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 맨해튼 7번가 512번지. 리바이(Levy)그룹이란 의류회사의 본부가 있는 곳이다. 리즈클레이본 에스프리 다나부크만 등 세계적 유명 브랜드를 갖고 있는 이 회사의 연간 매출은 2억달러가 넘는다. 적어도 겉옷에 관한한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유대인이 오너인 이 회사에서 구매와 생산관리 담당 부사장으로 일하는 한국인 사이먼 박(한국명 박석인)의 얘기는 다소 충격적이다. “어느 해 연말이었지요. 사장이 한 자선단체에 기부를 하는데 수표에 적힌 금액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0’이 두 개 정도 더 적혀 있는 거예요. 하도 놀라 ‘아니 그렇게 많은 돈을 기부해도 괜찮습니까’라고 물었지요. 그런데 돌아온 말이 더 놀라웠어요. ‘박 부사장, 이렇게 쓰려고 돈을 버는 것 아닙니까’라고 합디다.”국어사전을 보면 자선은 ‘가난하거나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딱하게 여겨 도와주는 일’이라고 나와 있다. 영어로는 ‘채러티(Charity)’라고 하며 역시 ‘남에게 베풀다’는 뜻이다. 하지만 유대인의 언어인 히브리어에는 우리말이나 영어의 ‘자선(Charity)’과 같은 의미를 가진 마땅한 단어가 없다. 가장 비슷한 말로 ‘체다카(Tzedakah)’란 말이 있는데 이는 ‘해야 할 당연한 행위’라는 뜻이다. 유대인에게 ‘자선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인 셈이다.유대인은 어릴 때부터 저금통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 돈이 모이면 자선에 사용하도록 배운다. 물론 자선의 구체적인 방법도 정해놓고 있다. 유대인의 경전인 ‘토라’에는 형제들 중에서 분명 필요한 사람(needy person)이 있다면, 그가 필요한 만큼(enough for his lack) 주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가난한 사람이 아닌 필요한 사람은 세상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통상적 자선은 소득의 5분의 1이나 10분의 1까지로 제한해 놓고 있어,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 채 무조건 많은 돈을 자선하는 것도 금한다. 교회에 헌금하는 것도 비슷한 기준에 따른다.악착같이 돈을 벌어 통 크게 쓰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조지 소로스다. 헝가리 출신 유대인으로 세계 헤지펀드 업계의 대부 격인 그의 영향력은 ‘소로스가 움직이면 국제금융시장 어디에서도 그 진동을 느낄 수 있다’는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지난 96년 1월 일본 도쿄의 한 국제투자 세미나에서 “일본 주가가 높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마디 하자 폐장을 앞둔 닛케이 주가가 10분 간 270포인트 이상 급등했다. 92년 영국 정부를 상대로 파운드화를 놓고 맞대결을 벌여 1주일 만에 10억달러가 넘는 돈을 챙긴 것은 국제 금융계의 전설로 통한다. 100억달러가 넘는 자금을 굴리며 연평균 30%가 넘는 수익을 내는 그에겐 ‘금세기 최고의 펀드매니저’ ‘금융의 연금술사’같은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세기의 투기꾼’이라는 비난이 늘 붙어 다닌다. 하지만 그는 돈만 아는 천박한 투기꾼은 분명 아니다.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지만 지금도 맨해튼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한다. 대신 조국 헝가리와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 많은 자선사업을 벌이고 있다. 부자 나라에서 돈을 벌어 가난한 나라에 쓴다는 생각이다.월스트리트에서 가장 성공한 유대 금융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시티그룹의 샌퍼드 와일 회장. ‘이익을 내지 못하면 생존도 없다’는 경영철학으로 ‘200달러짜리 초호화판 점심식사를 끝내고 들어와 곧바로 2000명을 해고’하는 냉정한 경영 스타일로 유명하다. 경쟁자들을 과감하게 제거하면서 승승장구, ‘막대한 부를 축적한 냉혈 황제’로도 통한다. 그러나 부인과 함께 많은 자선활동을 벌이는 등 유대인 사회에서는 ‘통 큰 자선사업가’로 잘 알려져 있다.문화를 사랑하는 뉴요커들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구겐하임미술관. 맨해튼 센트럴파크 옆에 있는 달팽이 모양의 이 미술관에는 세계 최고의 현대미술 작품들이 걸려 있다. 세계적 문화공간인 ‘구겐하임’은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 성공한 유대인 가문의 이름이다. 무일푼에서 시작해 몇 대에 걸쳐 큰 재산을 모으고 또 이를 문화재산으로 사회에 환원하는 성공한 유대인 가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미국에서 사람 이름이 붙은 주요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대부분 유대인 이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유대인들이 꼭 ‘돈’으로만 자선하는 것은 아니다. 공직활동도 그들에겐 자선대상 중 하나다. 미국 정계에서 골드만삭스와 백악관의 밀월관계는 이를 잘 보여준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백악관 경제수석과 재무장관을 역임했던 로버트 루빈 현 시티그룹 이사회 의장과 부시 행정부의 경제수석인 스테판 프리드만은 한때 골드만삭스의 공동회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 중 하나로 그에게 프리드만을 천거한 조시 볼튼 백악관 비서실 차장도 골드만삭스 런던사무소에서 프리드만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골드만삭스 출신이다. 골드만삭스가 경제장관들의 사관학교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이처럼 골드만삭스에서 많은 공직자들이 배출된 것은 바로 골드만삭스의 내부 전통에 원인이 있다는 게 미국 언론들의 분석이다. 월스트리트의 다른 어떤 회사보다도 ‘팀워크와 합의’를 강조하는 등 직원들이 서로를 긴밀하게 끌어주고, 돈을 많이 벌 경우 ‘공직근무’와 같은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길을 찾으려 한다는 기업문화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월스트리트의 수많은 금융회사 가운데 유독 골드만삭스가 이 같은 독특한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월스트리트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의 대답은 간단하다. 골드만삭스는 유대인 전통이 가장 강한 회사라는 것이다. 서로 열심히 도우며(팀워크) 돈을 벌고, 돈을 많이 벌면 그만큼 자선산업(공직생활)을 많이 하라는 종교지도자 랍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이미 제2차 세계대전 중 골드만삭스의 ‘전설’로 통하는 시드니 와인버그 회장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정책 조언을 하기 시작했고, 골드만삭스 회장을 지낸 존 코사인이 자기 돈 만으로 선거운동을 치르면서 뉴저지주 상원의원으로 진출했다가 최근 뉴저지주지사에 당선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골드만삭스 출신은 아니지만 블룸버그통신 등 정보사업을 통해 큰 돈을 번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이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선거를 개인 돈으로만 치르면서 ‘공직‘을 선택한 것도 유대인이 아니면 선택하기 힘든 길이다.유대교에서 돈은 그것을 가진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신의 소유물로 여긴다. 단지 그 사람을 통해 거쳐 가는 것으로 일시적인 보관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의 뜻대로 좋은 일에 써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돈이 그 사람을 거쳐가게 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