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꿈 같은 영화’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현실을 벗어나 몽환적이고 신비롭기만 한 이미지들로 꽉 차 있는 그런 영화들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꿈 같은 영화가 있다면 아마 관객들은 그 영화에 서슴없이 욕설을 뱉어 낼 게 분명하다. 이야기는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시간과 공간은 아무런 예고 없이 비약을 겪고, 도대체 주인공은 누구인지, 내가 주인공을 보고 있는 건지, 영화 속의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프로이트가 그랬듯 꿈이란 본시 억압돼 있던 것의 표출이라 했으니 분명 깨어있을 때 억압돼 온 욕망을 꿈에서처럼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면 그건 꼭 8차선 대로에서 홀딱 벗겨진 채 서 있는 것처럼 민망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지난해 제4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영화 <투발루 designtimesp=21036>는 이런 점에서 꿈을 꾸는 듯한 영화라는 표현에 걸맞은 코미디다. 대사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고 화면은 흑백 필름에 색을 입힌 듯한 마술같은 색감으로 일관하며 (실제로 감독은 흑백 필름으로 촬영한 후 후반작업시 색을 입혔다고 한다) 마치 무성영화에 바치는 헌사인양 파편같은 이미지들과 에피소드들로 가득 찬 이야기는 따라가기가 좀처럼 수월치 않다.수영장 설치 전문가의 도제인 안톤(드니 라방)의 일과는 아무도 찾지 않는 허름한 수영장에 물을 채워넣고 스피커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소음을 틀어놓는 일. 눈 먼 아버지와 안톤에게 수영장은 그들이 가진 전부다. 그리고 18세의 아름다운 소녀 에바는 허름한 안톤의 수영장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사고로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영장에 매달리는 안톤에게 매혹당한다.그러나 안톤의 형 그레고리에게 수영장은 눈엣가시일 뿐 어떻게 해서든 수영장을 없애버리고 싶어한다. 그의 목적은 수영장에 있는 기계장치 ‘황제’를 빼앗아 신비한 공간 ‘투발루’로 가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 하지만 모든 계획이 실패하자 그레고리는 아버지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고 그로 인해 결국 수영장을 잃어버리게 된 안톤은 에바와 함께 그녀의 예인선을 타고 먼 공해로 나간다.삐그덕거리는 오래된 펌프로 수영장에 물을 채우는 안톤과 그의 아버지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애써 복원하려는 듯 녹내와 곰팡이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푸른 모노톤의 화면 안에서 안간힘을 쓴다. 수영장을 지켜내려는 안톤과 그 수영장을 없애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그레고리의 갈등은 20세기를 강타한 두 차례의 전쟁 후 잃어버린 과거로 회귀할 것이냐 아니면 이를 딛고 일어설 것이냐를 고민하는 전후 독일과 유럽의 초상처럼 보이기도 한다.이렇게 <투발루 designtimesp=21045>는 대사나 이야기가 아닌 이미지들의 몽환적 연쇄를 통해 돌아오지 않는 과거 그리고 다시 찾아야만 할 것 같은 해묵은 정서와 가치들을 향한 끈질긴 추격전을 펼친다. 그건 꼭 향수와 기억을 점철된 꿈을 꾸는 것 같다. 하지만 그 꿈은 전후 유럽의 모더니즘 작가들이 꿔 왔던 현학적인 꿈과도 독일의 명장 빔 벤더스의 가위눌린 듯한 자기반성적 꿈과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선장의 모자를 쓴 채 거침없이 시원한 바다로 나아가는 안톤과 에바의 모습은 모더니즘의 자괴감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조소로부터 자유롭다. 대신 <투발루 designtimesp=21046>는 기억과 반성, 그리고 희망이 공존하는 꿈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소중한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복원해 낼 것을 희망하라. 이렇게 <투발루 designtimesp=21049>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아쉬움을 닮아 있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