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나이트 나이키 회장

이키(NIKE)의 공동 창업자이자 이사회 의장인 필립 나이트(70)는 나이키와 비슷한 발음의 성을 가졌다. ‘기사(騎士)’란 뜻의 성은 물론 애칭인 필(phil)도 라틴어로 ‘사랑한다’란 의미여서 이름이 주는 어감이 친숙하다. 고희의 나이지만 금발에 쌍꺼풀눈이 부드러운 인상을 더한다.미국 경제 잡지 포브스가 작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그는 나이키 지분 35%(약 104억 달러)를 보유한 세계 73위 부자에 올랐다. 2004년 최고경영자(CEO)에서 물러나 이사회 의장, 우리 식으로 말하면 회장을 맡고 있다.연로한 때문에 CEO 자리를 물려주긴 했지만 그에겐 아직도 꿈틀대는 열정이 있다. 작년 월스트리트저널은 나이트가 뒤늦게 소설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다고 보도했다. 나이트 회장이 작년 1학기까지 3년간 모교인 스탠퍼드대에서 소설 창작과 관련된 수업을 들었다는 것. 나이트 회장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수업을 청강했지만 곧 캠퍼스에 파다하게 알려져 스탠퍼드대의 유명 인사가 됐다고 한다.나이트는 변호사이자 신문 발행인인 아버지를 뒀다. 유복한 가정 출신이었지만 그는 타고난 운동선수였다. 자신의 고향인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클리블랜드고교 재학 시절부터 중거리 육상선수로 활약하며 학교 신문을 종종 장식했다. 대학은 오리건대 경영학과를 들어갔는데 이 학교는 마침 미국에서 육상으로 유명한 학교였다.대학에 진학해서도 나이트는 육상선수로 활동하며 1마일(약 1.6km)을 4분 10초에 주파하는 최고 기록을 내기도 했다. 1959년 대학을 졸업하고 스탠퍼드대 비즈니스스쿨(GSB)로 진학했다. 훌륭한 비즈니스맨이 되길 원하는 아버지 뜻에 따라 비즈니스스쿨에 들어갔던 것이다.당시 그는 프랭크 쉘런버거 교수의 창업론 강의에 심취해 있었다. 여기서 그는 처음 기업인으로서의 자질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스탠퍼드 매거진 기사에서 “창업론 수업을 들으며 뭔가 시야가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며 “쉘런버거 교수는 기업인의 전형적 모습을 정의했는데 그게 바로 나라는 직감이 들었다”고 말했다.나이트는 비즈니스스쿨 재학 중 아시아 지역 운동화 제조업의 잠재력에 관한 마케팅 논문을 쓰기도 했다. 논문 제목은 ‘일본산 카메라가 독일산 카메라를 압도했듯이 일본산 운동화가 독일산을 능가할 수 있을까?’ 앞으로 운동화 사업을 시작하려는 꿈이 시작되고 있던 때였다.그는 GSB 졸업 2년 뒤인 1964년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그의 육상팀 코치였던 빌 보어만과 단돈 500달러씩을 투자, 나이키 전신인 블루리본스포츠란 회사를 창업했다. 두 사람 모두 미국산 러닝화에 불만이 많았던 관계로 직접 운동화 디자인을 개선해 보자고 의기투합한 것이다. 당시 운동화는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품질이 말도 안 되게 나빴다. 타이어 회사가 운동화를 만들었고 한 켤레에 5달러 남짓 하는 싸구려 제품이었다. 나이트는 “내 자신이 트랙을 뛸 때 그렇게 신발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5마일 정도 달리면 발에 피가 날 정도였다.나이트는 공인회계사로 일하고 1969년까지 포틀랜드주립대에서 강의를 맡으면서도 시간을 내 자신이 개발한 러닝화를 봉고차에 싣고 다니며 판매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기 힘들어 공인회계사로 일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비전을 구체화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그때 인연이 된 것이 일본 신발 제조업체인 오니츠카였다. 이 회사 공장에선 아디다스 운동화인 ‘녹옵스’를 생산하고 있었다. 일본 공장을 둘러본 그는 오니츠카의 품질과 저렴한 생산원가에 감동을 받았다. 결국 미국 내 총판 계약에 사인했다. 오니츠카 운동화를 갖고 고등학교 육상팀부터 공략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면서 그는 오니츠카가 자신들보다 좋은 조건을 내건 미국 내 총판을 찾지 않을까 항상 걱정됐다. 이에 나이트는 자체 브랜드를 개발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나이트가 ‘천재적이고 한편으론 광적인 최고의 코치’라고 치켜세운 동업자 보어만은 이번에도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나이키 신발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와플 모양의 신발 바닥은 보어만이 아내가 쓰던 다리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나이트는 신발 무게를 줄이는 데도 엄청나게 신경 썼다. 자신이 육상선수였기 때문에 신발 무게를 1온스(28g)만 줄여도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나온 브랜드가 바로 나이키다. 이 브랜드를 제안한 사람은 나이트의 친구인 제프 존슨이었다. ‘스우시’로 불리는 로고는 당시 포틀랜드주립대 학생에게 단돈 35달러를 주고 만든 것이다. 나이키사 웹사이트에 따르면 나이트는 나이키 로고가 “딱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점점 끌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나이키의 서브브랜드(하위 브랜드)인 코르테즈 운동화는 드디어 1972년 경기장에 첫선을 보였다. 성공적인 데뷔였다. 이때부터 그리스 신화 속 승리의 여신인 나이키는 본격적인 성장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1979년 나이키는 미국 러닝화 시장의 50%를 점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 최대 스포츠 브랜드로 발돋움했다. 나이키는 1972년 300만 달러 매출에서 1980년엔 2억7000만 달러로 급성장했다. 1986년엔 10억 달러, 1999년엔 99억 달러의 매출을 달성했다.나이트와 마케팅 싸움을 많이 벌인 스포츠 에이전트 데이비드 포크는 “필 나이트야말로 아주 짧은 시간에 미국 비즈니스의 위대한 역사를 만든 20세기 인물”이라고 칭찬한다. 이는 나이트가 미국 대중문화의 시대정신을 잘 이해하고 스포츠와 연결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이키 이사회 이사인 마이클 스펜스 스탠퍼드대 GSB 학장은 “필은 스포츠의 상징적 힘과 매력을 잘 이해하고 있다”며 “이를 스포츠와 잘 연결했다”고 평가했다.제품과 이미지를 끊임없이 혁신하려는 나이트의 열정은 ‘아이팟 스포츠 키트’에서도 볼 수 있다. 나이키가 애플과 손잡고 개발한 아이디어 상품이다. 이 키트가 들어간 운동화를 신고 달리면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음은 물론 신발을 통해 온갖 운동 데이터가 집계, 측정된다.나이키는 미국 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다. 미국 젊은이들이 스포츠 히어로(영웅)에 열광하고 도전적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는 점을 주목해 스포츠 스타를 중심으로 한 마케팅에 돈을 쏟아 부었다.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 등과 함께 ‘바로 지금 시작하라(Just Do It)’란 광고를 내보내면서 브랜드를 각인시켜 나갔다. 이런 미국의 스포츠 문화는 세계 다른 나라 소비자들에게도 어필했다.물론 나이키는 인도네시아 같은 제3세계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기업이란 비판을 받았던 적이 있다. 미국의 유명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마이클 무어가 1997년 쓴 책 ‘이걸 쥐어짜!(Downsize This!)란 책에서 나이트는 ‘악덕 기업주(Corporate Crook)’로 묘사됐다.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임신한 여성과 어린이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당시 무어는 나이키를 비롯해 20대 대기업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더 빅 원(The Big One)?’이란 다큐멘터리 필름을 제작하고 있었다. 20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받아들인 사람은 나이트 한 사람뿐이었다.이 인터뷰에서 나이트는 나이키가 인도네시아 신발 공장을 직접 소유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무어에게 누군가 미국 내에서 해외 공장과 같은 품질·가격으로 투자하고 공장을 차릴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신발 제작 하청을 주겠다고 답했다. 무어로서도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할 답변이었다. 그는 1998년 최저임금제, 공장 노동 모니터링, 투명 경영 등을 포함, 좀 더 엄격한 경영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소비자들에게 약속했다.나이트는 소비자 운동에 대해 ‘부’의 사회 환원, 즉 기부로 화답했다. 그는 모교인 오리건대에 약 2억3000만 달러를 기부했고 상당액의 기부금은 육상 발전을 위해 쓰였다. 2006년엔 역시 모교인 스탠퍼드대 비즈니스스쿨에 1억500만 달러를 쾌척했다. 이 학교 비즈니스스쿨에 들어온 단일 기부금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2007년엔 그와 아내 페니가 오리건 육상기금에 추가로 1억 달러를 내놓기도 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나이트는 2000년 ‘오리건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정식 회원이 됐다.하지만 기부에 따른 특혜를 많이 누리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나이트의 친구이자 전직 보험 영업 직원이던 팻 킬커니를 오리건대의 육상 감독에 임명하도록 로비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킬커니 또한 육상 발전 기금을 많이 낸 사람일 뿐 대학졸업 학력이나 적절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나이트는 다소 신비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란 평이 있다. 괴짜이며 예측하기 어려운 사람이란 얘기도 들린다. 한편으론 부끄럼도 타는 천재로 알려져 있다. 나이트는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리고 말수도 많지 않은 사람이다. 어떤 수식어가 딱 들어맞을지 단정하긴 힘들다.그 자신은 ‘천재적’이란 수식어에 의문부호를 단다고 한다. 단지 “남보다 우월하려면 모범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일상이 무료하다면, 지루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당신의 생활을 뒤집어 보라. 현재 하고 있는 모범적이면서도 따분한 일에 새로움과 활력을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계속 퇴보하게 될지 모른다.” 새겨들을 만한 말이다.장규호 한국경제신문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