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제 408호 (2003년 09월 29일)

놀아줘 놀아줘

기사입력 2006.09.04 오후 12:00

멕시코 칸쿤에서 날아온 한장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WTO 각료회의가 선언문도 채택하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는 소식에 지구 반대편까지 출장시위를 나가 있던 한국의 농민운동가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 오버랩되는 것은 역시 한국의 농민운동가 이경해씨가 가슴을 찔러 자살했다는 소식일 테고….

각료회의가 논쟁 끝에 결렬로 종료되고 덴마크와 독일 대표가 “이번 협상결렬은 한국과 아프리카 국가들의 격렬한 반대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가슴을 찌른다. 멕시코 대표가 “한국과는 당분간 FTA 협상을 가질 의사가 없다”고 말한 것이나 “한국의 농민운동가들이 WTO를 무력화시켰다”는 외신 보도들 역시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과연 한국은 이번 협상에서 선진국들을 거꾸러뜨리고 이긴 것인가. 이제 농업개방은 물건너간 것이며 이로써 한국 농업은 살아난 것인가. 게다가 이제야말로 미국 등 선진국들이 일방적으로 지배하던 제국의 시대가 궁극적으로 종지부를 찍은 것인가.

불행히도 답은 이 모두에 대해 “아니다”이다. 선진국들이 패배한 것도 아니요, 농업개방이 물건너간 것도 아니요, 한국이 협상에서 성공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농업은 개방의 대세를 더욱 분명히 했고 한국은 ‘더불어 국제무역을 논의할 상대도 못되는 나라’로 전락했으며 국제무역질서는 일정한 룰과 규칙이 아니라 말 그대로 힘에 의해 좌우되는 약육강식의 시대로 들어설 가능성을 높여놓은 그런 상황이다.

물론 현지에서 시위를 벌였던 농민을 탓할 이유는 전혀 없다. 소위 ‘세계화’에 대한 반대시위들 역시 시비 걸 이유가 없다. 그러나 마음은 답답하기 짝이 없다. WTO가 싫다면, 그렇다면 우리에게 다른 방법은 있는지 누가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조그만 동네 골목길에조차 경찰관이 필요한 터에 경찰관(WTO)이 없는 지구촌이 상상가능한 것인지, 그렇다면 뒷골목에서 어떤 깡패를 만나더라도 굳이 물리칠 만한 주먹의 힘을 과연 우리는 갖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세상의 나라들이 모두 WTO 체제 아래에서 농업도 개방하자는데 무슨 독불장군이라고 농업은 안된다고 우길 것인가. 물론 농업개방을 못하겠다면 WTO를 떠나면 그만이다. WTO 없이도 무역을 하고 다른 나라와 선린의 관계가 유지된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중국만 하더라도 마늘 한 종목으로 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고 만일 그 상대가 미국이라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약한 자가 의지하는 것이 경찰이며 약한 나라가 호소할 곳이 국제적인 룰이며 국제적인 갈등조정 장치들이라는 사실 역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곳이 다름 아닌 바로 WTO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지역의 불리함을 안고 있고 다른 나라에 우리가 땀 흘려 만든 물건을 팔지 않고는 살 수 없다. WTO가 싫다면 지역협력 체제라도 구축해야 하지만 칠레와 맺은 FTA조차 아직 국회에 무한정 계류돼 있다. 그러니 멕시코조차 한국과는 FTA에 대해 논의할 생각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농업경쟁력을 높여 개방시대에 대비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지만 이 역시 쉽지 않다. 우리는 우루과이라운드 체제가 출범한 지난 94년 이후 물경 71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농업부문에 쏟아넣었지만 변한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가다가는 개그콘서트라는 오락프로에 나오는 괴이쩍은 캐릭터처럼 지구촌의 다른 나라들을 찾아다니며 “놀아줘, 놀아줘”를 애걸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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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6-09-04 1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