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지킴이 박술녀
늘로 행복을 꿰매는 여자, 한복 연구가 박술녀(50)가 대규모 한복 패션쇼를 개최했다. 이 패션쇼는 여러모로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23년 한복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지는 단독 작품 발표회인 데다 쇼에 출연하는 40여 명의 모델이 모두 유명 연예인이었기 때문.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운 이 시대 ‘별’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것만으로도 박술녀의 진가는 확인됐다. 그녀가 ‘연예계 마당발’, ‘스타 마케팅의 선구자’로 불리는 것이 절로 실감난다. ‘스타들의 스타’ 한복 지킴이 박술녀의 성공 신호탄은 이미 쏘아 올려졌다.지난 9월 5일 오후 6시 하얏트호텔. 각국 외교사절과 언론계 인사, VIP 고객 등 700여 명의 인파로 로비가 북적인다. 대부분 한복을 잘 차려입은 모습들. 추석이 아직 멀었는데도 이런 진풍경이 벌어진 것은 바로 한복 연구가 박술녀가 이곳에서 대규모 단독 패션쇼를 열기 때문이다. 그녀가 저고리에 바늘을 끼운 지 23년 만에 처음 갖는 작품 발표회다. 쇼가 조금 지연됐지만 누구 하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설레는 표정들이다.이날 행사는 이금희 아나운서와 배우 정보석의 사회로 진행됐고 그동안 친분이 깊었던 40여 명의 연예인들이 무대에 섰다. 원로·중견 배우 황정순 백일섭 강부자 사미자 박정수 견미리를 비롯해 조여정 이수경 박예진 서경석 등 신세대 스타들과 김보연 전노민 부부, 남희석 부부, 이세창 김지연 부부 등이 화사한 한복 워킹에 동참했다. 원로 배우 황정순(81) 씨가 힘겹게 ‘워킹’할 때 강부자 씨가 뒤에서 부축하며 감동의 눈물을 터뜨린 순간에는 장내가 숙연해지며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특히 이번 작품 발표회에서는 시대별(후고구려 후백제 통일신라 조선), 계절별, 약혼, 혼례복, 드레스 등 200여 벌의 작품을 소개해 한복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줬다.“우리 한복에 담긴 특별한 아름다움을 잘 표현해 한복 문화에 일조해 온 연예인을 포함한 고객들에게 감사의 선물을 주고 싶어 이번 행사를 기획했습니다. 한복은 입었을 때 편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 어떤 명품보다 우아한 멋을 내는 게 우리 옷이에요. 나라 한(韓), 옷 복(服)자를 쓰는 한복을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점차 한복이 결혼이나 명절 때나 입는 옷으로 입지가 좁아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견물생심이라고 한복도 자주 눈에 띄어야 입게 되는 법이죠. 육영수 여사처럼 공식석상에서 한복을 즐겨 입는 분도 이젠 없고…. 그게 안타까워 방송 협찬을 시작하게 됐죠. 벌써 15년째네요. 덕분에 ‘스타 마케팅의 선구자’가 된 것이 아직도 얼떨떨해요.(웃음)”지난 1993년, 어느 방송사 코디네이터가 전화로 협찬을 요청해 왔다. 당시만 해도 ‘방송 협찬’이 홍보라는 인식이 없을 때여서 한복 협찬을 해주는 업체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었을 터. 코디네이터가 여러 군데서 거절당하고 박 씨에게 전화했을 때 흔쾌히 ‘OK’ 사인한 게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 그 이후로 방송사들의 협찬 주문이 폭주했고, 개인적으로 연예인들과 안면을 튼 박 씨는 이후 그들의 개인 행사에도 아낌없이 지원해 줬다. 김남주 김승우 부부를 비롯해 안정환 부부 등 스타 부부들이 결혼할 때마다 화사하면서도 단아한 한복을 선보였다. 몇 년 전 내한했던 미국 팝스타 브리트니 스피어스나 R&B스타 어셔도 그녀가 만든 한복을 입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각종 연말연시 시상 행사 및 국내외 귀빈들의 모임 또는 외국 대사관 부인들을 위한 패션쇼, 미스 춘향과 미스코리아에도 협찬하며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1년에 두 번씩 코엑스에서 열리는 결혼 박람회에 패션쇼, 각종 행사, 연예인 협찬까지 다하면서 숍을 관리하려니까 버는 돈보다 나가는 게 더 많을 때도 있었어요. 너무 헤프게 협찬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 생각이 달라요. 명품 회사에서도 왜 협찬을 하겠어요.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스타 문화는 매우 중요해요. 스타들은 대중들의 본보기가 되기 때문에 유행을 만드는 중심이죠. 그들을 통해 한복을 알리고 업계의 발전도 이뤄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겠죠. 뭐든 뿌린 대로 거두게 됩니다.”몇 십 년을 손에서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놓지 않았던 한복 장인이지만 사업가 마인드도 일찌감치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맨손으로 시작해 정상의 자리에 오른 것도 뭔가 특별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충남 서천 출생인 그녀는 7남매의 셋째로, 어려서는 배고팠고 커서는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공부를 포기했다. 남들만큼 공부는 못했지만 어릴 적부터 옷에 관심이 많아 언젠가는 꿈을 이루리라는 것을 늘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스물 넷 되던 해에 어머니가 준 여비를 가지고 서울에 상경해 무작정 한복집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하길 수차례, 삼고초려 끝에 한복 연구가 이리자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하루 4시간씩만 자면서 이를 악물고 배운 끝에 군자동에서 처음 10평짜리 개인 숍을 오픈했다. 그렇게 시작한 숍이 지금은 청담동 요지에 있는 370평의 사옥으로 발전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성실함과 한우물만 파온 고집이 이뤄낸 성과다.“이름이 알려지자 한복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요. 제가 배울 때 무척 고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찾아오면 친절하고 상세하게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저도 많이 배우죠. 요즘도 1주일에 3일을 한국 복식과 바느질 배우는 일에 투자해요.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할 땐 책을 보거나 복식 연구가 선생님들과 상의하죠. 한번은 저고리 목 뒷부분에 수를 넣은 디자인을 개발했는데 동대문에 가봤더니 순식간에 카피가 깔렸더군요. 선구자는 외롭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항상 책임감을 느낍니다.”그녀는 한복의 저변을 확대하고 복식을 다양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한복이라고 하면 저고리, 치마에 마고자, 두루마기 정도만 떠올리던 데서 벗어나 배자, 방한모, 조끼 등 다양한 아이템을 소개하고 각종 액세서리까지 첨가했다. 한복을 시간, 장소, 목적에 맞게 연출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탈바꿈시키고 파티 복으로도 손색없도록 자리매김하는 데 일조해온 것.“한복을 꺼리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불편하다는 이유를 꼽습니다. 저는 이를 없애면서 한복 고유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실용적인 한복을 개발해 왔어요. 전통식에 비해 고름을 얇고 짧게 만들고 배래 폭 역시 조금 좁게 디자인하죠. 고급화도 중요합니다. 박술녀 한복은 모두 세 겹 바느질로 완성합니다. 세 겹의 천을 이은 한복은 10년이 지나도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늘 새옷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죠.”이 밖에도 그녀의 한복 마니아가 많은 또 하나의 이유는 확연한 차별화에 있다. 공장에서 일괄적으로 공급되는 원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공장을 운영하며 필요한 원단을 직조한다. 염색 역시 염색 전문가를 통해 원하는 색깔을 직접 만들어낸다. 다른 숍의 한복들에 비해 색상이 다양하고 섬세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바느질도 직접 한다. 숙련된 바느질 기술자들이 해놓은 작업도 세심히 챙겨보며 조그만 실수를 귀신같이 찾아낸다. 170cm의 큰 체구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빚어내는 여장부의 겉모습에서는 쉽사리 찾아볼 수 없던 이면이다. 배포가 큰 사업가와 꼼꼼한 장인이 잘 조화된 모습이다.철저히 자기 관리와 품질 관리를 한 덕에 상류층의 VIP 손님들이 많은 편이다. “상류층이 주로 찾는 디자인은 튀지 않고 모던하며 심플한 스타일이죠. 그런 손님들일수록 전문가를 신뢰하기 때문에 모든 걸 믿고 맡기는 편이에요.”정신없이 달려온 시간. 그녀에게는 휴일도 없었고 휴가도 없었다. 하지만 지난 해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그동안의 일과 삶에 대해 되돌아보게 됐다. 20년 넘게 몸담았던 공직을 떠나 숍의 재정 부문과 아이들을 도맡아 길러주며 외조해 주는 남편, 바쁘게 사는 동안 훌쩍 커버린 아들과 딸을 위해 저녁 시간은 반드시 가족과 함께 한다. 그 시간만큼은 든든한 울타리인 가족과 함께 마냥 행복한 일상의 주부로 돌아간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