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터 난초는 선비의 기개와 같다고 했고, 수양의 도를 행하고 덕망을 쌓아가는 근본으로 여겼다. 또 중용을 실천하고 정절을 지키는 표본 등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난초가 한두 분 없는 집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왕 난초를 가까이하려면 의미를 알고, 곁에 두는 것이 더욱 좋으리라 생각된다.난은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과 서양,그리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각 지역에 분포돼 있으며 식물 중에서 종류가 가장 많다. 난초가 언제부터 지구상에 자라기 시작했으며, 언제부터 사람들이 기르기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각종 문헌에 따르면 서양에서는 약 200년 전부터 난을 재배했으며 학문적 체계를 갖추고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00여년 전부터다. 동양에서는 BC 484년께부터 난을 기르기 시작했다고 학자들은 보고하고 있다.난에 대한 의미는 동양과 서양에서 상당히 다른 각도로 발전했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에서는 난초를 삶에 대한 교육의 지표로 삼아 왔다. 난 키우는 것 자체를 사람에 대한 품성과 인격 및 덕을 쌓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했다. 서양에서는 인성교육을 위한 지표보다는 경제적인 가치로 원예의 한 부분으로 발전시켜 왔다.이렇게 인성교육을 위한 지표로 삼는 것과 경제적이고 실리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차이는 있겠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난을 기르고 가까이하는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도층 지식층 귀족 등 신분이 높은 이들에게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지금도 난초를 기르고 발전시켜 나가는 사람들은 은연 중에 난초의 격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다. 최근 어떤 나라에서는 국제 난 대회의 개막식 초청 인사로 개최국의 총리 대신 그 나라를 상징하는 왕을 초청했던 사례를 보면,그만큼 귀족이나 지식층의 전유물로 강조하려는 의도로 난의 인기와 품격을 오래도록 유지하면서 경제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야생에서 자라는 난을 과학적으로 대량 번식해 나가는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원예산업 육성을 위한 방안의 하나로 이뤄진 셈이다.우리나라 옛 선비들(애란인)은 지란지교(芝蘭之交)라 하여 서로 난을 교환하거나 무상으로 분양했을지언정 금전적으로 거래하는 행위는 생각지도 않았고 금기시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부유층이 늘어나고 여가시간이 많아짐에 따라 난을 취미로 기르는 사람이 많이 증가했다. 이를 겨냥한 난 관련 산업도 급속하게 발전,난 시장이 활성화되고 자연스럽게 난을 상업적으로 거래하는 일이 보편화됐다. 또 우리나라 산에서 자생하는 한국 춘란의 우수성이 세계적으로 입증돼 많은 품종의 난이 산에서 채취,재배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일부 난초들은 그 희소성과 우수성으로 인해 고가에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다.금년 봄 세계 난산업 박람회가 전라북도 전주에서 열렸다. 이때 출품됐던 한국 춘란 한 분이 수십억원을 호가한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이는 필자가 볼 때는 다소 의아스러운 면이 있으나 실제로 몇 억원대의 난이 거래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이제는 우수한 품종의 한국 춘란을 원예산업으로 육성함으로써 많은 이가 보고 즐길 수 있게 됐고, 더불어 세계 원예산업 속에서 한국 춘란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일로 보여 매우 고무적이고 긍정적인 현상이라 여겨진다.한국 춘란에 대한 이야기는 후에 하기로 하고 다시 난에 대한 의미를 좀 더 설명하자면,동양에서는 난초를 정신적 인성교육의 지표로 삼아 아무렇게나 근접할 수 없는 식물로 취급해 왔는데 그렇다면 특히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난초로부터 정신적 표본을 어떻게 삼아왔는가?문헌에 따르면 춘추전국시대 BC 484년 애공 11년에 공자께서 ‘위’나라에서 ‘은곡’이라는 계곡을 지나면서 제자들과 잠시 산자락에 앉아 쉬고 있을 때 난에 대한 득도를 했다고 한다. 이때 공자는 가까이서 풍겨오는 맑은 향기를 쫓아갔다가 나무 밑에 조용히 자라고 있는 한 포기의 난초를 발견한다. 공자는 잠시 후 제자들이 쉬고 있는 장소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빨리 자기의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갈 것을 재촉하고 그 자리에서 시 한 수를 지어 남기고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난초로부터 깨달음을 얻은 것은 세상에서 이 작은 풀에 지나지 않는 난초가 아무에게도 자기의 향기가 좋다고 자랑하지 않는 데도 여기저기서 그 맑은 향기에 이끌려 찾는 이가 많다는 것이었다. 당시 공자는 자신을 능가할 학인이 없다고 자부해 각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자기를 중용하면 나라가 부강할 것이고 ‘무치(武治)’에 의한 다스림보다는 ‘문치(文治)’에 의한 다스림이 이뤄져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고 공자를 중용하는 제후들이 없음에 그날도 다른 제후를 찾아가기 위해 길을 가다가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공자는 난초를 보고 “진정으로 학문에 전념하다 보면 그 학문의 깊이에 따라 인향(人香)이 날 것이고 그 인향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올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그렇다면 여기저기 떠돌며 허송세월만 할 것이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학문에 열중하리라고 다짐하고는 시 한 수를 남겼다고 하니 그것이 동양 최초의 난에 대한 얘기라고 본다.“習習谷風 光陰以雨 之子干歸 遠送干野何彼蒼天 不得其所 逍遙九州 無所定處世人闇蔽 不知賢子 年紀浙邁 一身將老살랑살랑 골짜기에 부는 바람 날씨가 비가 왔다 흐렸다 하네그 님 돌아가시는 길 멀리 밖에까지 전송하네어찌하여 저 푸른 하늘이 있는데 내가 머무를 자리를 얻지 못하는가온 세상 정처없이 돌아다니는데세상 사람들은 몽매하여 현자를 몰라주는 구나이제 나이만 먹어 이 한 몸 늙어만 가네.그 후 고향으로 내려와 학문에 정진하는 공자를 따라 제자들 사이에는 그렇게 위대하신 스승께서 난초에 의해 깨달음을 얻으셨으니 그들에게는 난초라는 식물이 스승과 마찬가지로 보여졌으리라. 제자들이 그 난초에 대한 하나하나를 세밀히 분류해 좋은 점만 골라, 아니 좋게만 묘사해 난초를 극찬했고 난초의 한 부분에다 의미를 부여해 그에 맞게 실천하려 했던 것이 지금까지 난초를 귀하게 여기는 동기가 됐다고 한다. 공자께서는 그때의 나이가 벌써 예순이 지났을 때였으며 실제 공자의 학문이 깊이를 더하고 세계 성인이라고까지 칭송받게 된 시기도 그 이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