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내적성찰 통한 영감으로 회화의 경계 넘나들어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변기에 사인한 것을 예술작품이라고 말한 이후 일반인들이 현대 예술에 대해 냉소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됐다. 이렇듯 현대 예술가들은 때때로 ‘예술가’라는 단어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평가 절하하려고 한다. 특히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는 현대 미술계의 이러한 경향을 잘 인식하고, 어느 특정 흐름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 작가다. 그가 극사실주의와 추상주의라는 서로 다른 작품경향을 보인 것은 깊은 내적 성찰을 끊임없이 반복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리히터는 시험하고 도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구상과 추상, 사진과 회화, 모방과 창조라는 구분을 넘나들면서 여러 장르의 작품들을 독창적으로 창조했다. 같은 고객의 제안을 받고 1990년 완성한 두 편의 회화작품은 리히터의 예술가적 기질을 잘 보여준다. 그 때까지 리히터의 유화작품 대부분은 ‘추상회화(Alstrakets Bild)’와 같은 추상작품들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작업했고 때로는 여러 작품의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기도 했다. 이들 작품들은 해체과정을 통해 재창조됐는데 그는 미학적이거나 혹은 사실적인 요소들을 유화물감을 층별로 계속 덧바르는 등의 행위를 통해 작가 본인의 마음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했다. 추상회화를 제작하면서도 리히터는 그림 그리는 행위자체를 냉정하게 분석해 나갔다. 1990년 작인 ‘통행,라이프치히(Passage, Leipzig)’에서도 그의 해체 경향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다. 리히터는 미끈하지만 개성 없는 현대식 건물의 얌전한 스냅숏을 유화로 재구성해 ‘그린다는 행위’를 단순한 ‘공예’로 격하시켰다. 이는 스스로가 자신의 직업을 ‘사진 베끼는 사람(Photo copier)’이라고 격하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예술적 영감’이라는 고정관념 자체의 자의적 성향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동시에 ‘중재자’로서 예술가 역할을 축소하고 ‘경이로운 변형의 힘(wonderful transformative powers)’을 부각하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리히터는 평범한 일상적 풍경과 초상 등을 찍은 사진을 회화로 그려내곤 했다. 그는 곧 단순한 사진을 예술작품으로 변화시키려 했으며 ‘뒤샹적’ 레디메이드(Readymade)의 개념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다. 그의 작품 ‘통행, 라이프치히’에서 보이는 현대적인 도회풍 유토피아 역시 ‘경이로운 변형의 힘’을 통해 구원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리히터는 그의 추상작품과 극사실주의 작품에서 ‘예술적 영감’이라는 고정관념과는 반대된 성격의 그림을 그려냈다. 동시에 예술적 과정 자체를 더 강조했다. 중요성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리히터는 오랜 시간 어떠한 특정 분야의 미술경향에도 매이지 않고 끊임없는 내적 성찰 및 실험을 거듭했으며 이것은 그에게 있어선 작품 활동 동력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삶 자체를 정당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