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충남 예산 추사고택
월, 반도가 꽃 천지다. 개나리 진달래는 이미 지나갔고 벚꽃 목련이 만개해 여염집 울 너머로 봄이 가득하다. 올봄은 봄 공연 리허설이 유난하더니 이제 완전한 공연에 들어가 꽃의 함성이 지천에 넘쳐난다.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라 했던가. 꽃 지면 마음은 이내 여름으로 달릴 것이다.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가는지. 괜한 마음 정리하고 가는 봄 자락을 잡아볼거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40년 전 충청도 괴산 청천초등학교 교정에 떨어져 날리는 벚꽃 사이로 풍금소리에 맞추어 부르던 고향의 봄 노래가 이젠 정말 시리도록 아련하게 그리워진다. 그림 같은 봄 풍경에 하릴없이 마음이 흔들려 읽던 책 덮고 연구실 문을 나선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고택(秋史古宅) 가는 길. 낮은 구릉 너머 펼쳐진 사과밭이며 복숭아 과수원의 꽃물결이 연둣빛 봄 색과 연분홍빛 복숭아꽃이 어울려 갓 시집온 새색시 한복같이 선명하다. 사과밭 꽃 사이로 벌들이 잉잉거리며 풍요로운 가을 풍경을 기약한다. 새들은 쏜살같이 날아가고, 나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멀리서도 추사고택이 한눈에 금방 들어온다. 봉긋한 산자락 좌우로 벌린 품 안에 고택이 자리하고 바로 그 곁에 추사 묘소가 조용히, 부드럽게 앉아 있다. 당당한 자태로 늠름하게 버티고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만 말없이 세월의 깊이를 보여준다.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면서 하사받은 저택으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정조 10년 6월3일 아버지 노경(魯敬, 1766~1837)과 어머니 기계 유씨(棋溪 兪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난 곳이다.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추사의 영정을 모셔놓은 영실(影室)로 구성돼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고택 풍광에 눈이 환하다. 야트막한 뒷산과 담장 안 봄꽃의 어울림이 그림이다. 목련이며 벚꽃 매화 산수유가 봄의 절정을 보여주고, 햇살이 마당 가득 눈부시게 내린다. 정면으로 마주하는 사랑채는 ‘ㄱ’자 평면으로 대청을 사이에 두고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직각으로 놓여 있다. 군더더기 없이 절제되고 단정하게 서 있는 사랑채 모습에서 그 옛날 추사의 고고한 인품을 보는 듯하다. 사랑채 대청 앞 모란이 눈부시게 피어나는 오월, 추사가 직접 쓴 글씨로 각자(刻字)한 해시계 ‘석년(石年)’ 위로 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뒷동산 꾀꼬리 맑게 우는 소리에 한나절이 간다 생각하니 고택의 느낌이 더없이 적막하다. 동향인 사랑채 뒤로 남향으로 자리한 안채는 이 지방에서는 드믄 ‘ㅁ’자형으로, 양반가의 상징인 6칸 대청을 중앙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을 마주하고 마당을 가로질러 중문을 내었다. 한눈에 언뜻 보아도 대가의 풍모가 넘친다. 안채 높다란 기단 위에 당당하게 자리한 주초와 기둥 그리고 띠살문의 넉넉함, 추녀와 기와의 고색창연함에서 조선 사대부가의 당당한 기품을 본다. 안채 뒤 후원으로 이어지는 추사영실은 추사고택에 제일 높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추사영실’이라 쓴 현판 글씨는 추사의 지기(知己) 이재(彛齋) 권돈인(權敦寅)이 쓴 것으로 추사의 인품을 보듯 붓끝이 굳세고 힘차다. 조선 양반가의 한 전형이다. 추사는 문인이요, 예술가이다. 추사는 역대 법첩과 비석 금석문을 두루 섭렵, 추사체(秋史體)라는 새로운 서체를 창안했다. 추사체는 당시 조선이나 청에서도 일찍이 보지 못한 서법이다. 그는 또한 고증학(考證學)의 문호를 개설한 학자이며 시문에 정통한 시인이자 문장가이기도 하고 불교에 심취해 선교종지(禪敎宗旨)를 깨달은 선지식(善知識:덕이 높은 중)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고증학의 태두답게 경학(經學)과 사학(史學) 금석학(金石學)은 물론 천문학 지리학 문자학 음운학에 정통했고 서화 골동의 감식에도 탁월한 인물이다. 자(字)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 완당(阮堂) 보담재(寶潭齋) 승설도인(勝雪道人) 노과(老果) 등 수십 개다. 한 사람이 이룩한 학문과 예술적 성과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방대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추사가 이렇게 대예술가이자 감식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개인적 천재성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그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은 경주 김씨 월성위(月城尉) 집안의 유복한 가정환경과 북학(北學)의 대두라는 시대배경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추사는 어릴 적 스승인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에게 조선성리학 이외에 당시 신진 학문인 북학을 배워 새로운 학문과 사상에 눈뜨게 된다. 이는 훗날 추사가 청조 학연과 인연을 맺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추사체의 완성은 평생 서도 연마와 학문적 고고함, 그리고 그의 천재성에 기인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추사가 24세 되던 순조 9년(1809) 생원시에 합격하고 동지부사가 돼 연행(燕行)하는 아버지 김노경의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청나라 연경에 가게 된 것이 결정적이다. 이 일은 추사에게 평생 학문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줘 대가의 기틀의 다지는 계기가 됐다. 이는 곧 당시 연경 학계의 태두 소재(蘇齋)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고증학의 대가 운대(芸臺) 완원(阮元, 1764~1849)을 비롯한 많은 학예계(學藝界)의 대가들과 교유하고, 특히 옹방강과 완원은 사제지의를 맺는 계기가 되니 그 인연은 길고도 오래도록 이어졌다.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 역관 이우선은 청의 지인들이 보낸 서적 물품 편지를 추사에게 전하고, 추사 또한 안부와 답신을 글로 적어 청으로 보냈는데 추사는 언제나 꿋꿋하게 신의와 존경을 가지고 일을 도맡아 하는 성심에 감동해 ‘세한도(歲寒圖)’를 그에게 그려 주었다. 이러한 사정은 그림의 발문에 자세히 적혀 있다.연경에서 돌아온 후 1819년 문과에 급제해 규장각 대제, 호서안찰사(충청도 암행어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는 등 학문과 관로에 승승장구하던 추사는 어느 날 불어 닥친 거짓말 같은 운명으로 하루아침에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추사 나이 쉰다섯, 윤상도 옥사에 무고하게 연루돼 9년 간에 걸친 제주도 유배를 시작으로, 예순다섯에는 진종조예론(眞宗 禮論)의 배후조종자로 다시 2년 간 함경도 북청에 유배돼 일흔하나에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의 말년은 그야말로 불운의 연속이었다. 그 고난의 세월을 고스란히 정치와는 상관없는 예술로 승화해 ‘추사체’라는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켰으니, 역사는 하늘이 낸 인물을 가만 두지 않는 법, 참으로 오묘하고 깊은 조화속이라. 누가 무쇠를 두드려 금강석으로 바꾸어 낼 수 있으리. 추사는 자신을 단련해 추사체라는 금강석을 만들어냈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 온 추사의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 ‘명선(茗禪)’ ‘판전(板殿)’ 같은 불후의 명작은 대부분 이 시기에 쓰인 것들이다. 추사의 이러한 운명을 예견이라도 한 듯, 노재상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추사가 일곱 살 때 입춘첩(立春帖)을 써 대문에 붙인 것을 지나다 보고 대대로 좋지 않게 지내는 집안인 것을 알고도 특별히 찾아 들어가서 추사의 아버지 노경(魯敬)에게 대문의 글씨를 쓴 사람에 대해 묻고는,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터인데 그러면 팔자가 사나울 터이니 붓을 잡지 못하게 하는 게 좋겠으며,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린다면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추사 재종손 태제(台濟)가 전하고 있다. 참으로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지만 어려서부터 유별났던 그의 필재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봄기운이 완연한 추사고택 사랑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을 나직이 소리 내어 읽어본다.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추사 나이 일흔하나, 그가 돌아가던 해 마지막으로 쓴 절필이다. 이 대련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는데, 그 글의 방서(傍書)에는, 이것은 촌 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 된다. 비록 허리춤에 말(斗)만큼 큰 황금인(黃金印)을 차고 밥상 앞에 시중드는 사람이 수백 명 있다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칠십일과(七十一果)라고 적혀 있다. 참으로 가슴 아프게 시린 깊은 뜻이 담긴 글이다. 젊은 시절 추사는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병조판서에 이르는 부러울 것 없는 학문과 삶을 살다 하루아침에 절해고도 제주에 억울하게 유배됐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탱자나무 가시울타리에 가두는 위리안치(圍籬安置)라는 혹독한 형벌 속에서 추사는 모기와 비바람과 낮선 풍토와 싸우며 글 읽기와 글쓰기 서화로 고독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유배의 괴로움도 괴로움이려니와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져 있어야 하는 생이별의 아픔은 말로 다 못할 일이다. 그러던 가운데 부인 예안이씨가 죽었다는 부고를 한 달이 지나서야 받게 된다. 어허! 어허! 수 천리 바다 건너 유배 왔을 때도 일찍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는데 지금 부인의 상을 당해서는 놀라고 울렁거리고 얼이 빠지고 혼이 달아나서 아무리 마음을 붙들어 매려고 해도 길이 없으니 이는 어인 까닭인가요. 그때의 심정을 ‘부인예안이씨애서문(夫人禮安李氏哀逝文)’에 절절히 적고 있다. 부인의 임종을 못한 추사의 아픔을 그 어떤 영광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추사는 대단한 지위와 훌륭한 잔치보다 부인 살아생전 아들 손자 며느리와 함께 소박한 음식으로 조촐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평범한 생활이 인생의 최고의 즐거움이자 행복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추사는 절필을 이 대련으로 선택했나 보다. 새는 죽을 때가 되면 우는 소리가 고와지고, 사람은 생을 다할 때가 되면 마음이 선해진다고 하는데, 정말이지 그때가 되면 모든 욕망과 회한이 평범해질까. 마음 닦는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 금년은 추사 선생 돌아가신 지 150주년 되는 해. 그는 갔지만 그의 작품은 영원히 살아 있다. 추사고택 안채 주련에 쓰인 문구(文句) 하나. 고요한 곳 차 마시고 향 피어나고, 오묘한 이치 물 흐르고 꽃이 피네(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꽃이 피나 꽃이 지나, 세월이 가나 세월이 오나 자연의 이치는 변함이 없다. 세상이 다 변하는 것 같아도 자기 본연의 위치는 변하지 않는 것. 진리다. 추사고택의 미감을 표현해 주는 안채 후원의 봄 풍경.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면서 하사받은 저택으로 조선 양반가의 한 범본(본보기)을 보여준다. 야트막한 뒷산과 담장 안 봄꽃의 어울림이 그림이다.이재 권돈인이 쓴 추사영실. 권돈인은 추사의 평생 절친한 벗으로 추사 사후 그의 아들 상무가 추사영실을 세우는 일을 도왔으며 그 현판을 직접 썼다. 추사 글씨를 대하는 듯 글씨가 힘차고 굳세다.화순옹주의 정려문. 남편 김한신이 불과 39세 한창나이에 후사 없이 죽자 10일을 굶어 순절한 화순옹주의 숭고한 뜻을 기린 현판이 열녀문 형식을 따라 주칠 목판에 흰 글씨로 정중히 쓰여 있다.추사고택 사랑채 앞 해시계 받침대 ‘석년(石年)’. 추사가 직접 쓴 글씨를 각자한 ‘석년’은 글씨도 아름답지만 뜻도 그윽하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