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사태를 계기로 정부의 산업정책이 실종됐다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특히 정권말기에 공무원들이 눈치보기로 일관해 정부는수수방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강경식 부총리겸 재정경제원장관을 중심으로한 현 경제팀은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 시장논리대로 해결되도록 해야한다는 원칙론만을 강하게 고수하고 있다. 오히려 정부는 기아를 비롯한 최근 일련의 사태를 특정산업에 대한 구조조정보다는 기업들의 경영행태를 바꾸는 계기로 삼으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노조와 대그룹들의 반발이 거세지는 것과 함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정부입장에 동조하는 목소리도 만만찮게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어서 팽팽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정보의 구조조정정책 / 시장원리 따라 관련 제도 정비강부총리와 임창렬 통상산업부장관이 지난 5일 발표한 「기아그룹처리에 관한 정부입장」에 잘 나타나 있다. 『특정기업의 제3자인수 등 산업구조조정문제에 대해 그간 정부에서 한번도 논의된 일이없었고 또 앞으로도 개입할 의사나 계획도 없다. 아울러 현행WTO(세계무역기구)체제하에서는 통상마찰 소지로 인해 정부간여자체가 곤란하다. 따라서 자동차산업을 포함하여 모든 산업의 구조조정은 민간기업간에 자율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며 정부로서는 자율적 구조조정이 원활히 이뤄질수 있도록 관련 여건조성 및제도개선에 주력할 것이다』라는 것. 한마디로 그냥 내버려둬야 기업과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이 스스로 고통을 겪고 해결책을 찾아나서면서 자율적인 구조조정 방식이 정착된다는 생각이다.개발연대에는 정부가 산업합리화조치 등을 통해 부실화된 기업을인수하는 기업에 시드머니(종자 돈)격으로 저리의 자금을 지원하고 특혜조치를 주는 식으로 부실기업 처리를 주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건설업합리화나 해운산업합리화가 대표적인 사례이고 불과4년전인 93년에도 (주)한양을 산업합리화업체로 지정, 주공이 인수토록 했다.그러나 정부판단이 항상 옳을수 없으며 지금은 금융자율화와 WTO출범으로 정부가 개입하려고 해도 개입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 정부주도의 구조조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에 대그룹들의 부실화가이어지고 있고 기업들은 정부를 바라보며 지원을 기대하는데 익숙해져 있다는게 현 경제팀의 판단이다. 기아그룹의 경우도 부실화가진행되고 있을때 아시아자동차 자구노력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던데다 김선홍 회장이 정계와 관계에 의존해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강부총리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굳혔다고 한다.또 재경원관료들은 『정부가 만일 기아의 회생을 지원한다면 기아는 해외에 차를 한대도 팔지못할 것』이라며 WTO출범이후 국제여건이 변했다고 지적한다.정부가 말하는 시장논리란 부실기업이 M&A(기업매수합병)를 통해인수되거나 돈을 빌려준 채권금융기관이 부실기업의 인수나 처리를추진하거나 부실기업이 스스로 자구노력을 통해 경쟁력있는 기업으로 되살아 나거나 하는 방식이다. 정부는 이를 측면에서 지원하는제도들을 꾸준히 마련해왔다. 부실징후기업 자산의 처분을 도와주는 부실채권정리기구설치, 기업합병시 특별부가세 과세이연 등 합병관련세제지원이 여기에 해당된다.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기업의 부도를 2개월 유예한뒤 회생방안을 모색하는 부도유예협약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또 M&A를 활성화하기 위해 부실징후기업을 인수하는 경우나 철수하는 외국인지분을 인수하는 경우 등에는 강제공개매수제도의 예외를 인정할 방침이다.◆ 기아사태 해법 / ‘부실경영 책임묻겠다’ 강조정부는 기아사태로 인한 △금융시장불안해소 △중소하청업체의 지원 △대외신인도제고에는 할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되 기아자체의 해결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표명해왔다. 그러나 지난 4일과 5일 채권금융기관장들과 회동하는등 의견을 조율해왔다. 정부정책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정책을 설명하고 이에 합당한 금융기관들의 대응을 유도하는 성격이 짙다. 그 핵심은 기아사태를통해 각 기업이 스스로 방만한 경영 무모한 확장 등 과거의 경영방식에서 철저히 벗어나야만 한다는 교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때문에 금융기관들은 기아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치 강한 자구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부실경영에 책임이 있는 김선홍 회장 등 경영진의 사직서제출, 아시아자동차를 포함한 계열사매각과 인원감축,노조의 경영개입중지 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재경원관료들은부도후 법정관리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지난 5일강부총리가 기아협력업체에 대한 더이상의 지원은 생각하지 않고협력업체의 부도는 기아자체의 책임이라고 강조한 것도 기아압박전술의 일환이다. 경제에 영향이 큰 대그룹이고 여론의 지원을 받는기업이기 때문에 살려야한다는 논리로 자구노력을 조금이라도 회피하려는 시도는 철저히 붕괴시키는게 정부의 속셈이다.기아직원들이 삼성에 인수되지 않는 방법을 찾는데 최우선을 두고있지만 그것보다 「뼈를 깎는」 자구노력이 먼저고 다른 대기업에대한 교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시나리오설등을 무마하기 위해강부총리가 지난 5일 현정권내에서는 제 3자인수가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지만 재경원은 삼성이든 아니면 현대나 대우든 합법적으로 증권시장에서 주식을 사모아 기업을 인수한다면 그것도 막을수 없다는 입장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M&A가 허용돼있는 이상M&A도 구조조정의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기아에 대한 대응은 진로의 경우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진로는 자구노력을 하면서도 채권금융기관의 대주주에 대한 경영권포기각서 제출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 부도유예협약기간중원리금상환요구는 면했지만 채권금융기관들의 자금지원은 받지 못했다. 부도유예협약기간이 종료된 뒤에도 자금지원은 없었지만 진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금을 막아가고 있다. 그나마 자구노력을통해 나름대로 자생력을 갖추게 됐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구조조정사례라고 재경원은 보고 있다. 향후 기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대응이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정부는 기아에 대한 이같은 가혹한 대응을 통해 기아이외의 다른대기업들이 교훈을 얻어 스스로 부실한 기업은 정리하고 불요불급한 자산과 인력을 처분함으로써 자율적인 구조조정이 이뤄지도록하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노조가 파업을 추진하고 있는등 정부의구조조정정책전환이 순탄치만은 않을 전망이다.★ 정부개입 내부문서 파문 / "3자인수 시나리오 있다"설 증폭강경식 부총리겸 재정경제원장관이 채권금융기관장들과 만나 연내에 제3자인수는 어려울 것이라며 시나리오설 불끄기에 나선 지난5일 재경원내에서는 「기아그룹처리진행상황및 향후대책」이라는정체불명의 문서가 발견됐다. 기아특수강은 산업은행대출을 출자로전환해 경영정상화시킨뒤 제3자인수를 추진하며 기아자동차는 부도유예협약에서 제외해 법정관리를 추진한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재경원 금융정책실내에서 작성된 것이 확실한 이 문서는 그날 오전강부총리의 발표를 정면으로 뒤집는 것은 물론 정부가 기아에 대해모종의 시나리오를 추진하고 있다는 의혹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한결정적인 근거로 받아들여졌다.기아가 채권금융기관의 자구노력을 거부하고 재경원내에서 은행관리나 부도후 법정관리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는 말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던 터여서 내용도 그럴듯했다.윤증현 재경원 금융정책실장과 김진표 은행보험심의관이 부랴부랴해명에 나섰다. 금융정책실의 한 사무관이 개인아이디어를 올린 것을 국장이 보고받고 검토할 가치가 없다고 폐기처분한 문서였다는해명이었다. 윤국장은 정부가 개입하지는 않지만 항상 이러저러한상황을 검토해보지 않을수 없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또 스스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지 않으면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담당사무관의부연설명도 있었다.문서내용과는 달리 채권금융기관들이 부도유예협약을 적용하기로결말이 난 시점인데다 정부정책흐름상 산은출자의 실현성이 희박하다는 이유로 결국 이 문서는 폐기처분된 것임이 확인됐다.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어쨌든 정부는 여러가지 처분방안을 검토하고 있음은 확인됐다. 또 그런 검토방안들이 정부와 채권금융기관들의 만남에서도 반영됐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게 일반의 관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