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유곡 청암정

시절이 겨울로 가고 있다. 11월 중순, 늦가을 비가 밤새 내렸다. 새벽 빗속에 낙엽이 길가에 수북하다. 창문을 열고 무심히 낙엽 진 거리를 본다. 출근길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겨울이 곧 올 것이다. 가을은 늦가을이 제 맛이다. 사물들 각기 겨울채비를 하고 적당히 넉넉한 모습을 보여줄 때, 그때가 쓸쓸하고도 슬프게 아름답다. 11월 들어 단풍이 막바지 빛을 발할 때 나는 저무는 한 해를 정리하며 봉화 유곡으로 한편의 그림 같은 전통문화답사를 떠났다. 봉화는 태백산(1567m) 선달산(1236m) 각화산(1177m) 문수산(1206m) 청량산(870m) 같은 산들로 둘러싸인 첩첩산중으로, 산이 높기로 이름난 경상도에서도 가장 오지라는 평가를 받는다. 요즈음 봉화는 한우와 송이가 유명하지만 한때는 금광으로 이름이 높았다. 중석·납·아연 등 광물이 많아 이런 광산 덕에 산간오지인 데도 비교적 일찍 철길이 놓여 외부와 소통이 원활했다. 이 철길은 광물뿐만 아니라 궁궐 및 사찰·사대부집 한옥을 짓는데 유명한 소나무 ‘춘양목’도 실어 날랐다. 질 좋은 소나무의 대명사인 ‘춘양목’은 바로 이곳 태백산 봉화 춘양에서 생산된 소나무를 일컫는 것이다. ‘억지춘양’이라는 말은 이곳 봉화군 춘양면에 억지로 철길을 놓았다는 데서 생긴 말이니 이곳 지형이 얼마나 험한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산천이 이렇게 깊은 데도 불구하고 봉화는 조선 중기 이후 안동의 사족(士族)이 이주해 와 곳곳에 동족 마을을 이뤄 안동만큼이나 봉화에도 종택이 많다. 그 대표적인 종택이 봉화읍 유곡리에 ‘삼남 사대 길지’의 하나로 꼽히는 권충재 유적이다. 유곡(酉谷)은 봉화읍 서북쪽에 있었는데 문수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남으로 흘러나가고, 마을 동북쪽으로 문수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서남으로 뻗어 내린 백설령이 암탉이 알을 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또 동남으로는 신선이 옥퉁소를 불었다는 옥적봉이 수탉이 활개치는 모습이어서 마을 서쪽에서 바라보면 금계가 알을 품는 형국인 ‘금계포란’(金鷄抱卵)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곳을 경주의 양동, 안동의 내 앞, 풍산의 하회와 함께 ‘삼남의 4대 길지’ 중 하나로 꼽았다. 본래 유곡은 권벌(權,1478~1548) 의 5대조가 안동에서 옮겨와 자리잡은 곳으로 권벌 이후 매우 번창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알려진 안동 권씨 말고 특별히 ‘유곡 권씨’라고 따로 지칭하기도 한다. 이는 안동 하회의 풍산 류씨를 ‘하회 류씨’라 하고, 오천의 광산 김씨를 ‘외내 김씨’, 임하의 의성 김씨를 ‘내앞 김씨’ 하는 식과 같다. 이처럼 종가 마을이 있는 장소와 연결해 호칭하는 방식은 영남 반가 사이에서는 일반적이다. 이 종택과 마을들에서는 자연에 마음을 담고 향촌에 성리학적 질서를 세웠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을 돌이켜보게 된다.조선 중기의 문인 권벌은 성균관 생원 권사빈(權士彬)과 파평 윤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충재(齋). 어려서부터 문장에 밝았는데 27세 때인 연산군 10년에 대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연산군에게 직언을 올렸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내시 김처선의 ‘처’(處)자가 글에 있다는 이유로 급제가 취소됐고 3년 뒤인 1507년 다시 급제해 관직에 발을 들였다. 사간원, 사헌부 등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는데 중종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으며 조광조가 신진 사류의 대표로 왕도정치의 뜻을 펼칠 때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기호 사림파에 연대, 개혁정치에 참여했다. 1519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대거 밀어붙인 기묘사화에 연루돼 파직당하고 귀향, 어머니 묘소가 있던 유곡에 자리잡았다. 13년 뒤인 1533년 복직된 후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68세 때인 1545년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 해에 명종이 즉위하면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임 등을 적극 구언하는 계사를 올렸다가 파직됐다. 이어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 삭주에 유배돼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실로 파란 많은 생애였다. 유곡의 종가와 정자인 청암정(靑巖亭)과 독서당인 충재(齋) 유적은 그가 기묘사화로 파직된 이후 머무르면서 일군 자취들이다.권충재는 1526년 봄 자신의 집 서쪽에 세 칸 독서당인 충재를 짓고, 다시 그 서쪽으로 여덟 칸 정자를 바위 위에 지어 청암정이라 했다. 정자 주변에 수로를 내 물을 돌렸으며 이어서 동문 밖에 누대를 쌓았다. 이때는 그가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낙향해 마음과 몸을 추스르며 학문에 정진할 때이니 그로서는 불우한 마음을 자연과 독서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이 있었으리라. 종가에서 낮은 내·외담을 사이에 두고 문을 내어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작은 세 칸 건물이 바로 서재인 ‘충재’다. 충재는 조선 선비의 단아한 풍모를 보는 듯 단정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건물이다.두 칸을 온돌방으로 두고 한 칸을 마루로 내어 작은 우주를 만들었다. 한국미의 한 전형인 ‘작은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곳에서 면학하다가 머리도 식히고 풍류도 즐기고 시를 읊고 싶으면 자리를 옮겨 정자로 올랐으니 이곳이 바로 청암정이다. 청암정은 커다랗고 넙적한 거북바위 위에 올려지은 丁자 형 건물이다. 주위를 감싸고 있는 연못 척촉천(擲泉)의 돌다리를 지나 정자에 오르면 사방이 툭 터진 풍광이 홀연히 다가와 시원한 기상을 불러오고 호연지기를 느끼게 한다. 그래서 일찍이 정자는 높은 곳에 지었던 것이다. 이곳 청암정 난간에 걸터앉으면 가까이는 충재 건물의 자태가 오롯이 보이고, 멀리로는 유곡의 앞뜰과 충재의 큰아들 청암 권동보(靑巖 權東輔)가 1535년에 지은 석천정사(石泉精舍)가 자리한 남산과 버티재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정자를 지은 것은 거북 모양을 한 거대한 바위 덩어리의 기상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6칸으로 트인 마루 옆에 2칸짜리 마루방을 두고, 마루방 주변으로 퇴를 둘렀다. 원래는 육간대청에 들어 열 개로 띠살문을 달아 반듯한 외형을 갖췄으나 언젠가 보수하면서 거추장스러운 문짝을 들어내 덩그러니 기둥만 보일 뿐이다. 태백산 줄기에 위치한 봉화는 대단히 추워 봄여름이 짧고 겨울이 일찍 오기 때문에 정자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지리적 특성이 있다. 그럼에도 이런 아름다운 정자를 경영했던 것은 다름 아닌 정자의 주인인 권충재의 안목과 풍류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는 추위를 극복하는 방편으로 육간대청 뒤에 2칸의 온돌방을 들이고 봄가을의 서늘한 기운과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이기며 심신의 정기를 북돋웠으니 이는 참으로 탁월한 풍류의 한 본보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라도의 너른 들판 사이로 보이는 기둥만 남은 호젓한 정자와는 사뭇 다른 사대부의 풍류와 멋이 어우러진 한옥 건축 미학의 백미다. 척촉천 주위에는 소나무 향나무 느티나무 단풍 철쭉 국화가 어우러져 자연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다. 이중환은 청암정의 경치를 두고 “정자는 못 복판 큰 돌 위에 있어 섬과 같으며, 사방은 냇물이 고리처럼 둘러 제법 아늑한 경치가 있다”고 했다. 이보다 더 바른 묘사가 있을까. 권벌은 영남의 유학자인 이현보 손중돈 이언적 등과 교유했으며 23년 연하인 퇴계 이황과도 학문적인 공감을 나눴다. 그래서인지 청암정에는 충재의 친필 글씨 말고도 퇴계 이황, 번암 채재공, 미수 허목 등 조선 중·후기 명현들의 글씨로 새긴 현판이 여럿 걸려 있다. 그중 ‘청암수석(靑巖水石)’은 허목의 글씨인데, 옆에는 “미수가 임술년 4월 글씨를 써서 보냈다. 그때 나이 88세로 심부름꾼이 떠나기도 전에 아프기 시작했는데 이달 하순에 세상을 떠나, 오호, 이것이 그의 마지막 절필이다” 하며 글씨의 내력과 허목을 기리는 안타까운 마음을 절절하게 적어 놓았다. 퇴계 이황은 65세에 도산서원에 은거하면서 이곳에 와 충재를 기리는 마음을 다음과 같이 시로 읊었다.<권충재가 유곡에서 청암정을 짓고 심신을 달래며 독서에 잠심(潛心)할 때 퇴계 이황은 주역과 성리학 공부에 몰두, 과거 급제를 꿈꾸던 청년으로 26세였다. 그 후 퇴계는 중앙 정계에 진출해 한때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을사사화를 겪으면서 조정 관직에 미련을 버리고 이듬해 고향 안동(도산)에 내려와 도산서당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마하며 자신의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구현했다. 이는 마치 충재가 기묘사화에 연루돼 파직당하고 14년 간 고향 유곡에 은거하며 학문의 세계를 열어놓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파직이라는 불행이 그에게는 오히려 조용히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던 귀중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순조롭게 승승장구하면서 사는 게 최고의 성공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불행이 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조선 후기 문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의 학문과 예술이 그것이니, 그가 순탄한 삶 속에서 평생을 보냈다면 과연 추사체라는 동서고금을 떠난 불후의 명작을 이루어 냈을까. 학문과 예술의 세계는 참으로 멀고 험하기만 하다.바람이 분다. 도시 전체가 바람에 일렁인다. 고궁 담 보도 위에 노란 은행잎이 수북이 내린다. 곧 겨울이 올 것이다. 눈이 내리고 하늘이 파랗게 얼겠지. 봉화 유곡 청간정에도 함박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고 들판 위로 바람이 불 것이다. 찬 겨울의 그 깊은 느낌. 하늘과 물과 나무와 돌들이 모두 제자리에서 맑게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