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화 (주)주영 사장의 2모작 인생

령화 시대에는 ‘직장 밖’에서 경제수명의 절반 이상을 보내야 한다. 재테크만으로 버티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다. 중년을 넘긴 퇴직자의 재취업도 하늘의 별따기다. 한 번 이상은 크든 작든 ‘내 사업’을 해야 할 처지가 됐다. 하지만 은행이나 대기업의 중년 퇴직자들은 창업 시장에서 ‘밥’으로 통한다. 청춘을 ‘돈벌이 현장’에서 보냈건만, 직장인들의 비즈니스 IQ는 낙제점이라는 얘기다. 퇴직 후 비즈니스 오너로 변신하는데 성공한 창업자들을 통해 ‘인생을 바꾼 비즈니스 마인드’ 학습법을 알아본다. 시장을 새롭게 읽는 눈’은 비즈니스 마인드의 제1장1조다. 소비자의 마음을 직관할 줄 아는 능력은 전통 업종의 오랜 규칙도 바꾼다. 커피 집을 문화공간으로 바꾼 ‘스타벅스’가 그랬고, 저가 화장품 돌풍을 일으킨 ‘미샤’가 그랬다. 남성용 와이셔츠와 여성용 핸드백, 구두 등 잡화를 라이선스 생산 판매하는 ㈜주영의 정용화 사장(58)이 쉰을 넘긴 나이에 퇴직해 2년여 만에 매출 300억원 대의 기업을 키워낸 것도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비즈니스 마인드 첫 장을 일찌감치 체득한 덕분이다. 정 사장은 1974년 삼성그룹 공채 15기로 입사해 신세계 백화점으로 배치받았다. 화신, 동아 백화점이 업계를 주름잡던 대한민국 유통업 초창기, 후발주자였던 신세계는 ‘부딪쳐 깨지면서 배우는’ 3D 직장이었다. 오죽하면 정 사장의 부친이 “좋은 대학(연세대 경영학과)을 나와 기껏 ‘가게 점원’이 됐다”고 했을까. 하지만 그 치열한 ‘가게 점원’ 노릇 덕분에 동년배 퇴직자들이 ‘마누라 눈치 보며 집에서 마늘 까주는’ 나이에 정 사장은 한창 청춘의 경제나이를 누리고 있다.입사 초기, 그는 기획실에서 업계 동향을 파악해 트렌드를 예측한 뒤 보고서를 작성했다. ‘폼’나는 일이었다. 정 사장은 이때 업무성과를 “F학점이었다”고 자평했다. 시장과 동떨어진 업무는 적성에 맞지 않았고 능력발휘도 되지 않았다. 그는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폼나는 일’에 매달리지 않았다. ‘내 적성’ ‘내가 잘하는 일과 못하는 일’을 냉정하게 파악했다. 한 번도 소리 내 ‘시장 전문가가 되겠다’는 식의 말을 꺼낸 적은 없지만, 온몸으로 그것을 느끼고 표현한 셈이다. 기획실에서 ‘여성복 바이어’로 전환 배치받으면서 그는 시장을 배우기 시작한다. 80년대 초반 여성복은 소비자층을 20,30대 식으로 연령별로만 나눴다. 매장을 유심히 관찰한 정 사장은 뭔가 답답했다.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매장 직원들에게 별도의 카드를 나눠줬다. 고객이 옷을 살 때, 눈 대중으로 혹은 자연스럽게 연령을 물어봐서 적도록 했다. 그 결과 상식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 20,30대를 겨냥한 패션복의 주고객은 30,40대였다. 그는 타깃을 숫자상 나이가 아니라, 취향별로 나눠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요즘으로 따지면 일종의 고객관계관리(CRM)를 시작한 것이다. 창업 5년만에 매출 300억원그는 조사 결과에 기초해 분류를 모두 뒤집었다. 고객을 나이가 아니라 취향별, 감성별로 나눴다. 취향별로는 현대적(contemporary)과 보수적(conservative), 감성별로는 영룩(young look)과 어덜트룩(adult look)으로 나눴다. 나이가 많아도 젊은 감각을 추구하는 여성층(영룩)과 나이가 어려도 성숙한 분위기를 원하는 층(어덜트룩)이 다르다는 조사 결과에 기반한 것이다. ‘소비자의 눈’으로 제품 구분을 뒤집자 매출이 3배 이상 뛰었다. 성공한 마케팅은 소비자의 눈으로 바라보지만 실패한 마케팅은 기업의 눈만 갖고 있다. 정 사장은 ‘기업의 눈’을 ‘소비자의 눈’으로 교정하는 방법을 터득한 셈이다. 이런 노하우는 다음 보직인 ‘아동복 바이어’를 거치면서 또 한번 다져진다. “당시 백화점은 고급 시장기반이 형성되지 않았는데도 뜬구름 잡듯, 고급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학파 디자이너, 대학교수 같은 사람들에게 제품 디자인을 맡겼어요. 그런데 실적이 저조하더란 말이죠.” 정 사장은 디자이너들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개인 볼 일 다 보고, 남는 시간에 우아하게 ‘예술’ 하는 디자이너들이 대다수”였다. 한마디로 아쉬운 것도, 헝그리 정신도 없었다. 치열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좋은 물건이 나올 리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뭔가 고급이어야 한다”는 막연한 ‘기업의 눈’으로만 시장을 바라본 게 문제였다. 해결책을 찾던 정 사장은 소비자의 눈으로 시장을 봐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잘 팔리는 물건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누구냐. 거길 찾아가자.” 당시 ‘유통’의 최대 격전장은 남대문시장이었다. 정 사장은 새벽시장을 찾았다. 잘 팔리는 집은 대번 티가 났다. 통행금지가 풀리는 새벽 4시, 문이 열리면 도매상들이 ‘와~’ 몰려들어 순식간에 물건이 동나는 블라우스 집이 눈에 띄었다. 그 틈에서 그도 블라우스를 움켜쥐었다. 가뜩이나 물건이 모자란 판에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달가울 리 없었다. 정 사장은 현금을 주겠다며 매장 주인을 설득해 물건을 확보했다. 그리곤 회사에 대금 가불을 신청했다. 백화점 바이어가 시장통을 돌아다니는 것도 기가 막힌데 현금결제라니…. 담당자는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시장’을 교과서로 삼은 정 사장은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드디어 첫 60장의 블라우스가 신세계 가격표를 달고 매장에 걸렸다. 막상 ‘우겨서’ 여기까지 왔지만 검증되지 않은 첫 시도에 불안했다. 더럭 겁이 났다. 외근을 핑계로 도망치듯 회사를 나왔다. 점심시간쯤 슬그머니 매장에 전화를 걸었다. “대리님, 난리 났어요. 문 연지 몇 시간 만에 벌써 절반이 팔려나갔어요.” 정 사장은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때 확실하게 각인됐죠. 고객들은 냄새와 통찰력, 본능적인 감각으로 좋은 물건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졌다, 시장에서 먹히는 것만 골라내면 팔리게 돼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이를 기점으로 백화점 구매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정 사장은 좋은 물건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쫓아갔다. ‘소비자의 눈’에 맞춰 물건을 만드는 시장 상인들을 발굴해 고급화한 뒤 백화점 매장에 걸었다. 그해 신세계 아동복 매출은 3배 이상 뛰었다. ‘뉴골든’ 아동복도 그 시절 탄생했다. 당시 ‘골든 보이’라는 이름의 시장 제품을 백화점용 ‘뉴골든’ 브랜드로 고급화했다. 아동복뿐 아니었다. 시장 상표 ‘맨투맨’ ‘보라매’가 각각 ‘톰보이’ ‘슈페리어’라는 고급 브랜드로 변신한 것도 그 무렵이다. 신세계 백화점 CEO 꿈 접고 제2인생 도전거듭된 새 바람으로 성가를 올린 정 사장은 의류사업부장, 상품 본부장 등 승진 가도를 달렸고, 최연소 이사 승진의 기록까지 꿰찼다. 신세계 백화점 최고경영자(CEO)가 꿈이었다는 정 사장은 그러나 신세계 인터내셔널 대표이사 부사장을 끝으로 지난 2000년 8월, 28년 백화점 인생의 막을 내렸다. 동기가 먼저 승진하는 인사 상황이 결단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퇴사를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정 사장은 ‘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완전히 바닥에서 창업하는 것보다 나은 대안을 고민하던 그는 회사 측에 ‘입생로랑’ 와이셔츠, ‘피에르가르뎅’ 가방 2개 라이선스 사업을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 만성적자에 골칫덩이였던 이들 브랜드를 가져가겠다는 정 사장의 제안에 회사 측도 선뜻 동의했다. 2000년 9월, 정 사장은 두 개 라이선스 사업의 영업권, 유통망을 넘겨받았다. 매입대금 25억원은 이듬해 말까지 갚는 조건이었다. 당시 정 사장이 동원 가능한 돈은 2억원. 지인으로부터 투자액 2억원, 신세계에서 함께 나온 직원들의 출자금이 총 1억원, 합계 5억원의 자본금으로 (주)주영을 설립했다. (주)주영 만들어 비즈니스 IQ 역량 총동원정 사장은 그동안 쌓아 온 비즈니스 IQ를 총동원해 2개 브랜드에만 매달리면 흑자로 돌려놓을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경영 기반부터 다지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 그는 신세계 시절 터득한 비즈니스 감각을 시스템으로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소비자’의 반응을 즉각 제품에 반영할 수 있도록 미니 POS, 데이터 시스템, 인사관리 원칙부터 차근차근 개발해 갔다. 평소 갈고 닦은 컴퓨터 지식과 인맥을 동원해 비용을 최소화했다. 하지만 당장 영업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시스템 정비부터 나선 정 사장을 두고 주변에서는 ‘대기업 흉내만 낸다’고 손가락질했다. 직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사라져 버리고 싶은 순간’이 많았다. 그러나 직장시절 체득한 시장감각에 대한 확신으로 버텨냈다. 결국 1년 만에 매입대금 전액을 갚고 2년 만에 백화점 셔츠 부문 매출 ‘빅3’에 진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신세계에서 넘겨받았던 2개 브랜드 중 ‘입생로랑’ 와이셔츠는 라이선스 계약 기간이 끝나면서 결별했다. 대신 ‘찰스 주르당’ 브랜드를 새로 영입했다. 새 일을 벌이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 잘 아는 정 사장이지만, 대기업 시절의 ‘통 큰’ 스타일을 자제하고 중소기업형 기초를 다지느라 지난해까지 신규사업을 가능한 한 억제했다. 설립 5년차를 맞은 지난해부터야 새로운 비즈니스를 펼치기 시작해 남자 셔츠, 넥타이 편집매장인 ‘마스쿨린’, 여성 핸드백 편집매장 ‘브레라’ 사업을 추가했다. 정 사장은 “다시 태어나도 오너 기업인이 될 것”이라고 할 만큼 현재의 생활에 만족한다. 모두가 기피했던 백화점에 배치받았던 게 ‘불운을 가장한 행운’이었다면, 갑자기 맞게 된 퇴직은 ‘위기의 얼굴을 한 기회’였다. 그리고 두 가지 시련을 축복으로 바꾼 것은 정 사장의 열정과 창의력이 탄생시킨 ‘비즈니스 감각’이었다.☞ 비즈니스 IQ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