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사이에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아프리카로 향하는 이들이 빠뜨리지 찾는 곳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희망봉, 요하네스버그의 다이아몬드 광산, 그리고 카지노와 야생동물보호구역을 돌며 아프리카 대륙과 유럽 문화의 절묘한 조화를 만끽한다.사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을 찾으면서 ‘아프리카’의 거친 느낌을 기대했다면 그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질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입법수도 케이프타운(남아프리카공화국은 수도가 입법, 행정, 사법 등 3곳으로 구분돼 있음)에 첫발을 내디디면 당황스러움부터 생긴다. 어디를 둘러 봐도 ‘아프리카’의 흔적은 없고 지중해 어느 해안 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유럽보다 더 유럽다운 도시’라고 감탄한다. 그 표현대로 케이프타운은 파스텔 톤의 유럽 분위기를 연출한다. 유럽계 백인의 수가 전체 시민의 35%나 되고, 17세기 중반 아프리카 진출을 꾀하던 네덜란드인들이 맨 처음 발을 디뎠다는 가이드의 안내를 듣고 나면 이 아름다운 아이러니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케이프타운은 남아프리카에 뿌리를 내린 유럽인들에게는 제2의 고향인 셈이다. 아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들은 케이프타운을 ‘어머니의 도시(Mother City)’라고 부른다.검은 대륙에서 만난 유러피언의 거리사실 빠듯한 여행 일정에 희망봉, 테이블마운틴, 그리고 케이프타운 시내만 둘러보기도 숨이 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문화가 대륙에서 어떻게 다시 꽃피웠는지를 몸으로 느끼려면 이 일정표에 한 곳을 더 추가해야 한다. 아니, 다른 곳을 빼더라도 꼭 들러야 할 곳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케이프타운 외곽의, 남극으로 향하는 인도양과 대서양이 뒤섞이는 바다를 앞에 둔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하버가 그곳이다. 케이프타운에서는 19세기 영국 식민사를 써 갔던 빅토리아 여왕과 그의 남편 앨버트 공의 이름을 딴 건물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데 그 중심이 바로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하버다. 더 나아가 영국의 아프리카 대륙 식민지 개척의 디딤돌이 되었던 곳 역시 이 부두다.그러고 보니 부두의 이름이 무척이나 낯익다. 홍콩 호주 캐나다 등지를 찾았을 때 어김없이 ‘빅토리아’라는 명칭을 딴 항구를 들렀었다. 이쯤이면 눈치 챘겠지만 모두가 영국의 식민지 경영이 활발했던 곳들이다. 정복자는 자신의 영지에 무언가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충직한 개척자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땅을 여왕에게 바치며 충성을 맹세한다는 의미로 주요 항구에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붙였다.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하버는 주변의 섬이나 바다로 오가는 관문이기도 하지만 케이프타운 사람들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휴식처로 더 익숙한 곳이다. 해안을 따라 조성된 하버 지역에서 번듯한 현대식 건물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빅토리아풍의 건물들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하버의 풍경에는 200년 가까운 시간이 묶여져 있다. 케이프타운 최고의 호텔로 손꼽히는 ‘빅토리아 호텔’과 대형 쇼핑몰 ‘빅토리아 워프(Victoria Wharf)’는 현대에 지어졌으면서도 예스러운 양식을 고집한 건물들이다. 이미 오래 전에 지어졌던 건물들도 레스토랑이나 숍 등으로 약간의 개조를 거쳐 쓰이고 있을 뿐 건물 안팎의 분위기는 변함이 없다.케이프타운 사람들과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바다와 요트,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케이프타운의 또 하나의 상징물, 테이블 마운틴이 어우러진 풍경을 즐긴다.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노천카페나 레스토랑, 바를 찾아 더 한가로운 시간을 보장받는다. 사실 랜드(남아프리카공화국의 화폐)의 가치는 상당히 낮고 물가도 싼 편이다. 유럽의 슈퍼마켓에서 고가로 판매되는 생필품들의 가격은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수준이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생선 요리 한 접시를 주문해도 우리 돈 1만 원이 조금 넘을 뿐이다. 나폴리와 그리스 등 지중해변 레스토랑에서 맛볼만한 해산물 요리도 이곳에서라면 부담이 없다. 여기에는 소득이 시원찮은 대부분의 국민(흑인)들의 삶에 맞추기 위한 국가의 정책이 깔려 있는데, 되레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는 이곳의 유럽계 백인들이나 여행자들이 ‘사회복지’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과 곳곳에서 자신의 음악을 녹음한 음반을 늘어놓은 거리의 악사들의 모습에서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하버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겨진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이곳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다. 하버 지역을 찾았을 때 우연히 흑인 가스펠 아카펠라 팀을 볼 수 있었다. 흑인 특유의 깊고 풍성한 음성과 춤 솜씨는 아프리카인다운 ‘끼’를 한껏 발산한다. 멀찍이 있던 사람들까지 무언가에 홀린 듯 이 아마추어 가수들의 노래에 반해 모여들게 한다. 하버 한 쪽 나무그늘 아래에서 초기 재즈 연주자를 떠올리게 하는 중절모 차림의 늙은 흑인 색소포니스트가 차분한 독주를 이어가는 것도 볼 수 있다. 이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하버의 남다른 풍경을 완성한다.유럽식 문화가 세계와 숨을 쉬는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하버케이프타운에서 지중해 풍을 가장 쉽게 마주할 수 있는 하버 지역에서도 흑인을 찾는 일이 더 어렵다고 할 만큼 백인들로 넘쳐나는 곳이 있다. 대규모 쇼핑몰과 최고급 호텔을 함께 두고 있는 ‘빅토리아 워프’다. 케이프타운 최대의 쇼핑몰인 ‘빅토리아 워프’는 전형적인 빅토리아풍의 외관에 유람선을 컨셉트로 설정, 갑판과 철제 난간 등을 떠올리는 분위기로 실내를 인테리어했다. 몰 하나가 거대한 범선을 닮은 것인데, 널찍한 실내는 지붕까지 이어진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고 따뜻한 햇살로 가득해 흡사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하버와 이어진 부둣가 거리를 방불케 한다.각종 생필품에서부터 기념품, 보석 및 의류, 기호식품 등이 사람들의 발과 시선을 멈추게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만든 것에서부터 해외에서 수입된 유명 명품 브랜드에 이르기까지 그 수준도 다양하다. 특히 남아프리카가 자랑하는 보석 전문 숍들이 많은데, 입구에 따로 경비원을 두고 철문을 한 겹 더 두를 만큼 값진 보석들을 선보이는 곳들도 많다. 여기에 생필품을 구비하고 있는 대형 슈퍼마켓인 ‘픽 앤드 바이’도 함께 있어 쇼핑의 사소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다. 쇼핑몰 내에 자리한 다양한 세계의 요리들을 선보이는 식당과 카페 등은 꼭 쇼핑이 아니더라도 이곳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물론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고객은 백인들이고, 많은 숍들이 그들과 외국인 여행자들의 기호에 맞는 제품들을 갖추고 있다.이곳과는 대조적으로 하버 지역에서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길목에는 원주민들이 다양한 수공예품을 들고 나와 좌판을 벌여 자연스럽게 장이 선다. 이곳에 나온 물건들은 대부분 아프리카 원주민이나 토속 신, 야생동물 등을 깎은 목각 공예품이거나, 그림을 그리고 때론 사진을 입힌 타조 알 등이다. 아프리카 원석을 이어 만든 목걸이와 팔찌, 귀고리 등은 어떤 인공적인 손길도 가하지 않은 투박함에 영롱한 빛을 담고 있어 더없이 매혹적이다. 물론 다듬어진 상태가 조금 서투르기도 하지만 번듯한 숍에서 같은 물건을 쇼핑하는 것보다 두 세배나 저렴한 것들도 있다. 잘 고르면 어느 고급 액세서리 못지않은 것을 살 수 있고, 무엇보다 원주민들과 얘기를 나누며 흥정을 벌이다 함께 기분 좋게 웃거나 혹은 적당한 에누리를 얻는 재미가 여기에 있다.저녁이 되면 바다를 바라보는 레스토랑과 바가 또 한 번 사람들로 넘쳐난다. 전형적인 영국식 펍과 프렌치 레스토랑, 미국식 스테이크 하우스와 더불어 중국식 레스토랑과 일식당 등도 하버를 따라 자리하고 있다. 오후를 하버에서 보낸 이들은 하나 둘 스포츠 바나 레스토랑 등으로 모여든다. 바다의 잔물결이 창밖으로 비치는 곳에서 우아한 식사를 즐기거나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축구 경기를 대형 모니터로 관람하며 맥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하버의 주인이 되는 시간이다. 만약 누군가의 눈을 가리고 이 바와 레스토랑 등에 데리고 와 눈가리개를 푼 뒤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런던 혹은 파리, 때론 뉴욕이라고 답할지도 모른다.낯선 곳을 찾은 여행자들에게는 늘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시선이 존재한다. 이곳 케이프타운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하버를 찾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유럽풍으로 아름답게 가꿔진 하버를 다니며 아프리카의 새로운, 그리고 익숙한 아름다움에 감탄할지 모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유럽인들에 고스란히 자리를 내어준 원주민들의 아픔을 떠올리며 이맛살을 찌푸릴지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어느 여행지보다도 케이프타운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하버는 이곳을 채운 이종 문화의 접합점들만큼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디엔가로 떠나는 것이 더 넓고 다양한 시선을 알아나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꼭 이곳을 들러볼 일이다. 그리고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하버가 전하는 남다른 감상을 오롯이 느껴볼 일이다.글·사진 남기환 비틀맵 트래블 편집장바다를 사이에 둔 다른 시간, 다른 역사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부두는 가장 아늑하고 여유로운 부둣가와는 전혀 다른 사연을 담고 있는 또 하나의 장소로 떠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부두에서 20여 분 정도 배를 타고 간 곳, 로빈 섬이 그곳이다. 어쩌면 가장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관광지. 남아프리카를 우리에게 알려 준 넬슨 만델라가 17년 동안 유형의 세월을 보냈던 섬이다.로빈 섬에는 백인들의 차별 정책에 저항하는 흑인 정치범들을 수용하던 감옥이 있다. 거의 기복이 없는 섬 위 황량한 초원 위에 세워진 감옥. 좁고 차가운 감방이 닭장처럼 늘어서 있는 이곳은 웬일인지 항구에 비해 유난히 센 바람과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었다.감옥은 관광객들을 위해 개방돼 있고, 매일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곳에 들른다. 당시 죄수들의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이 곳곳에 걸려 있고, 그 속의 어두운 표정들과 마주한 순간 사람들은 절로 침묵한다. 중죄인을 격리 시켰던 독방과 하루에 겨우 20분의 산책 시간이 주어졌던, 사방이 막힌 마당, 그리고 겨우 식탁 몇 개만이 놓여 있는 식당이 회색 빛깔의 벽에 갇혀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대형 쾌속선으로 섬에 도착한 사람들은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지고 몇 명의 가이드를 따라 감옥을 둘러보게 된다.가이드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복역했던 ‘전과자’들이다. 어떤 이는 혹독한 고문으로 다리를 절기도 한다. 또 자신들이, 그리고 동료들이 겪었던 참혹했던 시간을 떠올리는 동안 잠시 말을 멈추곤 했다. 당시의 상황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설명하다가 관람 시간을 훌쩍 넘겨 버리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들의 행동이 자유로워졌을 뿐, 별로 달라진 것 없이 여전히 유럽인들의 낭만과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케이프타운. 우연일는지 모르지만 그 날 로빈 섬을 찾은 관광객들 가운데 백인들의 수는 케이프타운의 여느 곳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적었다.Travel Tip케이프타운으로 가려면 : 현재 한국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는 직항편이 없어 홍콩을 경유하는 편이 일반적이다. 홍콩~요하네스버그 구간은 남아프리카항공이 매일 저녁 7시 55분(홍콩 시간) 직항편을 운항한다. 비행시간은 약 13시간 30분이다. 요하네스버스에서 케이프타운까지는 국내선을 이용하며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