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12월 13일 광무대(지금의 새문안교회 자리) 노천 무대에는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성대한 기념식이 열리고 있었다. 이날 행사에는 고종황제와 대소 신료는 물론 미국 러시아 청나라 일본 주변 열강의 축하 인사들로 북적거렸다. 부국강병을 꿈꾸며 성군의 길을 걷고자 했던 고종의 감회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이날의 주인공으로 하나를 더 추가했다. 재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칭경식(稱慶式)에는 신형 어차(御車)가 공개되는 시간이 마련됐다.이날 공개된 자동차는 세계 자동차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미국 포드사의 포드A형. 이 차가 국내에 선보이게 된 것은 고종 재위 시 탁지부대신(현 재경부장관) 이용익이 대한제국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신식 문물인 자동차를 선보일 것을 주청한 것이 계기였다. 당초 고종은 어려운 나라 살림을 이유로 반대했으나 신하들의 적극적인 주청에 못 이겨 수입을 허락했고 이용익은 미국 공사이자 주치의였던 H N 앨런에게 고종의 뜻을 알렸다. 앨런은 즉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자동차 판매상이던 프레이저에게 전보를 쳐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포드A형 4인승 컨버터블 1대를 들여왔다.자동차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도 공식 의전용으로 자동차가 사용된 것은 고종의 칭경식보다 불과 2년 앞선 1901년이었다. 당시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은 스탠리 증기자동차에 앉아 잠시 공회전을 즐겼으며 이것이 미국 역사상 최초의 의전 자동차로 기록되고 있다.다시 고종의 어차 이야기로 돌아가자. ‘움직이는 포드’라 불렸던 오리지널 포드A형은 포드자동차회사에서 생산된 최초의 자동차로 1903년부터 생산됐다. 이 차는 시카고 에른스트 페니히 박사에 의해 설계돼 1903년 7월 23일 처음 공개됐으며 1904년 포드 모델C가 발표될 때까지 1750대가 제작됐다.이 차는 2인승 무개차와 4인승 두 가지이며 수평으로 된 탁자가 실내 한가운데 있었고 6㎾의 전력으로 움직였다. 포드A형에 장착된 3기통 트랜스미션은 후속 모델인 포드T형에 많은 영향을 줬다. 무게는 562kg으로 시속 72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으며 길이는 1.8m였다. 이 차는 당시만 해도 대당 750달러(2인승 기준)에 판매됐으며 4인승으로 개조하기 위해 좌석이나 문을 하나 더 달면 100달러씩을 추가로 내야 했다. 또 지붕을 고무로 만들면 30달러, 가죽으로 만들면 50달러의 추가 비용이 필요했다. 포드자동차는 이 차를 제작하기 위해 2만8000달러의 투자 펀드를 조성했으며 결국 모든 비용을 제하고 223달러의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포드A형은 포드자동차와 설립자인 헨리 포드의 첫 성공 작품이지만 변속기가 주저앉고 엔진이 지나치게 과열되는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대한제국에서 포드A형은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당초 고종은 이 차를 국가 행사 때 사용할 생각이었으나 소음이 심하고 매연이 심해 주로 전시용으로 사용했으며 이듬해인 1904년 러일전쟁 통에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후 1908년 고종은 의전용으로 영국산 다임러 리무진과 프랑스산 르노 리무진을, 1910년에는 캐딜락을 추가로 수입했다. 1910년에 수입된 캐딜락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복원돼 현재 창덕궁 내에 전시돼 있다.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자동차는 어떤 모습일까.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1955년 8월 서울에서 자동차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 혜성, 순성 씨 등 3형제가 미 군용차량인 지프의 엔진과 변속기에다 드럼통을 붙여 만든 지프형 자동차 ‘시발’이 최초로 기록되고 있다. 2도어로 만들어진 이 차에는 4기통 1323cc 엔진이 장착돼 있으며 전진 3단에 후진 1단이 가능한 변속기가 설치돼 있었다. 제작하는 데 4개월 이상이 소요되고 차 값이 대당 8만 환으로 고가여서 대중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던 시발자동차는 최무성 씨가 1955년 광복 10주년을 기념해 열린 산업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타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됐으며 이에 따라 차 값이 하루아침에 30만 환으로 폭등했다. 한달 도 못돼 1억 환이라는 당시로선 상상도 못하는 돈이 모이자 최 씨 형제는 바로 양산 체제에 돌입했다. 이후 시발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일부 상류층 사이에서는 투기 붐이 일어났으며 시발자동차를 사기 위한 ‘시발계’는 물론 웃돈이 얹어져 전매되는 촌극이 발생하기도 했다.자동차는 때로는 인류 역사에 비극적인 결말을 만들어낸 현장과도 함께 했다. 1914년 6월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 부부는 육군 사열식에 참석한 후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사라예보는 500년간 터키의 지배 아래 있다가 막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 곳이었다. 당초 사라예보의 보스니아 사람들은 세르비아와의 통합을 원했으나 오스트리아가 되레 그들이 적대시하던 체코와 통합을 시키면서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던 터였다.이 때문에 당시 오스트리아 관료들은 페르디난드 부부의 사라예보 방문을 매우 염려했다. 그러나 페르디난드 황태자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장차 황제의 자리에 오를 사람으로서 식민지의 안보까지 챙겨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의무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6월 28일 사라예보를 전격 방문하는 길에 괴한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황태자 부부는 급히 본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결국 서둘러 귀향하던 황태자 부부는 가브릴로라는 보스니아 청년이 쏜 총탄에 맞아 숨졌으며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황태자 부부는 오스트리아의 명차였던 그래프 운트 스티프트(Graf & stift)에 타고 있었다.현재 오스트리아 빈박물관 사라예보홀에 전시돼 있는 이 차는 당시 롤스로이스에 버금갈 만한 성능을 가진 자동차로 평가받았다. 1902년 오스트리아 자동차 기술자였던 하인리히, 칼 그래프, 프란츠 형제와 투자자 빌헬름 스티프트가 공동으로 설립한 그래프 운트 스티프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럭셔리 자동차의 대명사로 군림했었다. 당시 황태자 부부가 탔던 모델은 이 회사가 생산하는 리무진 더블 페이톤(엔진번호 287)으로 1910년 11월 프란츠 본 하라흐 공작이 구입했다. 이 차에는 4기통 32마력의 벤츠 엔진이 장착돼 있었으며 사라예보에는 1914년에 전달됐다.이후 유럽 전역이 전쟁터로 변하면서 롤스로이스와 같은 럭셔리 자동차를 꿈꿨던 그래프 운트 스티프트는 군용 트럭을 생산하는 자동차 메이커로 변신했으며 결국 1971년 유럽 상용트럭 제조회사인 만 그룹에 매각된다. 존 F 케네디가 탔던 1961년식 링컨 컨티넨털 리무진도 비운의 자동차로 꼽힌다. 1939년부터 생산된 포드 자동차 계열의 링컨 컨티넨털은 1981년 새로운 모델인 타운카가 등장할 때까지 링컨의 대표적인 4도어 럭셔리 세단으로 전 세계 자동차 마니아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케네디는 1963년 텍사스 댈러스에서 암살될 때까지 ‘SS 100-X’라고 불리는 프레지덴셜 컨티넨털을 애용했다.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케네디는 이 차를 카퍼레이드 등에 자주 사용했다. 이 차는 덮개를 열고 닫을 수 있는 컨버터블로 4도어를 기본으로 디자인됐으며 엔진 출력이나 그릴, 헤드라이트, 범퍼 등은 1962년식을 기초로 했다. 당시 미국의 유명한 자동차 제작자였던 헤스와 아이젠하트는 이 차를 설계하면서 외관을 방탄으로 두르고 천장을 고정식을 바꿨다. 그러나 아쉽게도 헤스와 아이젠하트의 이런 안전 장치는 전혀 사용되지 못했다. 댈러스 시가행진에서 케네디는 덮개를 열고 군중에게 답례하다 오스왈드의 저격을 받는다. 그 이후부터 대통령 전용 차량에서 컨버터블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링컨 컨버터블 1961년식은 당시 2만4000마일을 주행하고 2년간 충격 방지 실험을 거쳐 생산된 자동차였기에 내구성 면에서 소비자들에게 높은 점수를 얻었다. 현재 이 차는 미시간 주 디어본에 있는 헨리 포드 자동차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