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과 말(言), 이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월할까. 상형 문자가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의 언어 체계가 이뤄졌으니 후자가 더 진보된 것일 게다. 토론할 때도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하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또박또박 표현하는데 언어만 한 것은 없다. 형용사, 부사, 동사를 동원해 일사천리로 속마음을 전달할 때의 쾌감과 개운함은 또 어떠한가. 그런데, 과연 그렇기만 할까. 화가 사석원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이런 철석같은 믿음에 의구심이 생긴다. 꽃을 삼킨 것인지, 그 속에서 피어난 것인지 몸 안 가득히 꽃이 만발한 양의 모습을 그린 ‘꽃을 먹은 양’. 이 작품이 전해주는 느낌을 말로 표현하는 것처럼 구차한 것이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밝고 화려한 색채를 사용한 그의 그림은 ‘사랑스럽다’, ‘귀엽다’, ‘천진난만하다’ 등의 단어가 전달하는 의미 이상의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 색감들은 정신을 집중해 세밀하고 조심스럽게 칠해진 것이 아니다. 마구 덧칠해 두터운 마티에르를 형성한 작품은 자연스럽고, 심지어 어눌해 보이면서 그 자체로 즐거움을 준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팔레트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화면에 물감을 짜서 그 위에서 붓으로 치대며 고유의 색을 남겨두기도 하고 다른 색깔과 섞기도 하면서 색의 향연을 펼치는 것이다.“제 그림 안의 색들은 정제된 상태가 아니라 생(生)으로 화폭에 던져져 서로 부대끼며 다른 색들과 몸을 섞습니다. 붉은 잇몸을 드러내고 허연 이빨을 서늘하게 번득이는 야수들처럼 말이죠. 그런 날것의 모습을 흠모합니다. 팔레트에서 얌전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물감 중에서 성향이 비슷한 놈들끼리 곱게 섞어서 화폭에 정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집히는 대로 물감을 들고 화폭에 뿜어대는 것이죠. 그러면서 원시적 생명의 힘을 느낍니다. 제게 있어 색은 세상에 대한 찬미의 수단입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두텁게, 아주 두텁게 칠을 합니다.”동국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가 서양화까지 섭렵하게 된 까닭도 바로 ‘색’ 때문이었다. 서양화는 배워본 적이 없어서 재료적 특징을 잘 알지 못하기에 일일이 경험을 통해 체득할 수밖에 없었다. 화선지에 얇게 스미는 동양화와 달리 겹겹이 색을 쌓아 올려 그리는 재미를 느끼면서 물감을 두텁게 칠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그의 작품은 색채가 화려한 나이브 아트(Naive art: 순수한 동심에 근거한 상상력과 고의적인 어눌한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회화의 한 경향)로 여겨지지만 그 이면에는 동양적인 기법이 묻어 있다. 조금만 예리한 눈을 가졌다면 작품 속에서 한국화적인 느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매화에 놀란 수탉’은 유화로 그린 것이지만 화들짝 놀라 펄쩍 뛰는 수탉의 모습을 묘사한 화면에는 마치 먹물처럼 튀는 것이 자연스럽게 잘 표현돼 있다. 유화 물감을 기름에 풀어 점도를 낮춘 뒤 일필휘지로 그린 것이다.“사람들은 퓨전이라는 말이 붙은 음식, 의상, 음악 등을 정통에 비해 값싼 취향으로 여기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퓨전을 선보이려면 양쪽을 모두 제대로 알아야 가능한 것이고, 변화된 시대에 요구되는 중요한 덕목이기도 합니다. 한국화의 위기라고 말을 하지만, 그건 바뀌어가는 세상에 빨리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자초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먹으로만 우리 그림의 화법을 표현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양화가 색을 나타내는 데에는 더 효율적이지만 붓질, 서예의 힘 등은 동양화가 훨씬 앞서고 논리적으로 깊죠. 저는 그런 좋은 특징을 알리고 싶어서 동양화 붓을 많이 사용합니다. 골법용필(骨法用筆), 즉 뼈대가 살아 있는 그런 생동감이 있는 선을 긋고자 노력하지요.”그의 작품이 보는 이를 기분 좋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소재 선택과 표현 방식에 있다. 이종격투기 선수가 전투 장소인 링 위에서 해맑게 웃으며 튤립 다발을 들고 있는 작품이라든지, 당나귀가 등 위에 커다란 가마니 대신 장미꽃을 한가득 얹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의 순수한 시선에 절로 미소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종격투기 선수와 당나귀는 우월한 존재가 아니다. 자그마한 당나귀는 말(馬)처럼 섹시하거나 당당하지도 않고, 반듯한 조각상의 이미지보다는 어딘가 우스운 생김새를 지닌 ‘평범 이하’라고도 할 수 있는 대상인 것. 그러나 작가는 그 가는 다리로 자신의 몸집에 몇 배나 되는 짐을 지고 최선을 다해 꿋꿋이 걸어가는 그 모습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면서 성실히 살아가는 마음을 읽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형상화된 당나귀의 모습은 애처롭거나 처량하지 않고 친근감이 느껴진다. 여행 마니아인 그가 쿠바에서 느낀 인상과도 맥이 통한다.“생활 속에서 절대적 밝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밝음과 어둠, 이 두 가지가 공존하게 마련이죠. 삶을 보는 시각의 차이는 슬픔을 목표로 둘 것이냐, 행복을 목표로 둘 것이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쿠바는 아주 가난한 나라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자급자족하면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그렇다고 악에 받쳐서 사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 어느 민족보다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에 아주 감동했습니다. 싸구려 옷이지만 기막히게 색깔을 맞춰 입고 서 있든, 길을 걸어가든, 물건을 팔고 있든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굴곡 있는 몸을 움직이며 리듬을 타고 있지요.”밤새 작업을 하고 샛별을 보며 작업실 바로 앞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와인 한 잔 마시고 남들이 일어날 즈음 잠드는 것을 즐기는 화가 사석원.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조금씩 조금씩 구축하는 그림과는 거리가 멀다. 일단 작업을 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 그림을 그리지만 한 번 ‘놀기’ 시작하면 석 달 넘게 붓 한 번 손에 쥐지 않기도 한다. 스스로 개점휴업하는 시간에 그는 여행을 떠난다. 가족들과 함께 가기도 하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비교적 학업에서 자유로운 초등학생 막내아들만 데려 가기도 하고, 상황이 더 여의치 않으면 혼자서 가기도 한다. 지난 봄 ‘만화방창(萬化方暢)’이라는 주제의 개인전을 한 이후 여행 일정을 보면 빡빡하기 그지없다. 8월에는 케냐,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일대를 다녀왔고 10월에는 파리에 있을 참이고 내년 2월에는 다시 아프리카에 갈 예정이란다. 사실 붓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여행은 그의 미술 세계의 연장이다. ‘만화방창’에 등장하는 금강산 그림도 2005년 금강산을 다녀온 이후 기존의 동물 그림을 접어두고 매진하고 있는 소재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로서 산수화는 언제고 도전해 보고 싶은 대상이었다. “금강산은 워낙 대가들이 그렸던 것이라 내가 감히 그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 보고 난 뒤 깨달았어요. ‘이건 도저히 그리지 않을 수 없구나’라고 말이죠”라고 말하는 사석원. 금강산에 첫발을 디디면서 작업의 물꼬를 트게 됐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가서 시각적으로 먼저 체득한 후 그만의 스타일로 산을 풀어내고 있다.“공항에서 휴대폰을 ‘틱’ 꺼서 배낭에 넣을 때 기분이 좋아요. 잠시 동안 단절이 되잖아요. 모국어, 음식, 가족 관계, 나의 직업도 잊고…. 잠시 그러는 게 참 좋더라고요.” 정열적인 그림과 달리 내내 차분하고 느릿한 어조와 미사여구 없는 표현으로 말을 이어가던 그의 여행 예찬론이다.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