셸든 아델슨 라스베이거스샌즈 회장

지노의 제왕’ 셸든 아델슨(75) 라스베이거스샌즈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의 거침없는 글로벌 경영에 제동이 걸렸다. 금융 위기 발발과 급격한 소비 지출 감소로 라스베이거스샌즈도 경영 위기에 내몰렸기 때문. 2007년만 하더라도 360억 달러에 달했던 아델슨 회장의 개인 재산은 2008년 3월 기준으로 260억 달러(포브스지 보도, 세계 12위)로 쪼그라들었다. 이 때문에 라스베이거스샌즈에 개인 재산을 투입한 것 아니냐는 소문도 나돈다. 라스베이거스샌즈는 마카오에 8개 호텔을 추가로 짓는 등의 개발 계획 실행을 일단 중지하고 투자 지출을 18억 달러 줄이기로 했다고 최근 발표했다. 수차례 역경을 극복한 아델슨 회장에게도 지금은 엄혹한 시기인가 보다.아델슨 회장은 항상 ‘현상(Status Quo)’을 깨뜨리고 변화시킬 지 고민하는 경영자다. 그래서 시련은 새로운 도전이다. 그는 “신규 사업을 검토할 때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을지, 어떻게 현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먼저 묻는다”고 말한다. 어떤 분야든 다른 이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해선 성공할 수 없다는 얘기다. 남들과 비슷한 사업으로는 좋은 것(good)과 더 좋은 것(better), 최고(the best)를 구분 짓기 힘들다. “변화한 것, 다른 것이 항상 더 나은 것이며 더 나은 것은 곧 무엇인가 달라야만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예를 들어보자. 그는 1991년 아내 미리엄과 신혼여행을 보낸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새 리조트의 영감을 얻었다. ‘물의 도시’ 베니스를 사막 한가운데 재현하면 어떨까. 마카오에 첫 사업을 진출시킬 때는 이탈리아 탐험가 마르코 폴로를 떠올렸다고 한다. 여든 살을 눈앞에 둔 그의 비즈니스 열정은 700년 전 마르코 폴로처럼 동서양을 넘나들게 한다. 마카오에 투자한 2억4000만 달러는 투자 개시 10개월 만에 회수해 냈다. 베네치안 마카오 리조트를 열고서는 1주일 만에 50만 명을 유치하는 실적을 올렸다.그는 1970년대 여행 비즈니스를 할 때는 항공기 품질 관리를 위해 아예 여객기 5대를 구입하는 결정을 내렸다. 1990년엔 민간인이 처음으로 운영하는 ‘샌즈 엑스포&컨벤션 센터’를 세웠다. 그는 “요즘 경영진은 MBA 학위를 배경으로 재무 분야에만 관심을 갖는다”며 “그보다는 좀 더 창의적인 마케팅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경영계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한다.이처럼 경영자의 크리에이티브(Creative)를 강조하는 아델슨 회장은 미국 보스턴에서 택시 운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우크라이나 이민자여서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한 기억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십대 때부터 돈을 버는 데 골똘했다. 열두 살 때 삼촌에게 빌린 200달러로 신문 가판대 2개를 열고 첫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캔디 가게, 아이스크림 판매, 속기사, 모기지 브로커 등 안 해 본 일이 없다. 좀 더 시간이 지나 투자 자문가, 여행사 사장, 벤처캐피털리스트 등으로 변신하기도 했다.이런 야망 때문에 공부에 큰 관심을 두지는 못했다. 그는 뉴욕시티칼리지에서 기업 회계와 부동산을 전공하다 중퇴했다. 미 육군에 자원했던 그는 제대 후 뉴욕 월가에서 법원 속기사로 일하기도 했다.자신만의 비즈니스에 대한 꿈은 1960년대 들어 열매 맺기 시작했다. 하지만 1980~90년대 PC 혁명의 조류에 본격 합류하기 전까지 부침을 거듭해야 했다. 1960년대 초 아델슨은 월가에서 주식 매매 컨설팅으로 큰돈을 벌었다. 보스턴으로 돌아와 기업 투자를 시작, 75개사를 보유하기도 했다. 또 AITS라는 여행사 주식 투자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지만 1960년대 말 하락장에서 큰 손실을 보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하지만 곧 보스턴에서 아파트 등 부동산 중개업을 통해 재기를 시도했으나 아파트 시장이 침체에 빠져들면서 또 한 번 좌절을 맛봤다.일생일대의 아이디어는 1971년에 찾아왔다. 아델슨은 ‘데이터 커뮤니케이션 유저’라는 컴퓨터 잡지를 발행하는 작은 회사의 경영권을 획득했다.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에서 열린 아파트 전시회에 참석했던 아델슨은 아파트 관련 잡지가 그 전시회를 주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잡지사가 컴퓨터 전시회를 주최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첫 컴퓨터 전시회는 1973년 댈러스에서 열었다. 1975년 그는 잡지사 지분을 팔았지만 전시회는 계속 열었다. 이제 전시회에 올인하기로 하고 보유 중이던 아파트 건물을 팔아 매사추세츠 주 니드엄에서 인터페이스그룹을 창립했다. 이 회사가 바로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박람회로 유명한 컴덱스(COMDEX)쇼를 시작한 곳이다. 그는 1979년 라스베이거스의 MGM그랜드호텔(현 발리호텔)에서 첫 컴덱스쇼를 개최했다.컴덱스쇼는 이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최대 전시회로 발전했다. 마침 IBM과 애플컴퓨터 같은 PC 브랜드들이 세계적 회사로 발전한 것과 궤를 같이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인터페이스그룹의 순이익이 2억5000만 달러에 달했다. 1990년엔 2200개 회사, 22만여 명이 참관했다.인터페이스는 당시 제곱피트(가로, 세로 30cm 면적)당 50달러를 컴덱스 참가 수수료로 받아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 측에는 대관료로 제곱피트당 15센트를 내는 고수익 비즈니스를 창출했다. 이런 성공을 발판으로 미국 내 다른 도시와 유럽, 일본에서도 컴덱스쇼를 열기 시작했다.1980년대 후반 아델슨과 인터페이스 공동 경영자들은 라스베이거스에서 본거지로 활용할 리조트를 찾아 나섰다. 카지노 비즈니스에 본격 뛰어드는 계기가 될 줄 당시엔 생각지 못했다. 그저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 측과 수수료 분쟁으로 대안을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1988년 당시 카지노 디벨로퍼였던 커크 커코리안으로부터 샌즈호텔을 1억2800만 달러에 사들이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아델슨은 리조트 확장에 1억5000만 달러, 인터페이스그룹 전용 전시관 건립에 6000만 달러를 투자하고 쇼핑몰도 짓는 등 샌즈호텔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 1989년 새로운 샌즈호텔의 문을 열었다.1990년대 초반에도 세계 금융 경색이 발생해 아델슨은 사업 확장 계획을 잠시 접어야 했다. 1990년대 중반 경기가 회복되면서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컴덱스쇼 인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소프트뱅크에 8억6000만 달러를 받고 컴덱스쇼 판권을 팔았다. 그리고는 월가 자금을 끌어들여 민간이 운영하는 최초의 컨벤션센터인 샌즈엑스포센터를 개관하기에 이른다. 1996년엔 샌즈호텔을 허물고 이탈리아 풍광의 베네치아호텔을 새로 지어 1999년에 웅장한 자태를 공개하기도 했다.아델슨의 시야는 이미 라스베이거스의 사막을 넘고 있었다. 그는 40년간 독점체제로 운영돼 온 마카오의 카지노 규제가 풀리기 무섭게 도전장을 던져 사업 라이선스를 따냈다. 동시에 마카오에 카지노를 설립한 최초의 미국인 디벨로퍼가 됐다. 그는 총 2억6500만 달러를 투입, 2004년 카지노 문을 열었다. 아델슨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베네치아 마카오를 포함, 8개 카지노를 마카오에 연다는 포부를 밝혔다. 미국인이지만 ‘마카오 개벽’의 산파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그는 싱가포르에서도 카지노 허가를 받은 첫 미국인이 됐다. 마리나 베이 샌즈라는 35억 달러짜리 카지노 리조트 사업을 추진 중이다. 2004년엔 라스베이거스샌즈를 월가에 성공적으로 상장시켰다.아델슨 회장은 비즈니스 외에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데도 거침없다. 보수주의 진영의 최전선을 맡고 있다고 한다. ‘우파의 백기사’란 별명도 있다. 보수주의의 설파를 위해 미디어를 인수하기도 했다. 유대인 출신인 그는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로 발행되는 3대 신문 중 하나를 인수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창간 쪽으로 방향을 돌려 총 1억8000만 달러를 쏟아 부어 ‘이스라엘 헤이옴’이란 일간지를 새로 만들었다. 그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마케팅 그룹인 자유의 시계(Freedom’s Watch)도 운영하고 있다. 그는 미국 공화당의 최대 헌금 기부자이기도 하다.마카오 카지노 사업 허가를 받은 데 대해 그의 이런 정치적 성향과 연관 짓기도 한다.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인권 문제로 세계 각국의 비난을 받던 중국을 적극 옹호하는데 앞장섰다. 마카오 카지노는 그 반대급부라는 얘기다. 실제로 아델슨은 유력한 라이선스 획득 후보는 아니었다. 다크호스이긴 했지만 그의 사업 허가 획득을 일종의 쿠데타나 다름없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당시 스티브 윈, 스탠리 호와 아델슨 등 3명만 허가를 얻었다.아델슨은 흔히 세계에서 최고로 부유한 유대인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 출신 최고 박애주의자로 불리길 원한다. 그의 아내인 미리엄은 마약 중독자 재활과 연구를 위한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아델슨 회장은 부(富)의 세습을 그리 탐탁하지 않게 여긴다. 그는 일흔다섯의 나이에 아홉 살과 열살배기 아들 둘을 두고 있다. 용돈을 현금으로 주지 않고 포인트로 준다고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잘 맺으면 포인트를 주고 바람직하지 않게 행동하면 포인트를 뺀다. 일정 포인트를 넘어야 원하는 선물을 사주는 그다.아델슨은 은퇴를 전혀 생각지 않는 정력적인 경영자다. 그는 “내가 후계 구도를 왜 그려야 하나. 아직 나는 활력이 넘친다. 은퇴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못 박는다. 샌즈와 베네치아호텔을 개발할 당시 그는 커튼 끝자락에 다는 매듭을 직접 고르는 세심함을 보였다. 아직도 그런 마인드로 경영하고 있는데 왜 ‘퇴물’ 취급하느냐며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는 아델슨이다.장규호 한국경제신문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