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 펀드의 제왕, 블랙스톤의 스티브 슈워츠먼 회장

계적인 경제·경영잡지 포천은 올 초 ‘월가의 새 제왕(New King of Wall Street)’이 탄생했음을 알렸다. 세계 최대 사모 펀드(Private Equity Fund)인 블랙스톤의 스티브 슈워츠먼(60)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 1980년대 정크본드에서 1990년대 닷컴 투자, 2000년대 들어서는 사모 펀드 전성시대가 펼쳐지면서 슈워츠먼 회장이 슈퍼스타로 급부상한 것이다. 한편으론 개인 투자자의 ‘훌륭한 교사’였던 워런 버핏의 시대가 저물고 미국식 금융 자본주의의 스타로 슈워츠먼이 추앙받기 시작한 것이다.블랙스톤은 차입 매수(LBO·Leverage d Buyout) 기법을 활용, 세계 최대 사모 펀드로 성장한 회사. 경영난을 겪는 기업을 인수해 상장 폐지한 다음 가차없이 메스를 들이대 수익성 높은 회사로 탈바꿈시키고 비싼 값에 이를 되파는 LBO를 통해 세계 산업계는 물론 인수·합병(M&A)의 지형을 바꿔 놓았다.CNBC 방송은 이런 그를 ‘미국 최고의 자본가(Premier Capitalsist in America)’라고 불렀다. 월가에서 일군 그의 성공 신화를 들여다보면 미국 자본주의란 과연 어떤 것인지 그려볼 수 있다는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LBO라는 ‘레시피(요리법)’로 ‘주식회사 미국’을 요리해 내는 주방장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슈워츠먼 회장은 수십억 달러짜리 거래의 최전선을 진두지휘하는 인물이다. 작년 11월에는 미국 부동산 회사인 에쿼티 오피스 프라퍼티즈를 380억 달러에 인수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올 들어서만 5000억 달러가 넘는 기업 M&A를 성사시켰다. 지난 6월에는 사모 펀드로는 이례적으로 기업공개(IPO)를 실시, 화제를 불러 모았다. 경영 잡지 포브스의 2006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가 보유한 순자산은 총 35억 달러. 미국 부호 순위 73위의 자산 규모다. 1985년 피터 피터슨과 함께 40만 달러의 창업 자금으로 블랙스톤을 세운 후 불과 21년 만에 35억 달러로 뻥튀기한 것이다.작년 그의 수입은 무려 4억 달러.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은 금액이다. 이 같은 사실은 상장을 위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자산 내역을 보고하면서 알려졌다. 상장 이후에는 단박에 4억5000만 달러를 벌었고 보유 지분이 77억 달러(약 24%, 1대주주)로 눈덩이처럼 불었다. 미국 내 부호 순위도 32위로 치솟았다.1947년생인 슈워츠먼은 미국 필라델피아 교외 어빙턴에서 커튼 가게를 운영하던 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예일대 심리학과에 진학한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기숙사 방을 같이 쓴 룸메이트였다. 두 사람은 또 예일대 엘리트 학생들의 모임인 ‘스컬 앤드 본즈(Skull and Bones)’의 멤버였다고 한다. 2004년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로 부시 대통령과 대결을 펼친 존 케리도 이 모임 출신이다.슈워츠먼은 지난 4월 자신의 집에서 열린 공화당 정치자금 모금회에서 부시와 나란히 참석해 친근함을 과시했다. 혹자는 슈워츠먼이 재무장관 자리를 탐낸다고 하는데 그를 깎아내리려는 말인지 실제 그런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과 헨리 폴슨 현 재무장관이 모두 월가 출신이란 점에서 전혀 생뚱맞은 얘기는 아닌 듯하다.슈워츠먼은 부시 대통령처럼 하버드대 비즈니스 스쿨에 진학해 1972년 MBA 학위를 받았다. 그의 월가 인생은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에서 시작됐다. 31세의 나이에 일약 임원으로 승진, 이 회사 글로벌 M&A팀을 책임졌다. 모든 월가 뱅커들이 꿈꾸듯이 그도 1985년 드디어 독립을 결심했다. 뜻을 같이한 피터 피터슨과 함께 블랙스톤이란 회사를 세웠다.회사 이름은 두 사람의 이름에서 직접 따왔다. 슈워츠먼의 ‘슈워츠(Schwarz)’는 독일어로 ‘검은(black)’을 뜻하고 피터슨의 피터(Peter)는 그리스어로 ‘돌(stone)’을 의미한다. 그래서 블랙스톤(Blackstone)이란 이름이 탄생했다.창업 당시 자본금은 40만 달러. 파트너는 슈워츠먼과 피터슨 딱 2명뿐이었으며 직원도 사무를 보조하는 2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블랙스톤은 사모 주식 투자와 LBO 전략을 구사, M&A 업계의 거물로 성장해갔다. 불과 20여년 만에 연매출 830억 달러에 27억 달러의 순이익을 내는 기업으로 몸집을 불렸다. 현재 파트너는 52명, 직원은 750명에 달한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월가의 새 제왕’이 될 싹을 보였다. 뭘 해도 크게 판을 벌이고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승부 근성이 남달랐다. 열다섯 살 때 커튼 가게를 운영하는 데 만족해하는 아버지에게 “상점을 계속 확장해야 한다”고 독려했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는 170cm라는 단신을 극복하기 위해 고난도의 농구 기술과 전술을 연마했다. 이런 근성은 블랙스톤 설립 당시에도 발휘됐다. 그는 처음부터 10억 달러짜리 펀드를 조성하려 했다. 동업자인 피터슨이 5000만 달러를 제안한 것과는 규모부터가 달랐다. 이렇게 모아진 첫 펀드가 8300만 달러. 출발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큰 싸움을 겨냥한 행보였다.2004년 독일 화학 기업인 셀라니스 인수 건도 그의 승부사 기질을 엿볼 수 있는 사례로 회자된다. 그는 당시 주당 17달러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하자 24달러, 28달러, 32달러까지 인수가를 높여 결국 주당 32.50달러에 셀라니스를 손에 넣었다. 작년 여름에도 그랬다. 블랙스톤은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 인수를 놓고 사모 펀드의 라이벌인 KKR와 격돌했다. KKR가 파격적인 인수가를 제안하자 슈워츠먼은 포기하는 듯했다. 그러나 웬걸. 바로 인수가를 높여 176억 달러에 프리스케일을 인수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예에서 보듯이 슈워츠먼은 먹잇감을 발견하면 일격을 가하고 ‘전멸(kill off)’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공격적 성향을 갖고 있다. 자신도 인정한다. 그는 “소소한 전투를 계속 벌이기보다 전쟁을 원한다”며 “무엇이 경쟁 입찰자를 무력하게 할까를 항상 고민한다”고 말한다.이처럼 M&A라는 전쟁터에서 피 묻은 칼을 휘둘러대는 그이지만 외양은 정반대다. 단신에 회색빛 머리칼, 부드러운 음성의 소유자다. 기 싸움을 벌이는 협상 테이블에서도 항상 나긋나긋하게 말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나도 화날 때가 있는데 그때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한다.슈워츠먼은 또 월요일 아침마다 마라톤 회의를 하기로 유명하다. 포천지 기사에 따르면 그는 보통 오전 8시 반에 사모 펀드 투자를 주제로 회의를 시작한다. 자신의 집에서 비디오폰을 동원해서라도 마라톤 회의에는 예외 없이 참석한다. 그는 명쾌하게 결론부터 이야기한다. “점심 먹을 시간 없으니 빨리 합시다”라고. 진짜 점심시간을 건너뛴다. 오후 2시 반에 헤지 펀드 투자, 이어 4시에는 대출 관련 사항을 빠짐없이 점검한다. 슈워츠먼은 “남보다 뛰어난 것, 그리고 남을 이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일한다”고 말하곤 한다.슈워츠먼은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요즘도 하루하루를 블랙스톤 창업 첫날이라 여기고 마음을 다잡는다”고 소개했다. “고객들의 전화가 울려대기 전이던 그때를 가끔 돌이켜본다. 고수익을 내는 것이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은 아니다. 투자 기술이 뛰어나고 기회가 쉽게 주어진다고 해도 결국 투자의 성패는 신(神)의 손에 달렸다.”그가 사는 곳은 뉴욕 파크애비뉴의 1858㎡ 규모의 호화 아파트. 35개나 되는 방과 사우나, 도서실, 11개의 벽난로와 13개의 욕실 등으로 제왕이 살기에 손색없다. 거의 궁전이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와 미국 추상화가 사이 트웜블리의 미술 작품이 2층 벽을 장식하고 있다. 이곳은 존 록펠러 주니어가 살았던 곳으로 2000년 3000만 달러를 주고 샀다. 집 로비에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손잡고 찍은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슈워츠먼은 이국적인 파티를 여는 것이 취미다. 한 번은 007을 테마로 한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본드 걸’들이 파티장을 미끄러지듯 걷고 있는 광경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지난 2월에는 자신의 60번째 생일잔치를 열었는데 세인들의 눈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전 미 국무장관 콜린 파월과 뉴욕시장 마이클 블룸버그 등 유력 인사들이 그의 환갑을 축하하러 모여들었다. 유명 팝가수 로드 스튜어트가 30분짜리 라이브 공연을 했는데 스튜어트가 챙긴 돈만 100만 달러였다는 후문이다. 총경비는 30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올해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큰 인물 100인’에 포함되기도 한 슈와츠먼은 예일대 경영대의 겸임 교수도 맡아 월가의 경험을 후학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공연장인 케네디센터의 집행이사로도 일하고 있다. 아내 크리스틴 허스트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지식재산권 전문이라고 한다. 크리스틴 슈워츠먼이 아니라 크리스틴 허스트인 것은 그의 첫 남편 성을 그대로 쓰기 때문. 슬하에 세 자녀를 두고 있다.장규호 한국경제신문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