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 유치원 선생님 앵거했어.』『앵거가 뭐니?』엄마는 유치원에서 돌아온 딸아이의 말을 못알아 듣고 몇 번씩 되물은 끝에 앵거가 앵그리(Angry)를 뜻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선생님이 앵거했다는 말은 선생님이 화나셨다는 말이었다. 엄마는 유치원 다니는 딸아이가 서투른 우리말에 더 서투른 영어 단어를 뜻도모르고 섞어 쓰는게 황당해서 유치원 원장을 찾아가 사정 얘기를했다. 딸아이가 영어를 섞어 쓴다는 말을 들은 유치원 원장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어머님 참 뿌듯하시죠.』모 신문 독자칼럼란에 실렸던 내용이다. 조기영어 붐을 타고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에게 너도나도 영어를 가르치는 우리 풍토를 보여주고 있다.14일 서울 종로성당에서 「97년 초등영어교육 실시 재검토를 위한공청회」가 열렸다. 조기영어교육 바람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인 초등학교 영어교육 실시가 과연 타당한지를 묻는 자리였다. 이 모임에는 김한길 국회 교육위 소속 의원(새정치국민회의)과 김길중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 초등영어교재 제작에 참여했던 이학범씨,박인옥 참교육학부모회 부회장, 장선 우이초등학교 교사 등이 참여,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먼저 발제자로 나선 김의원은 초등조기교육의 문제점으로 졸속행정과 무국적 아이들 양산을 들었다. 김의원은 『세계화추진위원회에서 초등학교 영어교육을 대통령에게 건의한게 95년 2월24일인데 그 말이 나온지 꼭 2년만에 초등학교 영어교육이 실시된다』며 2년동안 어떤 준비가 있었는지 의문이라고말했다. 김의원은 또 『검인정 교과서를 개발하는데 보통 2년은 걸리는데 영어 교과서는 9개월만에 개발됐다』며 영어교과서가 졸속으로 제작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2학년 국어시간 미·불 절반 수준영어교육을 담당할 교사도 문제다. 내년에 영어지도를 맡아야할3학년 담임교사는 전국 5천7백32개교에 1만6천7백여명. 교육부는이들을 내년 2월까지 영어지도법 34시간, 의사소통능력 84시간정도연수를 시켜 영어교육에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초등학교 영어는말하기와 듣기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1백20시간의 연수로 오랫동안영어에서 손을 놓고 있던 초등학교 교사들이 발음을 교정하고 듣기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한국의 내일을 책임져야할 아이들이 국어도제대로 모르는 국적 불명아로 자랄 수 있다는데 있다. 김의원은 『내년부터 영어를 배워야할 초등학교 2학년의 연간 국어교육 시간은1백58시간에 불과하다. 미국의 3백6시간, 프랑스의 2백88시간에 비해 절반수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어교육 시간이 선진국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작정 영어를 가르치겠다는게 말이 안된다는 지적이다.김길중 교수도 『초등영어교육의 문제점으로 흔히 과외열풍이나 나랏말의 상대적 훼손 등이 꼽히지만 가장 우려할 만한 점은 어린이의 창의성이나 정서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국어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익히니까 어릴 때 배울수록좋지만 외국어는 다르다는 것이다. 일단 외국어인 이상 외워야 하는데 영어 단어나 문장을 외워야하는 부담감이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결코 좋은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말이다. 이학범씨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치면 중학교 고등학교 영어 수준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길중 교수는 그러나 『전국민이 너도나도 차별없이 다 영어에 능숙한게 세계화는 아니다』라며 『각 분야의 전문가를 키우는게 중요하지 모든 국민이 다 영어를 잘하기위해나설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우리나라에서 주창되는 세계화는 세계화가 아니라 「미국화」다.세계화란 말이 유행한 이후로 오히려 불어나 독일어 스페인어 등제2외국어는 찬밥신세로 전락했다. 영화 패션 노래 음식 등 일상생활 전반에서 진행되는 미국화는 언어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있다. 영어를 언제부터 가르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다. 「백년지대계」란 말에 맞게 의도되고 준비됐느냐, 영어를 중요시하는 이상으로 국어를 더욱 아끼고 중요시하고 잘 가르치려고 노력하느냐가 문제다. 김한길의원의 지적대로 초등영어교육 실시 결정이 『교육이정치논리에 종속』돼 이뤄진 전형적인 전시행정이 아니기만을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