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어부’ 김영경 사장의 새해포부

난해 12월 중순 새벽 3시께 경기도 구리의 수산물도매시장. 대부분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지만 이곳 도매시장만큼은 활기가 넘쳐난다. 밤새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싱싱한 어패류와 해산물을 조금이라도 싼 값에 구입하려는 경매인들이 서로 뒤엉켜 내는 열기 때문이다. 남정네들 틈바구니에서 밝은 미소를 띠고 있는 여성 기업인이 있다. (주)전국수산 김영경 사장(45)이다. 김 사장은 살을 에는 차가운 칼바람에도 불구하고 작업복 차림으로 새벽시장을 지키고 있었다. 남편 출근길에 ‘잘 다녀오라’며 배웅하는 전업 주부일 것만 같은 그녀의 고운 얼굴에는 수산시장에서 보낸 20여년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김 사장은 남성들도 힘들다는 수산물 시장에서 ‘성역(性域)’을 깨고 외형 70억원 규모의 중견 기업을 일군 억척 기업인이다. 3년 전 인터넷에 온라인 쇼핑몰을 개설, 신선 수산물의 온라인 유통에 나서는 등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기도 하다. ‘인터넷 어부’를 자처하는 김 사장의 사업 역정과 새해 설계를 들어보자. 수협 구리공판장에 위치한 김 사장의 사무실은 24시간 불을 밝힌다. 그도 그럴 것이 수산시장은 늦은 오후부터 전국 산지의 수산물들이 집결해 밤 11시 선어 경매를 시작으로 새벽까지 업무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후 6시, 밤 9시, 밤 12시, 새벽 3시에 각각 출근하는 팀이 따로 있다.경매를 통해 산 싱싱한 수산물들은 소매점은 물론 백화점이나 할인마트로 나가기 위해 새벽길을 재촉한다. 호텔이나 학교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업체로도 팔려간다. (주)전국수산은 날이 밝기 전까지 해당 업소까지 배달해 준다. 그러나 해가 떠도 김 사장의 일과는 끝나지 않는다. 뉴 비즈니스를 조기에 안착시키기 위해서다. 그녀는 2003년 초 인터넷 수산물 쇼핑몰인 ‘태강피시(www.tkfish.com)’를 개설했다. 일반 소비자들과 직거래하겠다는 생각에서 출범시킨 태강피시는 신선 어류를 공급하는 국내 첫 업체라고 한다. 이 사업은 김 사장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수협 중매인으로서 도매사업만 해 온 김 사장이 도매시장 수산유통의 어려움과 여성으로서의 한계점을 느끼고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또 역설적이지만 미수금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업황도 새 사업에 도전하게끔 만든 원동력이었다. 당시 미수금은 회사를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심각했다. (주)전국수산도 누적된 미수금이 30억원에 달했었다.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시도한 인터넷 수산물 쇼핑몰은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여성 경영인 특유의 섬세함이 제품의 신선도와 다양한 상품으로 나타나면서 인터넷 쇼핑몰 태강피시는 문을 연 지 3년 만에 하루 평균 방문고객이 300명을 넘어섰다.태강피시는 주부들이 직접 새벽 경매시장에 나가 수산물을 고르는 것과 다름없이 안방에 앉아서 수산물을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일반 슈퍼마켓이나 소매점과 달리 가공하거나 얼리지 않은 싱싱한 생물 수산물을 주문한 지 24시간 내 배달하는 시스템을 갖췄다.김 사장은 “찾아오는 상인들만 상대하는 게 아니라 직접 소비자들에게 다가가 살아있는 최상의 싱싱함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판로 개척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인터넷을 통한 전자상거래 시장이 커지면서 젊은 주부들은 과거와 달리 직접 시장에 나가는 것을 번거로워하고 있다고 김 사장은 덧붙였다. 이 같은 판단에 따라 우선 도매시장의 이점을 살려나가기로 했다. 저렴한 가격과 최고의 품질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좋은 물건을 확보할 수 있는 데다 중간 유통단계를 없애 가능한 일이다. 구리공판장에 위치한 (주)전국수산의 공장에 들어서면 온갖 종류의 생선과 해산물이 즐비하다. 동해안과 남해안에서 잡아 올린 문어와 갑오징어는 물론 생물 제주갈치와 남해안의 고등어, 삼치, 참가자미, 국내산 생물 꽃게, 해삼, 멍게, 바지락 등 무려 150여 종류에 이른다. 그러나 인터넷상에 생선 이름 몇 개 올려놓는다고 장사가 될 리 없다.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바꾸는 게 급선무였다.“수산물의 신선도를 직접 소비자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동영상을 제공했습니다. 상품 배달 후 싱싱하지 않으면 100% 환불도 보장했고요.” 1회 구입비가 3만원이 넘으면 택배비도 따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 이하로 구매할 경우에는 전국 어디든 3000원만 추가로 부담하면 집으로 배달해 줍니다.”여기에 여성 특유의 센스까지 보태졌다. 우선 소비자들이 수산물을 사서 씻고 다듬을 필요가 없도록 30여 종류의 패키지로 구성했다. 생선을 다듬어서 육수와 각종 양념장, 고추냉이까지 첨부해 바로 해물탕이나 찌개로 끓여 먹을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해물탕과 해물찜, 낙지전골, 꽃게탕, 대합탕 등 메뉴도 다양하다. 즉석에서 조리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김 사장은 주부로서의 경험을 최대한 살렸다. 수시로 식재료의 신선도와 국물의 간을 보며 직원들과 함께 일일이 맛을 확인하고 있다. 위생 처리된 수산물은 두 번 이상 얼린 특수얼음과 아이스팩, 드라이 아이스가 첨가된 3중 포장으로 만 하루가 되기 전에 배달된다.‘일본에 살기 때문에 친정 아버지 생신 선물을 고민하다가 인삼조기자반 대자 10마리를 구입했습니다. 워낙 생선을 즐기는 아버지이신지라 예전에 작은 굴비를 시장에서 주문해 보낸 적이 있는데 엄마가 별로 신선하지 않다고 투덜거리시더라고요. 이번에는 상품평도 꼼꼼히 살펴보고 이곳에서 조기를 사서 보냈는데 맛있다는 말씀을 절대 하시지 않는 경상도 사나이가 엄마한테 먹어 보라는 소리도 하지 않고 한 마리를 다 드셨대요. 그리고는 숟가락 놓으시면서 ‘이거 맛있네. 니도 꾸서 무바라’ 하시더랍니다. 다음 추석에도 또 보내달라시네요.”(‘다음 디앤숍’구매자)“아내가 산후조리를 한다고 친정에 있습니다. 곁에 있으면 챙겨주기라도 할 텐데 멀리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뿐이었죠. 그래도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찾던 중에 여기에서 전복을 찾았습니다. 일단 다른 곳보다 싸더라고요. 혹시 품질에 문제가 있지나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상태도 만족스럽고 배송도 양호하더라고요. 좋은 제품 덕에 장모님께 점수 좀 딴 것 같습니다.”(‘인터파크’ 구매자)태강피시 외에도 우리홈쇼핑, 농수산이숍, 인터파크 등에도 수산물을 공급하는 김 사장은 수시로 구매자들의 상품평을 읽는다. 고객들의 요구와 취향을 확인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다. 그리고 수산물을 ‘선물세트화’하기로 마음먹는다.“꼭 젊은 주부들만 타깃 고객층이 아니더라고요. 명절이면 멀리 사는 친인척이나 지인들에게 마땅한 선물거리가 없잖아요. 어디 그 뿐인 줄 아세요. 피서나 주말여행을 떠나 펜션으로 주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해외에서 주문하는 일도 생겨 공항까지 배달하기도 했단다. 이에 힌트를 얻어 김 사장은 각종 메시지를 담은 카드까지 함께 발송하는 서비스를 도입했다. 단순히 배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선물을 제공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발맞춰 수산물에도 새로운 유통방식과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신 시장을 개척하고 있는 셈이다.인터뷰 내내 김 사장의 휴대폰으로는 문자메세지가 쉼 없이 도착했다. 그 때마다 그녀는 ‘XXX에서 주문이 들어왔네’ 하거나 ‘물건이 출하됐다’고 중얼거린다. 인터넷 시스템이 휴대폰으로도 연결돼 거래 상황을 어디서든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도 마찬가지다. 주문한 물건이 언제 출발했다고 구매자들의 휴대폰으로도 문자 서비스가 간다. 재래시장의 거래 관행이 젖어있을 법한 수협중도매인이 정보기술(IT)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최근에는 사이트를 활성화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냈다. 쇼핑몰인 동시에 수산물 요리에 대한 각종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있는 것. 기존에 만들던 수산물 소개 책자나 팸플릿 이외에 인터넷 공간에서 네티즌들에게 다가가려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김 사장은 “대합탕을 맛있게 만드는 방법이나 싱싱한 해산물을 고르는 법 등 여러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한다”며 “고객들끼리 서로 질문에 댓글을 달 수 있도록 함으로써 수산물과 관련된 요리 레시피는 ‘태강피시’가 최고라는 소리를 한 번 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그동안 생물 수산물을 기피해 오던 몇몇 유명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주)전국수산의 상품에 관심을 보이며 입점을 권유하고 있는 것도 그녀로서는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김영경 사장이 수산물 유통업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20여년 전. 결혼 전에는 새침데기 멋쟁이 아가씨로, 결혼 후에는 1남1녀를 둔 평범한 주부로 살아온 그녀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수산물 업계에 발을 디딘 계기는 늘 지쳐 보이는 남편을 돕기 위해서였다고. 당시 청량리에서 수산물 유통업을 하던 남편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싶기도 하고 잔심부름이라도 해줄까 싶어 시장에 나오기 시작한 게 ‘경영자의 길’로 들어선 단초다. 처음에 남편의 반대가 예상외로 컸다. ‘편하게 집에 있지 왜 나와서 생고생을 하느냐’는 반응이었다.겨울엔 맹추위에 고생하고 여름에는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활동하는 수산업 유통업은 주부로 살아온 그녀에게 버거운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2년도 채 되지 않아 남편은 김 사장의 열성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여성 특유의 직관과 섬세함, 주부로서의 노하우를 살려 회사를 챙기는 모습에 아예 회사를 맡기고 자신은 다른 사업체를 차려 독립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사장의 초창기 시절은 녹록지 않았다. 그녀는 “최상품을 선별하는 능력과 고객을 관리하는 노하우를 가르쳐주지 않는 유통 업계의 생리는 영원히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청량리 수산시장에서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이후 구리농수산물 도매시장 개장에 발맞춰 과감히 청량리 상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둥지로 옮긴다. 기존 업장은 함께 고생하던 직원들에게 물려주고 새로운 유통 현장을 개척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김 사장은 1999년과 2000년 구리시와 수협중앙회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을 정도로 회사의 입지를 탄탄하게 만든다.여성 기업인 수가 2003년 말 기준으로 전체 사업자의 37%를 기록하고 있는 시대다. 111만8000여명의 여사장들이 제조업과 IT, 건설업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김 사장은 단순해 보이는 수산물 유통업과 IT의 만남을 통해 ‘블루오션’을 개척하고 있다.“요즘은 웰빙시대, 디지털 시대잖아요. 백화점이나 할인매장, 홈쇼핑에서 냉동된 수산물을 사오는 대신 싱싱한 제철 상품을 먹으면 가장 맛있고 영양도 최고죠. 무모해 보이는 싸움처럼 보일지 몰라도 싸고 맛좋은 수산물을 상품화해 빠르게 소비자들과 만나는 방식은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믿습니다.”하루 24시간을 시장과 공장, 컴퓨터 앞에서 보내고 있는 김 사장은 “인터넷으로 바다를 고스란히 옮겨 오겠다”고 자신감을 내비친다.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는 날이 많아 2~3일에 한 번 꼴로만 서울 광진구 중곡동 집에 간다는 그녀. 직원 수 45명이 2005년 매출 70억원을 기록했으며 올해는 100억원을 목표하고 있다. ‘인터넷 어부’를 자처하는 그녀의 목표가 달성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