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의 제왕, 페트뤼스

금의 엘리자베스 여왕 결혼식 때 등장해 갈채를 받은 와인인 페트뤼스는 케네디 가문의 행사에도 쓰이는 등 대서양을 넘나들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1945년 이전까지는 무명의 양조장이었던 페트뤼스는 이제 보르도에서 최고로 빛나는 보석 같은 존재다.로마네 콩티가 부르고뉴를 대표하듯 페트뤼스는 보르도를 대표한다. 프랑스 와인의 양대 산맥 부르고뉴와 보르도는 각기 다른 역사와 전통에 기반한 와인을 상당히 보유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페트뤼스는 로마네 콩티에 필적할 만한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페트뤼스는 보르도 와인이지만 보르도 같지는 않다. 여러 품종을 혼합해 만드는 전통적인 양조 방법을 쓰지 않고 부르고뉴처럼 단일 품종으로 와인을 만든다. 해서 페트뤼스는 여느 보르도 와인과는 다른 면을 지녔다. 페트뤼스는 보르도 양조 특성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보르도를 대표하는 역설적인 와인이다. 사람들은 페트뤼스를 잘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값이 비싸다는 건 안다. 어느 날 저녁 초대를 받았는데 페트뤼스가나왔다면 개봉하기를 꺼리게 된다.어떻게 메를로로만 양조했는데도 그리 와인이 힘찬지 마시는 사람마다 놀란다. 특히 빈티지가 좋은 페트뤼스는 수십 년 이상을 숙성하면서 올곧은 질감 속에 감춰진 단단한 속을 보여주며 애호가들을 흔들어 댄다.영화 ‘한니발’은 렉터 교수가 플루트 주자의 췌장을 페트뤼스와 함께 서빙하는 장면으로 충격을 주기도 했다.페트뤼스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비교적 쉽게 눈에 띄는 흰색 바탕의 건축물도 그렇고,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크게 새긴 이름 역시 그렇다. 강 우편 출신이란 뜻을 지닌 무엑스(Moueix), 그 말을 성으로 쓰는 일가가 현재 페트뤼스를 경영하고 있다. 보르도의 젖줄 지롱드강의 오른쪽에 자리 잡은 마을, 포므롤로 길을 나선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가고싶은 곳은 당연히 페트뤼스일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보르도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원산지 포므롤은 작은 거인처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곳에서 나오는 와인이 보르도에서 가장 비싸기 때문이다.장 피에르 무엑스는 부지런한 세일즈맨이었다. 페트뤼스를 실은 수레를 끌고 마을 이곳저곳, 나아가 이 마을 저 마을, 더 멀리는 보르도 구석구석을 누비며 와인을 팔았다. 그의 성실함과 품질에 대한 완벽성은 훗날 샤토의 지분을 거머쥐게 할 정도였다. 그가 세상을 뜨고는 페트뤼스의 생산과 유통은 두 아들에게 맡겨졌다. 전 세계를 돌면서 페트뤼스의 이름을 알리고 있는 크리스티앙은 유통을 맡고 있다. 최근에는 크리스티앙의 아들 에두아르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국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로마네 콩티에 비해 페트뤼스는 여러 차례 방한했다.페트뤼스는 라틴어의 ‘피터’에 해당하는데, 이는 베드로와 통한다.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수제자로 꼽히는 베드로는 라벨에서 오른손으로 열쇠를 쥐고 있다. 그 열쇠는 천국의 열쇠를 상징한다.페트뤼스의 비밀은 기실 포도밭에 있다. 마을 대부분이 자갈이나 모래 토양인데 반해 페트뤼스는 진흙으로 된 단추 구멍 같은 표토층이 특징이며 그 아래에 자갈 토양이 자리 잡고 있고 다시 그 밑에는 철분이 풍부한 토양층이 형성돼 있다. 총체적으로 배수에 유리한 구조이며 철분 함유량이 높아 토양의 빛깔이 검은 편이라서 자갈과 모래가 표면을 이룬 인근 포도밭과 구별된다.페트뤼스 포도밭은 오래됐다. 1956년 포므롤을 휩쓴 냉해로 상당수의 포도밭이 모두 뽑혀나갔지만 페트뤼스 포도밭에서는 추위를 이겨낸 나무들을 남겨 두었고 오늘날 깊게 뿌리박은 메를로의 맛을 잉태하게 됐다. 포도밭 면적은 10.9헥타르인데, 이는 로마네 콩티의 5배에 해당한다. 부르고뉴 기준으로는 넓을지 몰라도 보르도에서는 아담한 양조장이다. 수십 헥타르를 넘는 양조장이 많기 때문이다.포도밭의 95% 면적에는 메를로를 심고 나머지에는 카베르네 프랑을 심는다. 그러나 카베르네 프랑은 1960년대 이후로 좀처럼 양조에 쓰이질 않는다. 그래서 페트뤼스를 메를로 순종 와인이라고 한다. 포도나무가 기력이 쇠하면 나무 대 나무로 교체하는 방식이 있고, 일정 구역의 힘 빠진 나무 모두를 한꺼번에 바꾸는 방식이 있는데, 페트뤼스에서는 후자를 택하고 있다. 어떤 카베르네 프랑의 수령은 80년이 넘기도 한다.페트뤼스 양조장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완벽주의일 것이다. 면적당 수확량이 적다. 보통 양조장의 절반 정도에도 못 미친다. 크리스티앙이 책임을 맡은 후부터 소출량 통제에 더 힘을 썼다. 튼실한 알을 얻기 위해 미리 송이 크기를 제한하는 방법이다. 여름에 포도가 여물기 전에 송이의 일부를 잘라내고 가을에 익어가는 동안에도 부지런히 포도밭을 오가며 송이 크기를 신경 쓰는 것이다. 빈티지가 좋은 경우라면 좀 다르지만 빈티지가 좋지 않다면 소출 제한은 품질을 확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포도가 골고루 다 잘 익지 못하는 경우를 빈티지가 좋지 않다고 말한다. 빈티지가 별로일 때 생산량은 줄어든다. 잘 익은 것으로만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2002년이 그랬다. 일조량이 충분하지 못해 품질이 좀 빠졌다. 빈티지가 좋으면 5만 병 정도 생산하는데 그해에는 2만 병 정도밖에 병에 담지 못했다. 포도의 품질이 극히 나빴던 1991년에는 아예 페트뤼스를 생산하지 않았다. 포도 품질의 완벽주의의 한 예다.페트뤼스는 단번에 확 사로잡는 입맛이 단연 일품이다. 단단한 타닌의 구조가 어찌 그리 강한지 모르겠다. 아주 남성적이며 힘찬 기상이 느껴진다. 하지만 향기 속에 감춰진 묘한 나무 냄새는 페트뤼스 만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빽빽하게 들어찬 삼림의 향기 같기도 한 식물성 향기는 청초하고 우아한 동양란을 연상하게 만든다. 순결하고 단아한 모습의 향기라고도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향내는 100% 순종만이 잉태할 수 있는 성질이다.글·사진 조정용 비노킴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