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빅토리아
쉬기 힘들만큼 차가운 건물과 차들로 빼곡한 도시에서 삶에 내몰리며 살아가는 일상들. 그 시간들이 매일 어김없이 이어질 때면 불현듯 떠오르는 곳이 캐나다 빅토리아다. 시간이 멈춘 듯한 옛 정취 속에서 자연의 풍성한 서정을 가까이 둔 덕분에 부유하지 않아도 절로 풍요롭게 살아가는 듯 착각하게 만드는 신비한 여유가 숨어 있기 때문일까. 어느 햇살 좋던 날, 바쁠 것도 급할 것도 없는 사람들 틈에서 느릿느릿 걸음을 떼며 그들의 여유를 몸으로 배웠던 빅토리아 항구의 하루는 시작하고 있었다. 밴쿠버와 인접한, 고구마 꼴의 ‘밴쿠버 아일랜드’ 남단에 있는 빅토리아는 소형 비행기나 수십 대의 버스를 거뜬히 실어 나르는 페리를 이용해 오갈 수 있다. 섬 끝 작은 도시 빅토리아는 휴양 경제 문화의 중심주(州) 브리티시컬럼비아(BC)의 주도다. 캐나다의 각 주는 한반도를 합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기에, 적어도 한 주의 수도라고 하면 그중 가장 번화하고 화려한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이곳의 모습은 너무도 다르다. 사람과 차를 실어 나르기 위한 목적의 페리지만, 그저 이동 수단이 아닌 또 다른 여행의 모습과 만날 수 있는 여정이다. 깊고도 푸른 바다와 그 색감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하늘 사이를 가르는 배는 해협 곳곳에 지뢰처럼 솟아오른 무인도를 잘도 피해간다. 캐나다 특유의 침엽수림이 발달한 무인도들은 원시림인 듯 짙고 울창하다. 1시간30분간의 항해지만 그 시간이 지루할 틈이 없는 것은 이 무인도들의 풍경을 감상하고, 틈틈이 승객들에게 제공되는 차와 스낵, 그리고 갑판에서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는 매일 대륙과 섬 사이를 페리를 이용해 출퇴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루 두 번의 바닷길 여행이라니. 그 상황만으로도 삶의 스트레스는 이미 태평양 건너 먼 나라 이야기로 남겨진다. 항해가 끝나면 페리는 버스와 사람들을 빅토리아 북부 스와츠 항구에 부지런히 내려놓는다. 여기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이 빅토리아시 중심가다. 시 중심가는 빅토리아 내항(內港)을 중심으로 조성돼 있다. 자연스럽게 바다와 배, 그리고 해안도로가 어우러지는데, 바다를 바라보는 빅토리아 왕조풍의 건물들이 이곳만의 독특한 풍경에 한몫 거든다. 푸른 청동빛 돔을 곧추세우고 넓은 잔디 정원을 두고 있는 건물은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의사당(Legislative Buildings)’이다. 고층 건물보다 100년 가까운 세월을 간직한 것들을 찾기가 훨씬 쉬운 이곳에서, 의사당은 빅토리아가 브리티시 컬림비아 주의 주도임을 상징하는 듯 웅장한 외관을 자랑한다. 1897년 지어진 의사당 건물 외에 오래된 건물들이 유난히 많은 것은 캐나다로 입성한 영국인들이 처음 개척한 곳이 밴쿠버와 빅토리아였기 때문이다. 1778년 제임스 쿡 선장이 밴쿠버 섬을 발견하고 이어 1842년부터 본격적으로 영국 상인들이 빅토리아로 진출하면서 캐나다 개척의 역사는 시작된다.아래로 미국 시애틀을 지척에 둔 빅토리아는 항구 주변의 모습이 마치 미국 개척 시대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빅토리아 항구 가까운 곳에서는 100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생생히 전하는 곳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그저 한가로이 서있는 관광지가 아니라 지금도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들이다.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빅토리아 차이나타운도 그중 하나다. 캐나다 내에서 가장 좁은 상업 거리로도 유명한데, 중국 식재료, 생활용품, 가구, 골동품 등은 물론 중국 식당들이 빼곡하다. 건물 역시 붉은 벽돌을 올린 전형적인 서부 개척시대의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이곳뿐만 아니라 각종 관공서, 레스토랑과 바, 베이커리 숍 등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구시가 구역에서 여전히 성업 중이다. 쇼윈도에는 예스러운 필체로 가게 이름과 품목 등이 적혀 있어, 19세기 말엽의 서부 마을을 걷는 듯한 즐거움까지 챙겨볼 수 있는 곳이 구시가 거리다. 100년 넘게 가업으로 운영되는 유명 초콜릿 숍에서 신선한 수제 초콜릿을 맛볼 수 있는 행운도 뒤따른다.차이나타운과 구시가 거리에서 시작한 시간여행은 마켓 스퀘어(Market Square)로 이어진다. 영화 ‘워터프런트’의 배경이 됐던 부두 창고를 연상시키는 분위기로 19세기 말에는 공장, 여관, 살롱, 역마차 정류소 등이 들어서면서 빅토리아에서 사람들이 가장 북적이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1970년대부터는 일반적인 잡화나 의류를 판매하는 숍들과 갤러리가 자리하면서 대중적인 쇼핑몰로 탈바꿈했다. 중간의 널찍한 광장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 길로 상점가를 뻗어내고 있어 일일이 다 둘러보려면 제법 시간을 들여야 한다. 오랜 건물이지만 꾸준히 손을 본 덕에 쇠락한 느낌을 주거나 을씨년스럽지 않고 오히려 햇살에 반짝이는 붉은 벽돌의 질감이 멋스러울 정도다. 구시가를 둘러보고 다시 의사당 쪽으로 걸어왔을 때 마차 한 대가 천천히 지나고 있었다. 빅토리아 항구와 주변을 둘러보는 관광 마차인데, 덮개를 한껏 젖힌 채 시원한 바람과 바다, 그리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의 조화를 온 몸으로 즐길 수 있다. 마차에 올라탄 이들의 표정은 영국 왕실의 근위대 사열에라도 초대받은 듯 점잖아졌지만, 그 와중에도 주변 풍경을 둘러보느라 분주하다. 이들은 여행자의 자격으로 왔지만, 이 관광 마차에 타는 순간 어느새 다른 여행자들의 탄성과 함께 그들의 분주한 카메라에 담기며 빅토리아항의 관광 명물이 되는, 유쾌한 반전이 시작되는 것도 이때다. 항구에서 도로 하나를 더 들어가면 19세기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목조 저택들이 울타리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의 펜션을 떠올리게 하는 목조 저택은 대부분 호텔이나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게츠비 맨션’ ‘샤토 빅토리아’ ‘스완’ 등이 유명한데, 이곳의 으뜸가는 매력을 찾으라면 단연 아늑함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 저택에서 묵는 하룻밤은 빅토리아에서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된다. ‘정원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창을 열면 널찍한 정원과 먼 항구의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순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빅토리아에서 가장 이름 있는 호텔을 묻는다면 누구나 ‘페어몬트 엠프레스 호텔(The Fairmont Empress Hotel)’이라고 알려준다. 영국 건축가 프랜시스 모슨 래튼베리의 설계로 1908년 완공된 호텔은 현재 416개의 객실을 보유한, 빅토리아 항과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진한 영국풍을 안팎에서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사랑받고 있다. 빅토리아, 아니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를 통틀어서 이보다 더 호사롭고 고풍스러운 호텔은 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곳에서 묵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안락한 여행을 즐겼는지를 가늠하게 하지만, 여행자들에게 그에 걸맞은 호사로 통하는 시간이 있다. 바로 2차대전의 포격 속에서도 영국인들이 고집스럽게 지켜냈다는 ‘애프터눈 티’. 페어몬트 엠프레스 호텔 로비에서 매일 오후 맛볼 수 있는 애프터눈 티에는 영국식 차와 함께 맛나게 구운 쿠키와 케이크 등이 차려지는데, 선뜻 손을 대기가 망설여질 만큼 아기자기한 모양과 색감을 자랑한다. 재미있는 것은 차와 쿠키를 서비스하는 이들의 복장이 전형적인 영국 왕실의 시종을 닮아 있고, 말투 역시 낮은 저음에 간드러지는 듯 잔뜩 멋을 부린, 영국 신사풍 그대로다. 분위기며 멋이며, 런던의 품격 있는 티 하우스를 고스란히 옮겨 온 듯하다. 차 한잔의 호사가 끝나고 다시 돌아온 항구는 여전히 오후의 따뜻한 햇살 속에서 반짝인다. 어느새 여행자들이 부두로 내려가는 계단을 객석 삼아 앉아 있고, 그들의 박수 속에서 누군가의 저글링 묘기가 한창이다. 곤봉을 현란하게 돌리는가 하더니 불을 내뿜는 묘기도 제법이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저절로 모여든 사람들이 관객이 된 즉석 서커스뿐만 아니라 거리 음악가들의 연주 등이 평일 휴일 할 것 없이 항구 곳곳에서 열린다. 요트와 바다를 배경 삼아 예술가들이 펼치는 공연은 유럽의 거리를 떠올리게 하지만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번잡함은 이곳에 없다. 그 여유로운 모습 때문인지 동전 몇 개에 미소를 보내는 빅토리아의 거리 예술가들에게서는 닳고 닳은 느낌이 없다. 시계는 1800년대를 가리킨 채 멎어 있고, 잔잔한 해풍이 살짝 다가온 항구에서 보낸 하루. 어느새 빅토리아의 추억은 오랜 멋스러움과 그 속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함께 그려낸 한 폭의 풍경화로 다가올 것이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