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10주년 맞은 원대연 한국패션협회장
국내 패션 업계의 위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예전엔 사양 산업으로 여겨지며 ‘지는 해’ 취급을 받았고, 요즘엔 글로벌 유명 브랜드들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더구나 제조업의 삼성전자 같은 토종 패션 브랜드가 나오지 않고 있다. 10년 전 한국패션협회장 취임 때부터 “패션 산업은 선진국형 문화 산업”이라며 전문 패션기업 지원과 글로벌 브랜드 육성에 힘써온 원대연 회장을 만났다. “패션 산업은 단순히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닌 기술과 문화, 감수성 등을 접목하는 지식 기반 산업이며 무한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선진국형 문화 창조 산업입니다.”원대연 한국패션협회장이 제일모직 사장 시절부터 강조해오던 말이다. 원 회장은 제일모직 사장을 거쳐 한국패션협회장에 취임한 1994년 이후 지난 10년간 패션 산업의 위상 강화, 중소 패션 전문 기업 지원, 글로벌 브랜드 육성 등에 매진해왔다. 그 과정에서 유명무실했던 협회는 중소·중견 패션기업들의 실질적인 지원센터로 거듭났다. 지난해 말 중소·중견 패션업체들의 숙원 사업이었던 이천패션물류단지 개관이 대표적이다. ‘케이(K)패션’의 세계화를 위해 중국 상하이에 현지 지원센터를 연 데 이어 올해 뉴욕에도 협회 차원의 지원센터를 개설할 계획이다.
패션협회장으로 일한 10년을 되돌아보신다면.
“협회장을 맡으면서 제일모직 사장 시절보다 더 바쁘게 지낸 것 같습니다. 취임 당시만 해도 협회에 빚도 많고 직원도 7명밖에 없는 작은 규모였습니다. 그런데 10년 사이 빚도 다 청산하고 협회 직원들도 20여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협회에서 진행하는 사업도 많아지고 그만큼 협회 위상 또한 높아졌다고 자부합니다. 중점을 둔 건 협회 활동을 통해 가시적 성과를 창출하는 것이었는데, 지난해 말 총면적만 하더라도 79만2000여 ㎡에 달하는 이천물류센터가 개관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대단히 크죠. 한국패션협회의 가장 큰 고객은 패션업체들입니다. 특히 중소 패션업체들이 필요로 하는 일인 만큼 불가능에서 가능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를 많이 썼습니다.”
기금을 모으고 부지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요.
“입지 선정부터 자금 모집까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부딪쳤습니다. 2005년에 패션기업들을 대상으로 자본금을 모으기 시작해 한국패션물류주식회사를 만들면서 본격적인 사업 추진에 들어갔습니다. 물류단지 내에 쇼핑시설 건립 계획을 세운 이후 20여 개 업체로부터 약 200억 원의 투자금을 유치할 수 있었습니다. 부지 선정도 쉽지 않았고요. 서울 인근 교통이 편리한 곳에 수십만 평의 땅을 확보하는 게 만만치 않았습니다. 경기도 이천에 지금의 부지를 마련하는데 협상 기간만 1년 6개월이 걸렸으니까요. 그래도 가장 고마운 건 회원사들입니다. 고비가 많았지만 10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믿고 기다려 준 덕에 물류단지 개관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류단지는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 등 투자 규모만 해도 8000억 원이 들어가는 대규모 프로젝트입니다. 6800명 정도의 신규 인력이 채용되는 고용 효과도 기대하고 있고요. 향후 호텔이 건립되면 이천의 관광지와 연계할 계획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천 지역에서 물류단지로 인한 경제 유발 효과나 시장 유발 효과는 엄청날 것으로 기대합니다.”
무엇보다 중소 패션업체들이 물류단지에 대한 기대가 클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중소 패션업체들의 경우 물류센터가 전국 곳곳에 산재돼 있습니다. 패션기업을 위한 전용 물류센터가 만들어진 것은 이번이 최초입니다. 패션기업에 걸맞도록 건물 디자인 등에도 공을 들였습니다. 화재 등의 사고를 철저히 예방할 수 있도록 안전, 보안에도 신경을 많이 썼고요. 특히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은 국내 교외형 아울렛 중 가장 많은 수의 브랜드가 입점할 계획입니다. 친환경적이면서도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 거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패션 포레스트’로 만든다는 구상입니다.” 최근 글로벌 SPA(Special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 브랜드들이 한국 패션 시장을 집어삼킬 기세입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브랜드를 떠나서 시장 전체를 놓고 보자면 글로벌 SPA 브랜드들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는 추세입니다. 글로벌 SPA 브랜드들의 점유율이 높아지는 만큼 국내 브랜드들의 매출이 감소하는 경우가 적지 않거든요. 결과적으로는 국내 패션 브랜드들의 ‘경쟁력’을 키우는 게 관건이라고 봅니다. 지난해 12월 패션협회와 백화점협회가 동반성장 상생협약서를 체결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서로의 입장이나 시각차를 조율할 수 있는 위원회를 구성하고 백화점과 패션업체가 불공정한 거래나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해 나가기로 손을 맞잡았습니다. 이를 통해서도 중소업체들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협회 차원에서도 오랫동안 글로벌 패션 브랜드의 육성을 꾸준히 추진해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해서 여건은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정부나 정치권에서 K패션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부 지원도 거의 없다시피 했어요. 특히 긍정적인 점은 2007년부터 지식경제부에서 패션 산업 지식기반화 사업을 통해 2015년까지 글로벌 패션 브랜드 3개 이상 육성을 목표로 지원해주고 있어요. 패션을 더 이상 제조업이 아니라 ‘문화 산업’으로 키우겠다는 겁니다. K패션이 문화적인 산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최근에는 지식경제부뿐 아니라 서울시나 문화관광부에서도 지원금을 편성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문화관광부 후원으로 뉴욕에서 문화패션 행사를 개최했고, 서울시는 협회와 함께 파리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고요. 물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예전보다 지원금도 늘어나고 있지만 K패션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합니다. 특히 3~4개 정부 부처에서 지원을 받다 보니까 비슷한 행사에 중복해서 예산이 편성되기도 하는 등 비효율적인 게 분명 있습니다. 이런 걸 통합해서 행사 하나를 치르더라도 보다 집중하고 제대로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는 패션 전문 기업들의 성과는 어떤가요.
“아직은 만족할 순 없지만 가시적인 성과가 하나 둘 보이는 단계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지난해 9월 산업통상자원부의 지원을 받아 중국 상하이에 비즈니스 센터를 개관했습니다. 7개 패션 브랜드를 뽑아서 글로벌 브랜드로 육성시키는 게 목표인데, 비즈니스 센터에 각 브랜드마다 쇼룸을 만들어주고 패션 제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중요한 건 패션 브랜드 전시회든 쇼든 일회성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해외의 바이어들과 우리 브랜드 관계자들이 지속적인 만남을 갖고 교류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해외 현지에 비즈니스 센터를 개관하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중소 패션업체들이 1차적으로 해외 시장에 나가기 위한 디딤돌 구실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토종 글로벌 브랜드가 나올 수 있을까요.
“세계 시장에서 K패션이 주목을 받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가 탄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단지 디자이너들의 재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뛰어난 디자이너들이 많은데 자본이 뒷받침돼야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키우는 데 뜻있는 독지가들의 후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쉽게도 디자이너 육성이 원활하지는 못합니다. 몇 년 전에도 ‘월드 디자이너’ 육성을 위해 패션디자이너 세 명을 선정했는데, 지속적인 지원이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다른 디자이너들이 선정 기준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면서 논란이 일었고, 정부에서도 지원금을 없애버린 겁니다. 그땐 참 아쉽더라고요. 누가 먼저 혜택을 받든, 다른 디자이너들도 조금만 기다리면 곧 자기 차례가 돌아올 텐데 말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지금까지도 패션협회는 국내 패션 업계 현실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주제를 연구하는 ‘글로벌패션포럼’을 개최하고, 산업통상자원부 후원으로 ‘코리아 패션 대상’을 수여하는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해 왔습니다. 특히 앞으로는 한국 패션 시장의 세계화를 통해 우리나라가 패션강국으로 거듭나는 데 중점을 둘 방침입니다. 현재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건 패션진흥법 마련입니다. 이를 통해 정부가 패션 산업에 예산을 편성하는 데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패션은 성장 잠재력이 뛰어난 산업입니다. 그런데 이를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주체가 없어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패션산업발전위원회를 출범시킨 만큼 올해는 보다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고 실질적인 지원이 이뤄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대담 권오준 편집장 | 정리 이정흔 기자 verdad@hankyung.com | 사진 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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