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시대에는 인생을 가늘고 길게 사는 전략이 필요하다. 굵게 사는 인생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시대에는 우리의 짧은 인생을 허용하지 않는다. 연금을 뜻하는 펜션(pension)과 일을 뜻하는 잡(job)의 합성어인 ‘펜잡(penjob)’을 바탕으로 한 인생이야말로 오늘날 가늘고 길게 사는 전략의 핵심이다.


“끊이지 않고 앞뒤로 연결되는 사건의 사슬을 통해 과거는 현재로 이어진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말이다. 그렇다. 현재는 과거의 우연한 사건이 모이고 모여 응결된 결과물이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는 없다. 그러나 그 실체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림자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한여름 뙤약볕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고마운 그림자일 수도, 한겨울 미약한 햇볕마저 차단해 버리는 야속한 그림자일 수도 있다. 현재의 우리가 어떤 그림자 아래 있는가는 과거에 경험한 수많은 사건에 의존한다. 수많은 사건을 슬기롭게 극복한 사람은 고마운 그림자 아래서 땀을 식히고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야속한 그림자 속에서 떨고 있을 것이다. 현재의 사건은 미래의 그림자다. 미래에 어떤 그림자 아래 있을 것인가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달렸다.

바야흐로 연금의 시대다.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연금의 비중은 늘어나고, 언론에서는 연일 연금을 다루고 있다. 인구고령화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 고령화는 노년기의 증가를 뜻한다. 그만큼 일 없이 보내야 하는 기간이 길어졌다. 줄잡아 30년 정도 된다. 현역 시절과 맞먹는 기간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노년기가 현역 시절보다 더 길 수도 있다. 연금은 인생의 초장 끝발을 삶의 끝자락까지 이어주도록 해 준다. 인생을 짧고 굵게 사는 것보다는 가늘고 길게 사는 전략이 필요하다.


‘노인 대국’ 일본 60대 금융 자산 2억, 한국은 5600만 원
필자가 생각하기에 펜잡 인생이야말로 오늘날 가늘고 길게 사는 전략의 핵심이다. 펜잡(penjob)은 연금을 뜻하는 펜션(pension)과 일을 뜻하는 잡(job)의 합성어다. 연금은 일을 끝마치고 난 뒤에 받는 생활자금인데, 연금과 일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일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여건상 일을 끝내고 연금으로 안락한 노후를 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연금제도의 역사는 짧고 급여 수준은 낮기 때문이다. 이런 연금에 노후를 의지하다간 빈곤층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은 우리나라의 자화상이다. 현역 시절에 중산층의 지위를 유지하다가도 일터에서 물러나는 순간 빈곤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은 게 우리의 현실이다. 여기에 국민연금의 최초 수령 연령은 65세로 연장되는데, 일터에서는 그보다 훨씬 빨리 물러나야 하는 게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또 다른 현실이다.

이웃나라 일본은 노인대국이다. 노인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노인들의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다. 일본은 60대까지 금융 자산이 꾸준히 늘어나고 그 이후에도 별로 줄지 않는다. 환율을 10배로 가정하면 60대의 금융 자산은 2억 원 정도다. 70세 이상의 금융 자산도 반올림하면 2억 원이다. 반면에 부채는 40대를 정점으로 그 이후 급속히 줄어든다. 40대의 부채는 약 9500만 원인데, 60대가 되면 약 2600만 원으로, 70세 이후에는 1200만 원 수준으로 떨어진다. 일본 노인들의 부채는 금융 자산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나라는 50대까지 금융 자산이 늘어나긴 하나 찔끔찔끔 늘어난다. 30대의 금융 자산이 약 9100만 원인데 50대의 금융 자산은 1억80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 20년간 1700만 원 정도 늘어난 꼴이다. 그러다 60대가 되면 금융 자산은 고공낙하를 하듯 급속히 감소한다. 60대의 금융 자산은 약 5600만 원으로 50대의 52% 수준에 그치고 있다. 10년 사이에 약 50%가 줄어든 것이다. 반면에 부채는 제법 큰 폭으로 늘어난다. 30대의 부채는 약 4800만 원이지만, 40대는 약 6800만 원, 50대는 약 7900만 원의 부채를 안고 있다. 제법 보폭이 크다. 60세 이상도 여전히 4000만 원 정도의 부채를 지고 있다.

금융 자산에서 부채를 뺀 잉여금을 보면 한국과 일본의 상황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일본 가계의 연령대별 잉여금을 보면 30대는 약 2600만 원 적자이나 40대는 약 7400만 원 흑자로 전환되며, 이후 흑자폭은 더욱 확대돼 70대 이상이 되면 1억8900만 원까지 늘어난다. 일본 사람들은 적자에서 시작해 큰 폭의 흑자로 인생을 마무리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30대는 약 4200만 원의 흑자로 출발하나 그 폭이 계속 줄어 60세 이상에서는 1500만 원 수준으로 전락한다. 이것도 허리띠를 졸라맨 결과이리라.


부족한 생활비 근로소득으로 보충, 국민연금 가입 기간은 늘려가야
이런 상황에서 한 푼이라도 더 많은 잉여금을 확보하는 전략이 바로 펜잡이다.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은 가입 기간이 늘어날수록 급여 수준이 올라간다. 흔히 말하는 소득대체율 40%라는 것은 가입 기간 40년을 전제로 한 것이다. 가입 기간이 30년으로 줄면 소득대체율은 30% 정도로 감소한다. 노동 시장 진입 연령이 30세에 육박하는 요즘 국민연금에 30년 동안 가입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자의든 타의든 일터에서 물러나면 생계가 막막해진다. 모아 놓은 돈과 연금이 적기 때문이다. 불가불 국민연금의 조기노령연금을 신청한다. 그러면 급여 수준은 더 떨어진다.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펜잡은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전략이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과 사적연금의 일부로부터 연금을 수령해 생활비로 사용하고, 부족한 생활비는 근로소득으로 보충하는 것이다. 동시에 국민연금 가입 기간은 계속 늘려간다.
[PENSION PLAN] 흑자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전략
특히 50대 초중반에 주된 일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우리의 사정을 감안하면 펜잡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이때 만일 일을 하지 않고 그동안 모아 놓은 돈으로 생활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약 3000만 원 정도의 잉여금으로는 2~3년 버티기도 힘들다. 그렇다고 부채를 그대로 둔 채 1억여 원의 금융 자산으로 국민연금을 수령할 때까지 버티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결국 답은 하나다. 주된 일자리에서 물러날 경우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눈높이를 낮추어야 한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이해되지만 막상 그런 상황에 처하면 주저되는 게 사람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월 50만 원은 매우 큰 가치를 지닌다. 금리를 3%로 가정하면, 매월 50만 원의 이자를 얻기 위해서는 2억 원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소일거리나 성에 차지는 않지만 허드렛일을 통해 월 50만 원을 버는 것은 2억 원짜리 예금통장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인생 100세 시대에 은퇴기는 그야말로 인생의 황금기다.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것을 맘대로 할 수 있는 시기다. 하지만 이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노후를 대비해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 하는 이유다. 체호프의 말을 빌리면 돈 모으는 사슬을 만들어야 한다. 펜잡은 돈 모으는 사슬을 계속 이어가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를 통해 야속한 그림자가 아니라 고마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자. 이러기 위해선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볕을 차단하지 말고 비껴 달라고 말한 디오니소스의 용기가 필요하다. 자녀에 대한 과도한 투자, 체면, 무계획적 소비, 소비 후 저축하는 습관 등은 야속한 그림자다. 이를 걷어치우고 펜잡 인생이 필요한 요즘이다.


손성동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