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큰 부자는 하늘이 내고 작은 부자는 부지런함에서 얻어진다(大富由命 小富由勤)’는 구절이 있다. 15세기 유럽의 최대 부자는 바로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는 물론 이탈리아 더 나아가서는 유럽 전역을 뒤흔들고 르네상스를 꽃피워 역사의 흐름을 바꿀 만큼 엄청난 부자로서 그야말로 하늘이 낸 부자였다.중세 유럽에서 큰 부자가 되는 길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정치와 결탁해 국가 재정을 담당하며 금융을 장악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그 지역에서는 생산되지 않지만 꼭 필요한 소금과 같은 필수품과 부자들이 즐겨 찾는 기호품, 사치품을 주로 거래하는 무역을 통해서였다. 생활필수품인 소금과 로마의 조각품에서 볼 수 있는 부드럽고 우아한 중국산 비단옷과‘천국의 알갱이’로 비유되던 인도의 후추와‘갈대에서 딴 꿀’인 설탕은 로마의 상류사회에서 무척 좋아하던 상품이었다. 인도가 원산으로 귀중한 양념인 후추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같은 무게의 금과 맞먹는’가치를 지녔으며, 사치와 부의 상징이었던 설탕은 1372년에 1kg의 가격이 수소 2마리 가격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시대에 유럽에서 금융과 무역을 모두 장악한 부자가 바로 메디치 가문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꽃필 수 있었던 것은 메디치 가문에서 충분한 자양분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상인의 도시 피렌체에서 아시아, 아프리카와 교역해 엄청난 부를 쌓고 교황(레오 10세)과 프랑스 왕비를 배출하기도 한 이 가문은 조반니 메디치(Giovanni Medici,1360~1429)에 의해 일어났다. 크리스토퍼 히버트가 쓴 '메디치가 이야기'에 따르면 메디치가(家)는 용맹스러운 기사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이름으로 유추해 보면 의사나 약종상이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사람도 있다.메디치 가문의 조상들 중에는 곤팔로니에레(Gonfaloniere: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행정관)가 된 사람도 몇 있었지만 조반니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크게 두각을 보이지 못했다. 조반니는 모직물업을 하면서 은행업에 손대고 있었다. 교황 요한 23세의 재정 자문을 맡으면서 교황청과 밀착했으나 교황이 독직사건으로 폐위되자 메디치 가문도 어려움을 당한다. 그러다가 오랜 라이벌인 알비치 가문과 피나는 투쟁을 벌인다. 조반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나 신중했다. 히버트는“조반니는 신중하고 사려 깊었으며 평생을 겸손과 중용을 유지했다”고 말하며, 임종 순간에도 두 아들에게 “부자와 강자들은 거스르지 말고, 빈자와 약자에게는 항시 자비로울 것”을 권했다고 한다. 아들 코지모(Cosimo,1389~1464)에 이르러서는 유럽의 16개 도시에 은행을 세우는 한편 교황청의 재정을 장악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이름만 빼고 모든 점에서 피렌체 공화국의 왕이었던 코지모는‘국부’라 불렸으며 그의 손자 로렌초(Lorenzo,1449~1492)는 예술의 감식과 건축평가 전문가로서‘위대한 로렌초’란 칭호를 받으며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됐다.서구의 부자들은 지독히 정치적이며 투쟁적이라는 데서 동양의 부자와는 구별된다. 메디치가만 하더라도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이권 투쟁에서 일찍이 알비치 가문과 경쟁했고 은행을 경영하고 있던 파치 가문과 다시 피나는 싸움을 벌인다. 엎치락뒤치락 끝에 도시를 장악한 메디치는 플라톤 아카데미를 창설하고 수많은 장서를 모았으며,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두오모 대성당의 돔을 완성시키도록 했다. 또 보티첼리에게 수많은 성화를 그리게 하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가 로마로 가기 전까지 메디치의 궁에서 먹여 살리면서 엄청난 도움을 줬다. “50년이 지나기도 전에 우리는 추방되겠지만 내 건물은 남아 있을 거야.”이렇게 말한 로렌초는 그 때 이미‘예술은 길고 부와 권력은 짧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실제로 메디치가가 후원한 수많은 예술가들의 작품들은 르네상스를 이루었고, 오늘날도 이탈리아를 세계적 관광도시로 만들어 수많은 외국인들이 찾아와 돈을 쓰고 가도록 했다.위첼의 책‘경영과 역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코지모 데 메디치가 가업을 맡을 무렵에는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큰 기업체로 성장했다. 메디치가가 손댄 사업은 비단과 모직 옷감을 생산하는 대규모 직물제조 사업, 알루미늄 광산 개발을 비롯해 각종 광업, 밀라노·로마·피사·베네치아·제네바·런던에 있는 사업소와 서부 유럽·중동·북부 아프리카에 산재한 대리점들을 통한 해외 무역업, 인도 서부에서 벌인 거액 대출 및 보험, 벤처 캐피털에 이르는 당시 최대 규모이자 가장 파격적인 금융 서비스업 등이 있다.”메디치가에서 다룬 이러한 상품들은 바로 그 당시의‘블루 오션’으로서 이윤이 많고 독점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메디치은행은 철저히 정치와 결탁했기 때문에 군주들에게 돈을 빌려 주지 않을 수 없어서 결국 16세기 말에 파산했다. 호화의 극치를 누린 메디치 가문은 코지모 1세(CosimoⅠ,1519~1574)부터 기울어져 코지모 3세(1642~1723) 대에 이르러 막을 내린다. 그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는 중세 유럽의 상권이 지중해를 벗어나 대서양으로 흐르고 있었던 큰 흐름을 몰랐던 것이고, 또 하나는 사치와 허영, 엽기적 쾌락과 만용 그리고 자만으로 인해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메디치 가문의 흥망사를 읽으면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변화의 흐름과 어쩌면 이렇게도 정확히 일치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주역 64괘중에서 39번째 괘가‘산수(山水) 건(蹇)’괘다.‘건(蹇)’은 다리를 저는 것. 즉‘어려움’을 말한다. 조반니 이전의 메디치가는 바로 이런 상태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만물은 유전’하며,‘극즉반(極則反)’이요‘궁즉통(窮則通)’으로 극한 상태에 가면 반전하는 것이 자연의 원리요 주역의 원리다. 그러므로 어려움의 상태가 지극하면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해결의 상태인‘뇌수(雷水) 해(解)’괘가 된다. 어려움이 어느 정도 풀린 조반니가 가문을 일으켜 기반을 굳힌 아들 코지모에 이르기까지가 이 상태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러나‘해(解)’는‘느슨함’이라 풀어놓아 느슨해지면 반드시 잃는 바가 있으니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손(損), 산택(山澤)’괘다. 특히 이 손괘는 그 상의 모습이‘산 아래 못’이 있는 형상으로‘아래를 들어 위를 보탠(아래의 못을 파서 위로 산을 높인)’모습이다. 코지모의 손자 ‘위대한 로렌초’로부터 천신마고 끝에 경쟁가문 파치를 물리치고 증손자 레오 10세가 로마 교황이 되기까지 가문의 모든 노력을 기울여 교황을 만든 것이 바로 이런 형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 이치가 계속 손해만 보는 것은 아니다. 손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더해줌이 있으니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이‘풍뢰(風雷) 익(益)’괘다. 우레와 바람이 서로 도와주는 이 상의 모습은‘위를 덜어 아래에 더해주는’형상이다. 주역에서는 아래가 후하면 위가 편안해진다고 본다. 그래서 아래를 더해줌이 익(益)이 되는 것이다. 메디치 출신이 교황에 선출되자 피렌체인들은 열광하고 흥분했다. 사람들은 나흘 동안‘파파 레오네! 팔레! 팔레!’라고 외치며 축하했다고 한다. 그 후 메디치가는 별 탈 없이 한동안 번영을 누렸으며 코지모의 5대 손녀는 프랑스의 앙리 2세의 왕비가 되는 등 영화의 극치를 이룬다. 그러나 세상은 공평하다.‘위를 덜어 아래를 보탬’이 지나치면 교만하게 되고 자만에 빠진다. 그래서 주역의 그 다음으로 나타나는 괘가‘택천(澤天) 쾌( )’로서‘더하고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터진다’는 것이다. 못이 지극히 높은 곳에 처하니 장차 터지지 않을 수 없는 형상이 바로 이런 형국으로 코지모 1세 이후의 메디치 가문은 무절제한 파티와 분에 넘치는 수집과 궁전 건축으로 재산을 낭비하는 한편 시민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해 피렌체 시민이 서서히 등을 돌리게 되었으니 이런 형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주역의 64괘가 인간사에서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메디치 가문의 흥망이 유난히 이와 흡사하게 나타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