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하는 서원석 성원제강 회장

난 11월8일 종로구 부암동 모 중식당에서는 종로구에 사는 독거노인 1000여명이 모여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생전 처음 일류 중식당에서 식사를 한다는 박동식(81) 옹은 초대가수의 노랫가락에 흥겨운 나머지 어린아이와 같은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종로구에 사는 생활보호대상 노인들 전체가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이날 경로잔치가 유일하다. 참석자들에게는 점심식사와 속옷 양말 등이 무상으로 제공됐다. 이날 행사는 현죽재단 서원석 이사장(78·성원제강회장)이 마련한 경로잔치. 그러나 서 이사장은 정작 행사장 구석에 앉아 노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덩달아 환한 웃음을 지을 따름이다. 서 이사장은 이미 ‘아름다운 부자’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가장 듣기 싫어한다. 자신은 절대로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며 부자도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진리를 실천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그는 언론 매체 등과 인터뷰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자칫 자신이 하는 봉사활동이 ‘과시용’이라는 오해를 받을까 걱정해서다. 서 이사장은 효(孝)의 가치가 사라져가는 사회 현실에 대해 크게 개탄했다. 고유의 미풍양속이 사라지면서부터 반인륜적인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설명이다. 사회 윤리를 바로잡기 위해서도 효의 의미가 퇴색돼선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서 이사장이 사회사업을 시작한 것은 할머니의 ‘내리사랑’에서 영향을 받았다. “4~5세 때쯤으로 기억합니다. 할머니께서 동네 거지들에게 자신의 밥을 주시더군요. 당신께서는 물만 드시면서 배고픔을 견디셨습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진정한 사랑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데 있다는 걸 알게 됐는지 모릅니다.”대를 잇는 봉사정신이 서 이사장 대에 이르러 꽃을 피운 것이다. 그가 사회봉사활동을 시작한 지도 벌써 40년이 다 돼간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 대학을 졸업하고 성원제강을 설립한 뒤 기반을 잡기 시작한 30대 중반부터 그는 사회봉사에 전념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만 해도 먹고 살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굶기를 밥 먹듯 했지요. 다행히 제강사업이 순항한 덕분에 일찍 기반을 잡았습니다. 좀 먹고 살만 하니까 남을 도와주시던 할머니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웠을 때도 남을 위해 헌신하셨는데, 지금 나는 그것에 비하면 얼마나 편한가’ 뭐 생각이 들었죠.”그는 그동안 벌어놓은 돈의 일부를 고향마을에 기부했다. 수백 가마의 쌀을 고향마을에 무상으로 제공하는 한편 소외된 이웃을 위해 생활비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이 사업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서 이사장의 고향인 김제시 진봉면에는 그의 헌신을 기리는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서 이사장은 전형적인 자수성가 형 스타일이다. 한푼도 허튼 데 쓰는 일이 없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어렵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점심은 자장면으로 해결하곤 했다. 한 번 산 구두나 옷은 10년을 넘기기가 일쑤였다. 그렇지만 이웃을 돕는 데는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벌이는 봉사활동은 일일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매월 종로구 노인정을 돌아다니며 경로잔치를 벌이는가 하면 군산과 김제에는 노인정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또 김제 고향마을 노인 500명에게 매달 잔치를 베풀고 맹인들을 위해 개안 수술비 지원 사업을 시작한 지도 벌써 15년째다. 그의 수술비 지원으로 눈을 뜨게 된 맹인들만 해도 680명에 이른다. 부천시 실로암 맹인선교원에는 지난 10년 간 매달 200만원씩 운영비를 지원해 주고 있다. “봉사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겁니다. 남을 위해 헌신하면 그 덕은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자식들을 편하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러한 모습들을 조금이나마 닮기를 바랍니다.”그는 지난 99년 자신의 호를 따 사회복지재단 ‘현죽재단’을 설립하는 등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10여년 전부터 종로, 군산, 김제에 거주하는 150명에게 연간 10억원을 들여 효자 효녀 효부상을 주고 있으며 모교인 군산중·고에는 5억원으로 장학재단을 설립, 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해 주고 있다. 고향 김제에는 ‘우뭇경로당’을 건립하는 한편 운영비도 보조해 주고 있다. 서 이사장의 선행 때문인지 성원제강은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성원제강은 지난 39년 국내 최초로 설립된 삼강제강소로부터 출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난 91년에는 포항에 최신식 제2단지를 준공해 중견 철강업체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제가 효자동에서 산 지 벌써 30년이 넘었습니다. 효자동은 원래 효자들이 많은 동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닙니까. 지역 내 효자들을 찾아내 상을 주는 것은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서혜경 경희대 교수의 부친이기도 한 서 이사장은 봉사활동이 자식 대에서도 계속되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생각에 공감해서인지 큰 애(서 교수)도 바쁜 시간을 틈내 각종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시키지 않았는데 스스로 참여하는 것을 보며 ‘지금까지 내가 해 온 노력이 헛수고는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서 이사장은 또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선릉역 인근에 미술관을 지어 일반인들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게 했다. 현죽빌딩 지하에 들어서 있는 현죽고미술전시관은 그가 틈틈이 수집한 도자기 서화 등 고미술품 10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그가 미술관을 개관한 이유는 ‘소중한 문화재를 혼자 보기 아까워서’다. “임대를 줘 매월 조금씩 수입을 얻는 편이 낫겠죠.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바라보며 잠깐의 여유를 찾는 것도 현대인들에겐 아주 중요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수집한 것이 아닌 만큼 이웃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맛이 꽤 괜찮습니다.”서 이사장은 사회봉사활동으로 표창도 많이 받았다. 지난 98년 보건복지부장관상과 99년 자랑스런 서울시민상을 수상한데 이어 2000년에는 모범노인상을 받았다. 또 지난 9월에는 노인복지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이웃과 나누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재차 설명한 서 이사장은 인터뷰 말미에 “별로 선행을 베푼 일이 없으니 제발 기사화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혹시 나가게 되더라도 조그맣게 처리해달라는 말도 덧붙였다.“세상 사람들은 얻어먹는 것보다 베푸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베푸는 것도 습관이 되면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닙니다. 부자에게는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남에게 조금씩 베풀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