의 이상을 실현한 것이기도 하다.지난해 산토리 미술관 개관 1주년 기념 기획, 특별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에는 에밀 갈레의 자포니즘(Japonisme) 작품이 유독 인기를 끌었다. 자포니즘은 19세기 후반 일본 미술품이 유럽으로 건너가면서 붐을 일으켜 유럽 회화와 조각, 도자기, 유리공예 건축 등 다양한 장르의 미술과 문화에 영향을 끼친 풍조를 일컫는다. 갈레는 스물한 살 때 유리그릇과 도자기 제작가인 아버지의 파리 만물 박람회 참가를 거들기 위해 파리에 6개월여 머문 적이 있었다. 이 박람회에 전시된 1970여 점의 일본 미술작품을 접할 수 있었으며 당시 다른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일본 문화에 심취하게 됐고 일본적 미요소를 배합시킨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또 하나의 특별한 기회가 운명처럼 그에게 찾아온다. 1895년부터 3년여간 낭시에 유학하고 있었던 일본 농무성 소속의 다카시마라는 일본인이었다. 화가이기도 하였던 것으로 알려진 다카시마가 일본의 전통화를 소개하고 많은 낭시 지방의 예술가들에게도 대단한 감화를 끼치게 된 것이다. 일본 도처에 아르 누보 박물관과 컬렉션이 전시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 역시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영국 엡버시 스쿨, 옥스퍼드 튜토리얼 서비스 칼리지 오브 런던 졸업.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 아카데미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기행, 유럽도자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