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패션모델, 화려하고 성격 강한 미시족 역할에 딱맞는 탤런트, 홈쇼핑에서 패션 브랜드 엘라호야를 런칭한 사업가이자 디자이너, 초등학교 1년생 딸을 둔 주부…. 줄잡아 네가지나 되는 역할을 모두 똑소리나게 소화해 내는 그녀, 변정수와의 웰빙 데이트.가을 어느 토요일 청담동의 한 카페. 창 밖으로 남들보다 두 배는 길어 보이는 긴 팔과 다리를 흔들며 겅중겅중 걸어오는 그녀가 보인다. 시계를 보니 10시50분. 약속시간 10분 전이다. 지금까지 열 번 정도 만났나. 그러고 보니 그녀가 약속시간에 늦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지금도 밤샘 촬영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는데. 하지만 환하게 눈웃음 짓는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다. 오히려 생기가 넘친다. 정말 ‘에너자이저’라는 별명을 가질 만도 하다. 변정수. 그녀를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까. 한국 최고의 패션모델, 화려하고 성격 강한 미시족 역할에 딱 맞는 탤런트, 홈쇼핑에서 패션브랜드 엘라호야(Ellahoya) 제품을 판매하는 사업가이자 디자이너, 초등학교 1년생 딸을 둔 주부…. 굵직한 것만 손꼽아도 직업이 4가지나 된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이 역할들을 동시에 무탈하게 소화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사업은 홈쇼핑 사상 하루 최고 매출액을 올릴 정도로 성공적이고 최근 시작한 KBS 2TV의 시추에이션 코미디(시트콤) ‘사랑도 리필이 되나요(이하 사랑리필)’는 기대 이상의 시청률을 올리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고 있다. 이 와중에 유명 패션잡지에는 매달 그녀가 모델로 선 화보가 빠지지 않고 실린다. 주부로서는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그 깊숙한 속내까지는 알 수 없어도 예쁘게 꾸민 분당 집에서 부러울 정도로 야무지게 잘 살고 있다는 게 지인들의 전언이다.“음…. 요즘 가장 공을 들이는 게 시트콤이에요. 10월 말 방영에 들어간 이후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짬을 낼 수가 없어요. 주말 빼고 주5일 간 꼬박 방영되는 일일극인 데다 제 촬영분이 많아 녹화시간이 길 수밖에요. 홈쇼핑 일은 예전만큼 매달려 있진 못하지만 스태프들이 잘 뒷받침해줘서 큰 걱정은 없어요. 그래도 금요일 회의엔 꼭 참석하고 토요일 방송을 준비하지요. 잡지 일 등 나머지는 주말에 몰아서 처리해요. 가장 걱정되는 게 아이 문제인데 틈이 나는 모든 시간엔 아이와 같이 보내려고 노력해요.” 자리에 앉자마자 시트콤 얘기부터 시작한다. ‘사랑리필’에서 변정수는 대학생 때 만났던 남자에게 푹 빠져 결혼하고 동반 유학까지 갔으나 결국 이혼한 홍진주 역을 맡았다. 극중 직업은 파티 플래너이자 소믈리에. “부정적이고 어두운 이미지의 이혼녀는 아니에요. 자기 일에 열심인 밝은 성격의 여자죠. 당당하고 세련되고 능력 있는 여자라는 점은 ‘결혼하고 싶은 여자’ ‘아내의 반란’ 등 이전 출연작에서 맡았던 역할들과 많이 닮았다. 그러나 홍진주에게는 좀 더 인간냄새가 나고 온기가 느껴진다. 배우 변정수의 연기도 한결 편안해 보인다. 화려한 의상과 튀는 성격의 캐릭터가 다소 거북스럽기까지 했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이번에는 제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럽다. 현실감 없고 철없는 남편과 헤어지면서 눈물을 펑펑 쏟는 장면이 나간 후 변정수의 연기를 칭찬하는 글들이 게시판에 잇따라 오르고 있다고. 탤런트로 자기 자리를 분명히 꿰차고 있는 변정수를 두고 주변사람들은 ‘쟤는 해낼 줄 알았다’는 반응이다. 그녀는 이미 12년 전 모델 데뷔 때부터 자기 일에 철두철미하고 마음 먹은 것을 독하게 해내는 ‘슈퍼 우먼’ 기질을 내보였다는 것. 지난 1993년 도톰한 눈매에 보이시한 매력, 뛰어난 패션 감각과 끼를 지닌 모델계의 신데렐라가 스스로 유부녀라고 밝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됐지만 패션계 최고로 잘 나가는 톱 모델 자리를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고 있다. 국내 패션모델 중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변정수가 처음이다. 그녀는 영락없는 ‘똑순이’다. 1990년대 후반 안정된 모델 생활을 한다싶었을 때 그녀는 돌연 뉴욕으로 날아갔다. 그것도 혈혈단신. 패션의 본고장인 뉴욕에서 여러 가지 핸디캡을 딛고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돌아온 변정수는 방송 진출을 선언했다. 그리고 세상의 우려를 불식하고 연기자로서 자기 자리를 찾아냈다.비즈니스 분야에서도 그녀는 ‘마인드’가 엿보인다. 엘라호야를 시작할 때다. 당시 스타파워가 패션 분야 등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그녀는 기회가 클 것으로 보고, 닻을 올린 것. “제가 만드는 옷의 컨셉트는 노블&큐트(Noble&Cute), 믹스&매치(Mix&Match)죠. 편안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디자인, 이것저것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아주 자유로운 매칭을 통해 스타일리시한 멋을 보여주고 싶었지요.” 그게 통했다. 변정수는 드라마에서의 이미지 때문에 평소 비싼 것만 들고 입는 명품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모습은 다르다. 무조건 명품만을 좇는 ‘브랜드 홀릭’은 반대다. 샤넬 재킷에 청바지를 즐겨 입고 중고 가방을 드는 식의 정형화하지 않은 스타일링을 좋아한다. 이처럼 평소 본인이 즐겨 입는 바로 그 옷, 그 스타일을 엘라호야에 전부 담아냈다. 카디건, 가죽점퍼, 트렌치코트, 밍크숄 등 지금까지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아이템이지만 엘라호야 디자인은 뭔가 다르다.“카디건은 실용적이긴 하지만 너무 단순해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바꿔봤어요. 앞으로도 입고 뒤로도 두를 수 있고 숄처럼 걸칠 수도 있게. 저 말고도 다른 많은 여성들이 그런 옷을 원했나 봐요. 정말 순식간에 팔려나갔죠.” 첫 날 방송에서 6억원이라는 기록적인 매출을 올린 이후 엘라호야는 현대 홈쇼핑을 이끄는 대표 브랜드로 자리잡았고 홈쇼핑의 황금 시간대인 토요일 오전을 꿰차게 됐다. 사업가, 디자이너, 연기자, 여기에 개인생활까지 본인 스스로도 가끔 ‘내가 어떻게 이러고 살지’ 싶을 정도로 정신없이 바쁜 생활을 하는 그녀에게 어떤 에너지가 당신을 그렇게 움직이게 하느냐고 물었다. “제 힘의 원천이요? 뻔한 얘기겠지만 저 역시 가족이죠. 우리 채원이와 남편, 그리고 가족들.” 변정수는 밤샘 촬영을 마치고 새벽에 귀가했을 때도 아침 7시면 눈을 뜬다. 학교에 가는 채원이와 아침밥상을 함께하기 위해서다. 또 저녁에는 아이와 같이 목욕하고 책을 읽는다. 딸과 남편 일에 지극정성이지만 가족 이기주의에 빠진 젊은 엄마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자선단체인 굿 네이버스와 복지기관인 SOS어린이마을의 홍보대사직을 꽤 오랜 기간 성실히 실행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세상에 내가 할 수 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수만 가지인 걸요. 단 일분일초도 헛되게 보내고 싶지 않아요.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이름이 나 있는 사람으로서 세상에 해야 할 일도 있고요. 할 수 있는 거,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싶어요.” 생생한 에너지가 넘치는 발전소와 같은 사람. 세상일에 욕심 많은 그녀가 다음엔 또 어떤 일을 꾸밀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