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린느

통적인 우아함에 기초한 고급스러운 소재가 만들어내는 모던하고 편안한 디자인을 고수하는 세린느의 철학은 고집스럽다. 하지만 멋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기 보다는 편안함을 위해 오히려 디자인적으로 과감한 요소를 가감한다는 점에서 세린느는 유연하다.명품이라는 단어의 묵직한 어감은 그 안에 품은 이름(名)이라는 글자 때문이다. 오랫동안 어떤 증표처럼 쓰이던 해묵은 이름은, 그것이 단지 비싸고 갖기 힘들다는 이유로 동경의 대상이 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격표에 살벌하게 도열한 0의 행진은 그 변치 않는 이름값으로 지불되는 것이었다. 한 때 쇠발굽 모양의 문장이나 등을 마주 댄 C로고가 부와 자부심의 상징인 시절도 있었다. 로고는 크면 클수록, 한 눈에 띄는 곳에 있을수록 좋았다. 그러나 이제는 희소성이 곧 가치인 시대, 즉 ‘스페셜 오더 메이드’의 시대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 가능하면 아무도 가질 수 없는 단 하나의 제품을 손에 넣기 위해 VVIP 고객들은 은밀한 트렁크 쇼에 참석하고, 매장으로 가는 대신 해외 럭셔리 브랜드의 주문제작 카탈로그를 뒤적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세린느’의 가치에 대해 논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60년에 걸친 그 역사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사는 것은 한 켤레의 구두이거나 한 장의 블라우스지만 그 안에 깃든 것은 비범한 이름값과 수십 년의 세월에도 바래지 않는 어떤 고고함이므로.2005·2006 F/W 파리컬렉션에서 세린느는 마이클 코어스가 떠난 자리가 더 이상 ‘빈 자리’가 아님을 전 세계의 프레스들과 패션 바이어들에게 보여주었다. 도시적인 기품이 있었던 마이클 코어스 스타일을 부정이라도 하듯, 지난 시즌 신임 아트디렉터 로베르토 메니케티는 대단히 도발적이고 에스닉한 세린느 스타일을 구현했다. 용감한 시도였지만 혈기방장한 사춘기 소년처럼 어딘가 불안해 보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우려 섞인 시선을 비웃어주기라도 하듯, 이번 시즌 메니케티의 세린느 컬렉션은 그 안정된 현실 감각으로 몽상적인 파리를 무색케 했다.“지난 시즌은 필연적으로, 마이클 코어스 이후의 세린느가 어떤 변화기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어요. 그래서 모험에 가까운 과감한 시도를 서슴지 않았고, 세린느보다는 나, 로베르토 메니케티의 스타일을 담았지요. 그러나 두 번째 시즌부터는 세린느가 표방하는 것을 좀더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그 결과는 당신이 목격한 것과 같아요.” 이번 시즌 세린느의 쇼는 그것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을 옷에 대한 탐욕으로 게걸스럽게 만들었다. 팬츠와 진주 장식의 검정 터틀넥 톱, 크레이프 새틴 소재의 롱 드레스의 행진. ‘멋있으면서도 쉽게 팔릴 수 있는 옷을 만들겠다’는 세린느의 의지가 피부로 느껴졌다. 아, 저 옷이 갖고 싶다! 모든 것의 시작은 1945년, 세린느 비피아나가 남편 리처드와 함께 아이들을 위한 고가의 구두를 제작하는 부티크를 오픈한 일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파리 말트 가 52번지의 ‘어린이를 위한 구두점 세린느’. 세린느 비피아나는 코코 샤넬이나 미우치아 프라다가 그랬듯이, 패셔너블할 뿐만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대단히 역동적으로 조응하는 디자이너였다. 그녀의 숍이 스타일과 편안함을 겸비한 아주 특별한 구두를 만든다는 사실이 입소문을 타면서 1959년에 첫 번째 여성 슈즈 라인인 ‘바렛뜨 로퍼’가 론칭됐고, 말 재갈 장식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이 로퍼는 곧 세린느를 일약 스타 브랜드의 지위에 올린 ‘잉카 로퍼’(1963년)로 이어졌다. 세린느가 고집하는 고귀한 소재가 그 가치를 아는 우아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핸드백과 가죽 제품도 출시되었다. 그러나 영리한 세린느의 행보는 이에 멈추지 않고, 액세사리 라인이 구현했던 차별화된 품격을 발판 삼아 대대적인 의류 사업으로 이어졌다. 1964년에는 첫 향수인 ‘방 푸’를, 1966년에는 많은 인기를 끌었던 ‘리블로스 로퍼’를 출시하며 패션 역사에 방점을 찍었다.1960년대에 이미 세린느는 일본시장에 최초로 진출한 브랜드로 명성을 쌓았다. 1970년대에는 한국 및 미국시장에 진출하면서 활동반경을 좀더 확장했고, 1980년이 되기 전에 몬테칼로, 제네바, 홍콩, 로마, 로잔, 토론토 및 비버리 힐즈에 7개의 새 부티크를 열었다. 이 무렵 출시된 세린느의 체인 목걸이에는 재미있는 ‘탄생설화’가 있다. 어느날 개선문이 있는 파리 에뜨왈 광장의 쇠사슬을 본 마담 비피아나는 거기에 찍힌 모티브가 장차 셀린느의 상징이 될 것임을 직감한다. 그러나 그 모티브를 쓰려면 프랑스 대통령의 허락이 필요했다. 결과는? 대통령은 그녀의 요청을 흔쾌히 허락했고, 그로 인해 세린느의 베스트셀러 체인 목걸이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일화는 세린느라는 브랜드가 자국 프랑스에서 어느 정도의 의미와 지위를 가졌는지를 시사하는 것이다. 이후 제품 라인을 더욱 다양화시킨 세린느는 1977년, 시크한 라이터를 출시하고 그 혁신성을 인정받아 인터내셔널 크리에이션&엘레강스 골든 어워드를 수상하기에 이른다.1980년대는 세린느라는 브랜드가 그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하나의 스타일을 확립한 시기다. 1980년, 금란의 금빛 소재가 주를 이루고 핑크와 바이올렛 컬러가 세련된 디테일로 가미되었던 세린느의 첫번째 칵테일 드레스와 이브닝 드레스 컬렉션이 선을 보이더니, 이듬해에는 블라종 캔버스가 출시되면서 브랜드 고유의 아이덴티티는 명함처럼 좀더 또렷해졌다.그 후 세기가 바뀌었으나, 세린느라는 이름은 가장 트랜디한 머스트해브 패션 아이템이자, 시공을 초월한 프렌치 시크를 상징하게 됐다. 2002년, 전세계의 젯셋족과 VVIP들의 팔에 자랑스레 매달려 달랑거렸던 부기백이 출시되었고, 2003년에는 도시적인 작은 사이즈의 풀보백과 코스모폴리탄적 분위기가 농후한 마카담 컬렉션이 등장했다. 세린느의 발전에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90년대에 이르러, 거대기업 LVMH 그룹에 합류하고 새 향수 ‘매직’으로 향수시장을 석권하면서부터다. 90년대 말에는 디자이너 마이클 코어스가 세린느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의 디렉터 자리에 앉으면서 니트웨어와 가죽소재에 있어 신세기적인 감각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전세계 95개로 늘어난 매장은 고귀한 소재를 고집하던 초심을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로 화이트와 베이지톤으로 데커레이션 되었다. 그런가 하면 2001년의 유로딧세이 리미티드 컬렉션은 유럽 12개국에서 통용되는 화폐 ‘유로’의 도입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세린느 2002 월드컵 라인’과 중국인 화가 팡팡리가 손으로 직접 페인팅한 부기 아트스쿨 백 역시 세린느가 범세계적 역사에 동참하고 있다는 증거. 파리 어느 길 모퉁이의 작은 구두 가게가 60년 후, 전 세계 럭셔리 패션 브랜드 가운데 가장 창의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브랜드로 진화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CELINE라는 알파벳이 직인처럼 새겨진 그 무언가를 살 때, 우리는 가죽과 패브릭으로 만든 호화로운 물건과, 그 속에 스민 60년간의 세월을 갖게 된다. 그래서 ‘명품’이고, 그 두 글자가 모든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