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쑤셔서…’ 세기의 투자 귀재 조지 소로스는 ‘등이 쑤실 때’ 투자 방향을 바꾼다 . 적어도 그의 아들에 따르면 그렇다. “아버지는 투자 입장을 바꾸는 이유를 등이 쑤시기 시작하는 증상에서 찾으셨습니다. 그럴 때면 말 그대로 발작을 일으키셨는데 그것이 바로 조기 경보였지요.” 세계적 베스트셀러이자 요즘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신간 ‘블링크’에 나오는 대목이다. ‘블링크’는 ‘순간적인 판단’을 뜻한다. 우리말로는 ‘직관’쯤에 해당한다. ‘등이 쑤신다’는 소로스식 직관의 신호는 그 어떤 장황한 논리보다도 정확할지 모른다. 고수들의 직관은 분석과 탐구, 시행착오의 경험이 농축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뭔가를 보는 순간, 논리적 분석보다 빠르게 온 몸으로 전달되는 신호. ‘지식의 시간차’가 곧 돈이 되는 21세기 스피드 경제의 세계에서 ‘직관’은 꼭 갖춰야 할 비즈니스 덕목이다. 특히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승부를 거는 비즈니스에서 직관은 성공의 핵심 경쟁력이 된다. 직관은 어떻게 쌓일까. 직관을 정형화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우기도 까다롭다. 한 사람의 창업과정을 직관이라는 잣대로 세밀하게 관찰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20대에 대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30대에 창업 실패의 경험을 통해 직관을 단련하고, 그 힘으로 40대에 코스닥 등록 기업의 오너 경영자가 된 우중구 엠피오 사장(43)의 창업 과정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로 했다. 우 사장은 실패와 성공의 시행착오를 통해 냉탕과 온탕 속에서 직관을 단련한 전형적인 샐러리맨 출신 비즈니스맨이다. 그가 일류 직장(삼성중공업)을 박차고 맨손 창업에 뛰어든 것도 ‘등이 쑤셔서’였다. 다만 조지 소로스와 달리 그것은 ‘직관’의 완성된 신호가 아니라 시작이었을 뿐이다. 우 사장이 ‘내 사업’을 차린 것은 1989년. 입사 6년차, 만 스물여덟의 나이였다. 그는 삼성중공업 시절에도 에너지가 넘치는 신입사원이었다. 서울대 조선공학과 졸업과 동시에 삼성중공업에 입사, 선박을 설계하는 엔지니어로 출발한 우 사장은 컴퓨터 앞에 앉아 설계만 하는 게 답답했다. 입사 4년차쯤 되던 무렵 그는 “진정한 엔지니어가 되려면 설계뿐 아니라 현장도 알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 덕에 현장 엔지니어로 나왔다. 설계와 엔지니어를 고루 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기존 방식(설계 엔지니어와 현장 엔지니어의 분리)의 한계를 느낀 우 사장은 혁신(양쪽 분야를 함께 경험)적인 커리어로 활로를 찾은 셈이다. 실적이 나쁠 리 없었다. 세계 최대 컨테이너 설계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사내 외에서 상도 휩쓸었다. 하지만 ‘몇 년 후 저 자리에, 그 후 또 몇 년이면 저기 저 자리에 앉겠구나…’를 매일 목격하고 느끼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게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내 사업’이라는 미지의 분야로 환경을 바꿔 버렸다. 회사에 있는 동안 미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뭘 할지 정한 다음 그만둔 게 아니었다. 무작정 사표를 내고 봤다. 그는 창업에서도 점진적 개선이 아니라 ‘파괴적 혁신’의 방법을 택했다. 첫 사업은 요트 생산. 평소 관심이 많았던 우 사장은 ‘취미’를 사업 아이템으로 정했다. 마침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난 직후라 국내에 요트 붐이 일고 있었다. 강남대로에 요트 전시장이 생기고 대우 등 대기업들도 줄줄이 요트 사업에 뛰어들 때였다. 우 사장은 요트 중에서도 10m 이상 선실과 주방을 갖춘 대형 요트를 택했다. 세계적 요트 디자인 업체 미국 넬슨 마렉 (Nelson /Marek)에서 설계도면을 받아 국내에서 제작하는 형식이었다. 생산한 요트는 일본에 수출했다. 어느 정도 노하우가 쌓여가고 양산 시스템이 갖춰지자 일본 수입처를 담당하던 업체에서 갑자기 납품 단가를 3분의 1로 낮춰버렸다. 가격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 사장은 선택의 여지없이 회사를 일본 수입처 쪽에 넘겼다. 그 수입처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국내 중견 기업이었다. 첫 실패까지의 여정으로만도 우 사장의 특징이 드러난다. 일단 잡은 일에 뜨겁게 달려든다. 하지만 뜨거움 뒤에는 ‘게임의 규칙’을 향한 촉각이 차갑게 곤두선다. 첫 사업이었던 요트는 취미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88올림픽 직후 사회적 변화와 호황이 맞물리면서 붐이 이는 움직임(게임의 규칙 변화)을 포착할 수 있었다. 우 사장의 비즈니스 직관 공식은 ‘좋아하는 일+게임의 규칙 찾기’로 인수분해되는 셈이다. 하지만 첫 사업에서는 게임의 규칙을 찾는 눈이 불완전했다. 시장이 열릴 것으로 보고 제조에 열정을 기울였지만, 유통의 힘(일본 수입처의 비즈니스 파워게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인터뷰 도중 필자는 이런 질문을 했다. “실력 있고 성실한 샐러리맨들이 사내 정치, 파워게임에 회의를 느껴 회사를 박차고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라는 질문이 끝을 맺기도 전에 우 사장은 “그런 사람은 창업하지 말아야죠”라고 맞받았다. “파워게임에 무감각한 사람은 창업해도 망한다”는 얘기다. 일본 수입처에 뒤통수를 맞은 경험을 털어놓으며 상대 업체 탓은 한마디도 안 한 채 “내가 순진했다”며 웃어 넘기는 이유기도 하다. 그는 다음 사업에서 아예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90년대 중반, 사업을 구상하던 중 그는 국내에서 처음 생긴 마포의 한 양판점에 가게 된다. 엄청난 양의 상품을 쌓아놓고 싼 값에 물건을 팔고 있었다. 사람들은 주말에 가족 나들이 겸 쇼핑으로 이곳을 찾았다. 우 사장은 이 새로운 유통 형태가 비즈니스의 게임 규칙을 뒤바꿀 것이라고 봤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러 겹의 유통업자들이 중간에 끼어 마진을 먹는 식의 다중형 유통구조가 지배했다. 현지에서 대당 2만~3만원이면 살 수 있는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우리나라에서는 20만~30만원에 팔리던 시절이었다. 양판점 같은 새로운 유통형태는 제품과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채널을 뜻한다. 싸게 살 수 있는 소싱 능력이 유통 비즈니스의 성패를 좌우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 점을 보고 무역업을 시작했다. 95년 무역업을 시작하면서 그는 새로운 취미에 빠졌다. 슈퍼, 마트 등 다양한 형태의 유통점을 돌아다니면서 ‘가격 맞추기’ 게임을 한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제품을 멀리서 보고 가격을 적은 뒤 직접 확인해 보는 일이다. 제품의 원가 구조에 통달하는 것이 새로 시작한 무역업의 게임 규칙이었고, 가격 맞추기 게임은 그 훈련이었다. 그는 그렇게 3~4년 동안 무역업으로 그럭저럭 재미를 봤다. 취급 품목은 가구에서 오디오까지 다양했다. 기존 제품보다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아이템이면 뭐든지 했다.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가 터졌다. 거래처였던 뉴코아, 나산 등이 줄줄이 쓰러졌다. 어음으로 받은 물품대금이 부도처리되고 창고까지 불타면서 그는 ‘쫄딱’ 망했다. 당시 총 부도액은 15억원. 그동안 벌어둔 돈으로 절반을 해결했지만, 나머지는 속수무책이었다. “공포와 실의에 빠져 사업할 생각을 싹 지우는 게 정상일 것 같은데, 이상하게 담담하더군요.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1998년 7월. 서른일곱의 우 사장은 주변의 도움을 얻어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학교 후배 등 5명의 엔지니어들이 2억원을 마련해 동업을 시작했어요. 엔지니어들이다 보니 지능형 인형 개발에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처음엔 대기업에 팔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시작된 게 엠피오(당시 회사명은 디지털웨이)였다. 지능형 인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MP3를 접하게 된 우 사장은 MP3가 워크맨을 대체할 것으로 확신했다. 직관적 확신이 얼마나 컸던지, 우 사장은 대기업에 판다는 계획을 접고 MP3를 직접 만들어 파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디지털 기술은 축적되는 게 아닙니다. 오래 했다고 더 잘하는 게 아니라서 대기업의 메리트가 적습니다. 디지털 업종을 창업으로 선택한 이유도 그래서였죠. 디지털 기술력이란 시장에서 어느 정도 평준화돼 있습니다. 그래서 디지털은 기술이 아니라 패션처럼 트렌드 산업에 가깝습니다. ” 디자인을 핵심 경쟁력으로 판단한 그는 자체 디자인 연구소를 두고 제품 기획단계에서부터 디자인팀의 의견에 힘을 실어줬다. 덕분에 엠피오는 국내 중소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유럽 최대 디자인 상인 iF디자인 어워드를 4번, 북미 최대 디자인상인 CES 어워드를 3번 받았다. 우 사장의 ‘직관’은 지금도 시장에서 시험받는 중이다. 그는 ‘국내 시장’보다 난이도가 높은 ‘해외시장 개척’에 사활을 걸었다. 더 어려운 시장 ‘국제무대’에서 실력을 쌓으면 국내시장은 비교적 쉽게 파고들 수 있지만 국내시장에만 매달리다가 해외로 나가려면 그때는 몇 배 더 어렵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전체 생산량의 90%를 56개국에 수출하는 엠피오는 미국 8%, 유럽 9%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캐나다 시장에서는 40%로 1위를 달리고 있다. 덕분에 2002년에는 미국의 경제전문지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한 ‘아시아의 스타 25인’에 선정되는 등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경쟁 속에서 세계 무대의 벽은 계속 높아간다. 애플의 공세 등에 밀려 점유율이 떨어지는 현상도 벌어진다. 그러다보니 휴식 없는 싸움에 개인생활은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게 경영자의 숙명이다.창업하려는 샐러리맨이 있다면 일단 말리고 보겠다는 우 사장이지만 자신의 인생을 되돌릴 생각은 없다. 스물여덟, 젊은 혈기를 참았다 해도 결국은 이 길로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숨이 턱에 차게 힘든 순간이 많지만, 그래도 이게 정말 좋아하는 일이거든요.” 코스닥에 등록돼 있는 엠피오의 시가총액은 270억원 전후. 우 사장이 실패를 돌파하면서 쌓은 직관의 힘은 지금 이런 중간 성적표를 내놓고, 업그레이드를 진행하고 있다. ☞ 우 사장의 비즈니스 IQ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