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 공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요즘, 해외시장에서 성공신화를 쓰고 있는 기업이 있다. 주인공은 한세실업. 갭, 나이키, 아메리칸 이글, 애버크롬비 앤 피치 등 세계적 의류브랜드를 ODM(제조업자개발생산) 방식으로 생산하는 업체다. 이 회사는 본사 조직만 국내에 둘 뿐 모든 제품을 해외에서 생산해 납품한다.회사 복도에 걸린 광고카피에서 한세실업의 저력을 엿볼 수 있다. 2002년 ‘미국인 9명 중 1명은 한세실업의 옷을 입는다’로 시작해 7명(2003년), 6명(2004년), 5명(2005년), 3명(2006년)으로 줄더니 올해부터는 ‘한세실업의 옷은 1초에 5벌씩 미국에서 판매되고 있다’로 바꿨다. 지난해 한세실업이 미국에 수출한 의류만 1억7000만 벌, 이를 365일로 나누면 하루에 46만6000벌을 납품한 셈이며 초당으로 나누면 5벌이라는 계산이 나온다.이처럼 급성장하고 있는 한세실업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한세실업의 창업자이고 현재는 한세예스24홀딩스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김동녕 회장을 만나기 위해 여의도 사무실로 찾아갔다. 사무실 문을 노크하자 트레이닝 복 상의를 입고 있는 김동녕 한세예스24홀딩스 대표이사 회장이 반갑게 맞았다. 여느 기업체의 CEO(최고경영자)와의 첫 대면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김 회장이 걸친 상의를 다시 보니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 마크가 선명한 미국프로축구(MLS) 공식 유니폼이다. 김 회장은 “나이키도 우리 고객이다. 재고가 하나 있어 즐겨입는데 어떠냐”며 빙그레 웃는다.1982년 문을 연 이래 한세실업은 의류 임가공이라는 한 우물만 파왔다. 단순 OEM(주문자생산방식)이 아니라 ODM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다른 임가공 업체와 차이다. 일반적으로 원청과 하청업체 관계에서 디자인, 원단 결정은 원청업체 몫이다. 하청업체는 그저 원청업체들이 골라주는 원단과 짜여진 디자인을 바탕으로 가공만 하면 된다. 하지만 한세실업은 역 주문으로 제품 전반을 책임진다. 고객에게 원단은 물론 디자인 전체를 제안해주고 있기 때문에 여러 부분에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 때문에 경기불황에도 아랑곳 않고 한세실업의 매출은 고공행진을 기록하고 있다. 2008년 매출액은 6639억 원으로 전년도보다 33.5% 성장했다. 통상 의류산업은 경기에 민감하다. 더군다나 주력시장인 미국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를 겪으면서 소비심리가 바닥을 기고 있다. 환경만 놓고 보면 한세실업으로선 걱정거리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김 회장은 “경기침체가 오히려 우리에겐 기회”라고 강조한다.“미국 주요 거래업체들의 판매실적이 올해 마이너스 16%대입니다. 이러다보니 기업들이 하청업체 전략을 ‘딥 앤 내로우’(deep & narrow)로 바꿨습니다. 가령 갭(GAP)만 해도 작년까지 보유한 하청업체만 수백 개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어려워지니 거래량이 많고 품질이 뛰어난 25개 업체만을 선별해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습니다. 물론 우리도 포함돼 있죠.”평소 품질관리에 신경 쓴 덕택에 한세실업은 경기불황에 한 발 비켜서 있다. 오히려 올 1분기 매출은 달러 기준으로도 10% 성장했다. 2분기 역시 이대로라면 10% 성장은 무난하다는 것이 김 회장의 설명이다. 환차익까지 계산하면 성장률은 30%대를 훌쩍 뛰어넘는다. 올해 예상 매출액은 8250억 원. 수익은 원 달러 환율 1250원 기준으로 320억 원이다. 원 달러 환율이 1350억 원을 유지하면 순이익 440억 원 달성도 가능하다.선택과 집중을 시도한 타이밍이 빨랐다는 점도 한세실업과 김 회장의 성공 포인트다. 창업 6년째인 1988년 김 회장은 일찍부터 해외진출을 모색했다. 당시 그가 택한 곳은 남태평양 휴양지 사이판이었다.“당시 국내에선 소규모 사업장별로 노사분쟁이 끊이질 않았고, 인건비도 덩달아 상승했습니다. 채산성이 갈수록 떨어지는 상황은 해외로 눈을 돌리게 만든 직접적인 요인입니다. 첫 생산공장을 사이판으로 선택한 것은 미국령이기 때문에 미국으로 수출하게 되면 관세가 부과되지 않아서였죠. 현지화의 키포인트는 지역 주민들과 어떻게 융합할 수 있느냐죠. 장기적으로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입니다.”철저한 현지화를 위해 언어습득은 필수다. 베트남 1, 2공장에 근무하는 한국 직원 수는 50~60명. 주재근무가 발령 나면 현지 학교에서 2주간 언어교육이 실시된다. 그리고 퇴근 후에도 어김없이 어학강좌가 열린다. 현지 한국직원들의 주된 업무는 공장운영 전반이지만 현지 근로자 경조사에 참석하는 것도 빠져선 안 될 일이다. 이러다보니 김 회장 역시 유창하지는 않지만 5~6개 국 언어 구사가 가능해졌다. 한세실업은 니카라과(1998년), 베트남(2001년), 인도네시아(2005년), 과테말라(2006년), 캄보디아(2007년)에 연이어 현지공장을 세웠다. 2000년에는 사이판의 20개 생산라인에서 1억160만 달러 수출을 달성했다.이러한 성장은 생산부터 판매까지 전과정에 걸친 치밀한 전략의 소산이다. 김 회장은 생산 브랜드를 배정할 때 지정학적 위치부터 현지인들 손재주까지를 철저하게 따져보고 결정한다. 손재주가 좋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공장에서는 품질 관리가 까다로운 리미티드(Limited), 애버크롬비 앤 피치, 갭, 나이키를 생산하고 미국과 가까운 과테말라와 니카라과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무관세 수출이 가능해 시어스(Sears), 콜스(Kohl's) 백화점과 월마트, 타깃(Target) 등 대형 마트에 납품한다.철저한 품질관리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한세실업은 우선 모든 공정이 철저한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대개 OEM업체들은 일반적으로 생산과 검사가 엄격히 분리돼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생산된 제품을 현지업체에서 2차로 검사하는데 일단 한세실업은 1차 검사과정이 엄격해 2차 검사과정에서 불량률이 다른 업체에 비해 굉장히 낮다.두 번째는 직원들의 능동적인 참여다. 김 회장은 모든 공장마다 자발적인 분임조 토의를 강조한다. 과거 1960~1970년대 우리 중소기업에서 볼 수 있었던 기업문화다.“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합니다. 직원들 스스로가 품질 향상을 고민하게 만드는 한편 끊임없는 재교육을 통해 질적 수준을 향상시켜야 합니다.”김 회장의 얘길 듣고 있다 보니 도요타자동차의 품질공정시스템 ‘도요타 웨이’(Toyota Way)가 떠올랐다. 생산자 스스로가 공정의 효율성을 높이도록 유도하는 도요타 웨이는 도요타를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로 이끈 숨은 공로자다.김 회장이 처음부터 사업가의 기질을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197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MBA를 따고 왔을 때만 해도 그는 대학교수와 창업이라는 두 갈래길에서 고민을 거듭했다.“MBA를 딴 사람이 그리 많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몇 군데 대학에서 교수 제의가 들어왔었죠. 저희 집안에 교수가 많아서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습니다.(부친이 국내 임상병리학, 혈액학의 태두인 의당 김기홍 박사이고 4남매 중 김 회장의 형은 김동국 한양대 교수, 동생은 김미혜 이화여대 교수다. 부인은 조영수 경기대 교수, 어윤대 전 고려대 총장은 처가 사촌이며 박영철 고대 석좌교수도 가까운 친척관계다) 하지만 그 때까지 제가 익숙해져 있던 것과는 다른 분야에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당시 수출기업을 창업한다는 것은 지금 벤처기업을 시작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선 자금 조달이 비교적 쉬웠습니다. 수출기업들이 신용장만 가져오면 5%대 저리로 자금을 대출해줬습니다. 일반 대출금리가 두 자리 수였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특혜였죠.”1972년 그는 한세통상(한세실업 전신)을 설립했다. 회사 이름에는 ‘한국과 세계를 잇는다’는 원대한 뜻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창업 7년 만인 1979년 2차 오일 쇼크를 만나 결국 회사가 부도났다. 당시의 실패요인에 대해 그는 “환경도 문제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더 큰 문제였다”고 단호하게 말했다.실패를 맛본 뒤로 김 회장은 인생의 좌우명을 ‘무조건 천천히 간다’로 정했다. 무리한 목표치를 설정하고 직원들을 몰아치기보다는 시스템 개선을 통해 효율성 강화로 회사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도 실패를 맛본 다음에서야 깨달았다. 높은 신용도 덕택에 그는 3년 만에 부도를 이겨내고 한세실업을 설립했다.지난 2003년 김 회장은 온라인서점 예스24를 인수해 화제를 모았다. 유통에 문외한인 김 회장이 회사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지 불확실해 보였다.“예전부터 유통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책도 많이 봤구요. 특히 처조카인 조유식 알라딘 대표의 도움이 컸습니다. 지금은 비록 경쟁사 사장이지만 ‘고모부 같은 바른 경영인이 참여하면 성공한다’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그가 예스24를 선택한 이유는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이라는 점 때문이다. 불황기일수록 1위 기업의 프리미엄은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업종 특성상 시장 규모가 커지면 상위업체들의 비중은 더욱 확대된다.“우리의 비즈니스 모델은 도서, 공연 등을 아우르는 거대 문화 포털입니다. 저는 온라인 도서시장 규모를 3조 원으로 봅니다. 작년 온라인에서 거래된 도서금액이 8000억 원이었는데 여기서 우리가 35%를 차지했습니다. 조만간 50% 달성이 무난하다고 봅니다. 6000억 원 매출달성도 문제없습니다. 여기에 영화공연, e-러닝 시장까지 편입되면 매출 1조 원도 불가능하지 않습니다.”예스24를 인수하자마자 그는 만성적자로 허덕이던 사업부분을 과감하게 정리했다. 파주에 WMS(창고관리시스템), DAS(디지털 분류시스템) 등을 적용한 첨단물류공장도 2만9422㎡(8900평) 규모로 세웠다. 이에 따라 전체 비용의 11%인 물류비가 8%대로 줄어들었다. 증자과정을 거친 예스24는 인수 1년 만에 흑자기조로 돌아섰다. 지난 해 매출은 2996억 원, 영업이익은 103억 원을 기록했다. 매출액 기준으로는 21%, 영업이익은 57% 성장했다.“워낙 우수한 인재들이 모였기 때문에 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다만 큰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부족했을 뿐이죠. 전 경영에 그다지 관여하지 않습니다. 오후에 출근해 3~4시간 정도 근무할 뿐이고. 한달 중 상당기간 해외출장을 떠납니다. 한세실업도 전문경영인체제로 바꿨습니다.”김 회장은 한세실업과 예스24를 한데 묶은 한세예스24홀딩스를 출범시켰다. 예스24 온라인 비즈니스와 한세실업의 다양한 해외 네트워크를 유기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김 회장은 예스24를 앞으로 ‘아마존’과 같은 기업으로 키운다는 구상이다. 한세실업이 이미 진출해 있는 베트남,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를 거점으로 권역을 넓혀나갈 생각이다. 인적 네트워크가 잘 정비돼 있고 무엇보다 해당 지역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시장 선점에 큰 무리가 없다는 생각에서다.의류브랜드 M&A도 꾸준히 타진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한세실업은 생산부터 판매, 유통까지를 모두 갖춘 업체로 탈바꿈한다. 한국판 ‘유니클로’라 할 만하다. 이에 앞서 한세예스24홀딩스는 ‘아이스타일24’를 통해 온라인 의류판매를 진행하고 있다. 여건만 되면 해외 브랜드를 인수하는 계획도 조심스럽게 추진할 계획이다.한세예스24홀딩스 대표이사 회장서울대 상대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졸업이화여대 경영학부 겸임교수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