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화 강화 천토흑삼 대표
인과 인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다. 같은 품종이라도 토양과 기후에 따라 결과물은 하늘과 땅 차이다. 프랑스가 와인으로 유명한 것도 원료가 되는 포도 자체가 맛과 당도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인삼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적으로 인삼은 한국의 인삼이 최고로 꼽힌다. 똑같은 품종을 중국이나 일본에 가져다 심어도 한국산과 똑같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또 와인이나 홍삼은 같은 재료를 쓰더라도 가공하는 기술에 따라 품질이 천차만별이다. 포도를 처리해 보관하는 습도, 온도, 기간에 따라 와인의 가격이 달라지는 것처럼 홍삼도 처리 과정에 따라 품질 차이가 확연하다.자연 상태의 인삼은 수삼(水蔘), 이를 자연 건조한 것이 백삼(白蔘), 수삼을 쪄서 말리면 붉은 색이 감도는 홍삼(紅蔘)이 된다. 찌고 말리는 과정에서 인삼 특유의 사포닌 성분들이 증가하기 때문에 인삼은 백삼보다 홍삼으로 가공해야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홍삼으로 가공되는 과정에서 온도, 습도, 시간 등에 따라 품질이 달라지는 것이다.그렇지만 프랑스가 체계적으로 와이너리(winery: 포도주를 만드는 양조장)를 육성하고 관리하는 것과 달리 한국의 인삼은 주먹구구식의 운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와이너리는 정부가 자격증을 부여하고 생산품에 등급을 매기고 또 수출을 위한 판매와 마케팅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제조자는 마케팅, 영업비용을 들이지 않고 와인의 품질에만 심혈을 기울이면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반면 한국의 인삼은 개인이 심혈을 기울여 인삼을 재배하고 가공해도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막막하다. 오히려 공장에서 대규모로 제조되는 국적 불명의 홍삼액이 전국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강화 천토흑삼 제조원(www.chunto-sam.com)’을 운영하고 있는 고상화 사장(68)은 40년 동안 인삼을 재배하고 가공하는 일에 매달린 ‘인삼 마스터’다. 공식적으로 ‘인삼 장인(匠人)’이라는 명칭은 없지만, 고 사장은 대학 연구소의 인삼 연구원들보다 인삼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다고 자신한다. 인삼 자체가 공장에서 나오는 물건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예측 불허의 조건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자신의 인삼 지식은 경험을 통해 얻은 산지식이기 때문이다.성분 누출 막는 기계 직접 고안대뜸 고 사장은 국내 인삼 시장에 일침을 놓는다.“지금 인터넷에서 홍삼 추출물 한 박스에 1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팔리는 것들이 있다니까. 그런 것들이 제대로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나. kg당 5만 원 하는 중국산 홍삼 농축액을 들여와 물을 타서 만들고 있어. 국산 농축액은 10만 원이고. 수삼보다 더 싼 홍삼이 시장에서 팔리는데 그 진물은 다 빠진 것이라고 봐야지.”고 사장이 현재 만들고 있는 것은 홍삼도 아닌 흑삼(黑蔘)이다. 찌고 말리기를 아홉 번 반복하는 구증구포(九蒸九曝) 과정을 거치면 붉은 기운이 점차 진해지면서 검게 변하는데 이를 흑삼(黑蔘)이라고 한다. 인삼으로 가공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다. 공정이 복잡한 만큼 가격도 일반 인삼 제품에 비해 훨씬 비싸다.고 사장이 이 흑삼을 만드는 작업장은 강화도 전등사 아랫자락의 작은 시골마을 한쪽의 약국에서다. 그는 지금도 모든 제작 과정을 혼자 도맡고 있다. 주변에서 공장을 세우라고 권유하기도 하지만 본인이 직접 챙기지 않으면 안 되는 고집스러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마치 ‘건강원’의 찜기와 건조기, 포장 기계처럼 보이는 기계들은 고 대표가 직접 주문 제작한 것이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기계다.“처음 기계를 주문하니까, 나보고 미쳤다고 그래. 늙은 양반이 도대체 뭐하려고 이런 요상한 기계를 만드느냐 이거지. 만들어 주려고 하지도 않아서 선금(先金)을 주고서야 겨우 만들 수 있었지.”고 사장이 만든 기계의 핵심은 찌는 과정에서 물이 삼에 한 방울도 닿지 않도록 한 것이다. 찌는 과정에서 수증기가 방울져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뚜껑 안쪽에 삿갓 모양의 가리개를 달고, 아래에는 체를 2중으로 설치했다. 물이 닿으면 삼의 성분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집에서 일반인이 인삼을 아홉 번 찐다고 해서 흑삼이 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다.“어떤 공장에서는 삼을 찌면서 나오는 그 물을 따로 빼서 홍삼액으로 팔아. 그러면 껍데기만 홍삼이지 성분이 제대로 남아 있겠느냐, 이 말이지. 국내 이름난 회사에서도 그러고 있다니까. 언론들이 나서서 그런 거 다 취재하면 난리가 날 걸.”27세 때부터 인삼 재배 시작고 사장이 인삼 재배를 시작한 것은 40년 전 27세 때다. 5남매 중의 맏이였던 그는 22세 때 약업사 자격증을 따 약국을 운영했고, 뒤이어 한방 약재를 다루는 자격증도 땄다. 그런 만큼 약초에도 관심이 많았다. 당시 강화도에서는 인삼 재배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때였다. 6·25전쟁 때 피란 온 개성인들이 인삼 재배지를 찾다 개성과 토질과 기후가 비슷한 강화도에서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다.젊은 나이의 고 사장이 인삼 재배를 시작하자 농부였던 아버지도 합세했다. “아버지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시작한 것을 아버지가 도와준 것”이라고 고 사장은 강조했다. 처음 3300㎡ 규모였던 재배지는 점차 늘어나 1995년도에는 43만㎡ 규모로 커졌다. 한창때는 인삼 밭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인삼을 키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족들은 인삼을 자주 먹었고, 이미 30년 전부터 홍삼으로 쪄먹는 등 인삼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1995년이 되자 재배 면적을 줄이고 흑삼 연구에 돌입했다. 나이도 든 데다, 인삼에 대한 열정은 당연히 최고의 경지에 도전하겠다는 수순으로 이어졌다. 구증구포의 공법은 인삼뿐만 아니라 다른 곡물들에도 적용되는 전래의 가공법이다. 그중 흑삼은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고 인식이 부족해 그간 많이 알려지지 않다가 최근 항암 효과가 알려지면서 조금씩 수요가 늘고 있다.인삼을 아홉 번 증숙 건조하면 5~6번째에서 색이 검어지기 시작하는데 이때 인삼의 아주 유용한 성분인 인삼 사포닌(Ginsenoside)이 활성화돼 함량이 증대되고, 홍삼에는 없던 ‘Rg3’ 성분이 나오게 된다. Rg3은 산화질소 방출을 통한 혈관 이완 효과, 암세포 전이 억제, 항치매, 항혈전 효과를 지닌 물질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혼자서 자료를 찾아보고 흑삼을 제조하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지난해 농산물 건조기 기계를 들여오기 전에는 가겟방 하나에 삼을 늘어놓고 말렸다. 온도 조절은 난방용 보일러에 의존하는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흑삼을 찌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성분 분석은 중앙대 인삼산업연구소 등의 전문 연구기관에 맡겨야 했다. 아홉 번의 찌는 과정 중 한 번의 온도 변화에도 그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성분을 검사했다. 회당 70만 원인 성분 분석을 수십 번 의뢰하느라 개인으로서는 큰돈이 지출되기도 했지만 Rg3 검출량이 예상외로 많이 나오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지난해 10월 주문 제작 기계를 들여오면서 비로소 체계적인 생산이 가능해졌고 일반인들을 상대로 판매를 시작했다.고 사장의 가게에는 일반 의약품보다 흑삼이 더 눈에 띈다. 최종 가공된 흑삼을 300g씩 싸 놓은 투명 비닐봉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부서져 떨어진 잔뿌리를 씹자 쓰기만 할 뿐 별 맛이 없었다. 마치 숯처럼 생겼다고 얘기했더니, 검지만 사실은 검은 색이 아니라며 곱게 빻은 분말을 보여주는데, 정말로 검은색이 아니라 적갈색이다. 분말은 향긋한 인삼 향이었고 맛은 삼 특유의 쌉쌀함을 간직하고 있다. 이를 먹기 편하게 약제용 캡슐에 넣은 제품도 판매하고 있다.고 사장에 따르면 흑삼도 먹는 노하우가 있다. 일단 분말 형태가 가장 좋다는 것. 그것도 아무 것도 넣지 않은 흑삼 100%여야 한다. 일반인들은 먹기 편하다는 이유로 흑삼을 물과 함께 달인 액상 제품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분말 형태가 원형에 가까운 흑삼 성분을 보존하고 있다.흑삼액이라고 판매하는 제품 중 흑삼만 달인 것인지, 다른 한약재를 함께 넣고 달인 것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고 사장도 오가피나 쑥을 함께 넣은 제품을 만들고는 있지만, 흑삼만을 달인 제품에 더 애착을 느끼고 있다. 시중 제품 중에는 흑삼액이라고 하면서 뒷면에 작은 글씨로 다른 한약재를 넣은 경우를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노하우. 백삼 홍삼 흑삼을 막론하고 자연 상태에서 6개월에서 1년간 가만히 놓아두면 숙성돼 효과가 더 좋아진다고 한다. 경험에서 얻은 고 사장만의 노하우다.일흔을 바라보면서도 고집스럽게 인삼 한 길만을 걷고 있는 그의 꿈은 품질을 인정받아 세계적인 인삼 재배자로 이름을 떨치는 것이다.고상화1940년 경기도 강화 출생. 강화고 졸업. 1967년 덕화약방 개업. 인삼 재배 시작. 2006년 강화 구증구포 흑삼제조원 창립. 2007년 천토흑삼으로 상호변경.글 우종국·사진 이승재 기자 xyz@kbizweek.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