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마스터 블렌더 이종기 조니워커스쿨 원장
니워커스쿨 이종기 원장(51)에게 윈저 21년산은 매우 특별한 위스키다. 지난해 말 출시돼 주류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윈저 21년산은 국내 유일의 마스터 블렌더(위스키 개발·품질 유지 책임자)인 이 원장의 저력을 보여준 또 하나의 히트 상품으로 기록된다. 윈저 21년산은 스코틀랜드의 세계적 마스터 블렌더 제임스 베버리지와 이 원장의 합작품이다. 약 9개월 간 베버리지와 이 원장은 샘플을 교환해 가며 맛과 향을 개선했다. 윈저 21년산을 개발하면서 그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가장 한국적인 위스키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윈저 시리즈는 세계 최고 위스키 제조업체인 디아지오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개발한 위스키 브랜드다. 때문에 디아지오가 윈저 시리즈에 거는 기대는 그만큼 각별하다.“스코틀랜드 정통 위스키는 우리 입맛에는 잘 맞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잘 팔리는 위스키는 일반적으로 목 넘김이 편한 것들이죠. 외국 면세점에 가면 대부분의 위스키 알코올 도수가 43도인데.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것들은 40도가 보편적입니다.”그래서 그는 윈저를 개발할 때 ‘부드러운 위스키’를 가장 중요시했다. 1996년에 처음 선보인 윈저 12년산도 그의 작품이다. 이 밖에 밸런타인 17년, 로열 설루트 17년 등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 모두 그의 손과 코끝을 거쳐 탄생됐다. 윈저 12년산은 스코틀랜드 현지에 살다시피 하면서 위스키 원액 30~40개를 수백 번 배합해 만들어낸 제품이다.그가 마스터 블렌더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90년부터다. 서울대 농화학과를 졸업한 뒤 1980년 두산그룹 계열사였던 OB맥주에 입사하면서 술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는 OB씨그램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위스키 제조를 시작했다. 1990년부터 영국 에든버러에 있는 양조대학 헤리어트 와트대학에서 양조·증류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1992년 이 대학 석사 학위자를 대상으로 한 시험에 통과해 세계양조협회(IOB) 정식 회원으로 등록됐다. 세계양조협회에 정식으로 등록된 마스터 블렌더는 전 세계를 통틀어 200여 명뿐이며 국내에서 활동 중인 사람은 이 원장이 유일하다. 그의 코와 혀끝에는 전 세계 수백 종류의 위스키 향과 맛이 입력돼 있다. 최상의 예술품을 만드는 장인의 솜씨처럼 마스터 블렌더는 눈을 감은 채 위스키 한 방울 만으로도 술의 미세한 차이를 느낀다. 늘 최상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담배를 피우지 않고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또 후각과 미각을 높이기 위해 한번 맡거나 시음한 뒤에는 최소 20~30분 정도 휴식을 취한다. 혀와 코의 자극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다.그런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대학 때부터 막걸리 통을 옆구리에 끼고 살 정도로 애주가였던 그에게 10년이라는 직장 생활이 가져다준 것은 만신창이가 된 몸과 공허한 마음뿐이었다. “주류회사에 입사한 덕에 술을 질리게 마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술에 대해서 회의가 느껴지더군요. ‘꼭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 ‘술 없이는 정말 살 수 없는 걸까’ 등이 머릿속을 맴돌았죠. 그러던 중 미국의 금주령과 관련된 책을 읽게 됐고 생각을 바꾸게 됐습니다. 요즘 그는 주류 문화 개선에 관심이 많다. 술에 있어선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인 우리의 독특한 주류 문화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영국 유학 시절 주말이면 보건소 직원들과 함께 바른 주류 문화 캠페인을 벌이고 다녔습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이러한 드링크 캠페인의 역사가 깁니다. 어려서부터 바르게 술을 마시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우리에게도 제사를 지낸 뒤 마시는 음복처럼 전통 주도법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어른들에게서 배우는 음복은 술을 마시는 법만 가르칠 뿐 그 이후 행동까지는 책임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물론 그는 청소년 음주를 강제로 막을 수 없다는 현실적인 부분도 인정했다. 우리나라에는 술과 관련해 ‘술은 마셔도 괜찮다’와 ‘술은 무조건 안 된다’는 두 가지 부류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류와 함께 해 온 술은 이분법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영국에 있을 때 알코올과 관련한 손익계산서가 발표됐는데, 응답자의 96%가 ‘술 때문에 생활이 풍요로워졌다’고 대답했습니다.”그는 올 1월 디아지오코리아에서 운영하는 조니워커스쿨 원장에 취임했다. 조니워커스쿨은 디아지오코리아가 건전한 음주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설립한 비영리 주류 교육기관이다. 지난 1989년 설립된 이후 매년 700~800명 씩의 수료생을 배출해내고 있는 이곳은 전액 무료로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2~3년 전만 해도 양주 한 병을 거뜬히 비우는 두주불사였던 그도 요즘은 건강을 생각해 술을 많이 줄였다. 맥주 1500cc에 와인 반 병이 주량이라는 그는 술자리에서 회포를 풀기보다는 골프와 등산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다.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는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터득한 배합기술을 민속주, 양주, 와인 등으로 확대하고 싶어 한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술을 배합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자신의 기술을 여러 방면에서 활용하고 싶어서다. 현재 독학으로 와인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그는 내년 말께 와인과 관련된 전문서적을 낼 계획도 갖고 있다.“앞으로 여건이 허락된다면 우리의 전통 음주 예절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일에 매진하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의 술 문화도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로 바뀌어야 할 때 입니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