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스펀 ‘침체’에 폴슨 ‘양호’ 맞서

미국 경제가 관심이다. 글로벌 증시의 불안은 지난 2월말 중국에서 촉발됐다. ‘중국 쇼크’는 미국 경제에 대한 불안감으로 옮아갔다. 미국 경제는 세계 경제의 28%(GDP 기준)를 차지한다. 따라서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질 경우 세계 경제 전체가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다. 미국 경제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미국 경제 불안에 대해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헨리 폴슨 재무장관 등은 “미 경제는 견조하다”고 한목소리로 강조하고 있다. 민간 전문가들도 “그동안 가려졌던 경기 둔화가 표면화됐을 뿐 변한 건 없다”고 분석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증시가 조정을 받는 지금이 매수 타이밍”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그러나 최근의 경제 지표는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를 증폭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시한폭탄으로 등장한 ‘서브프라임(subprime·비우량) 모기지’의 부실 파문이 예상 밖으로 확산되고 있다. 파문이 확산될 경우 아직까지는 ‘예상 범위 안’으로 분석되는 미 경제가 ‘예상 밖’의 타격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경기 침체 가능성 있다’지난 2월 중순까지만 해도 미국엔 ‘골디락스(Goldilocks)’에 대한 기대감이 팽배했다. 성장률은 견조하고 인플레이션 압력은 둔화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욱이 버냉키 FRB 의장이 의회에 나가 공개적으로 “경제는 지속 가능한 수준에서 성장하고 있으며 인플레이션 압력은 수그러들었다”고 공언, 경기 연착륙을 의심하는 시각은 적었다. ‘FRB가 연내에 기준 금리를 내릴 가능성은 물 건너갔다’는 전망이 확산됐을 정도였다.분위기는 2월말 반전됐다.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지난 2월 26일 홍콩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의 위성 연설을 통해 “미 경기가 올해 안에 침체에 빠져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음날인 2월 27일 ‘중국발 쇼크’로 글로벌 증시가 급락했다. 이후 발표되는 미국의 각종 경제 지표도 뒷걸음질 일색이다.작년 4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당초 3.5%(연율 환산 기준)에서 2.2%로 대폭 하향 조정됐다. 작년 연간 성장률도 3.4%에서 3.3%로 내려앉았다. 경제 전체를 가늠할 수 있는 성장률이 급락했으니 불안감이 삽시간에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그뿐만 아니었다.제조업 동향을 알 수 있는 1월 내구재 주문은 7.8%나 감소했다. 공급관리자협회(ISM)의 2월 서비스지수도 54.3으로 전달(59.0)보다 낮아졌다. 비록 한두 달이지만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동시에 뒷걸음질치니 그린스펀의 ‘혜안’이 더욱 빛날 수밖에.반면 지난 1월 중 신규 주택 판매 실적은 93만7000채(연율 환산 기준)로 13년 만에 가장 적었다. ‘주택 경기 바닥론’이 쏙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FRB의 ‘공언’이 무색하게 인플레이션 우려감도 다시 살아났다. 1월 근원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0.3%로 작년 6월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국제 유가마저 배럴당 60달러를 넘나들어 경기 둔화에 대한 우려감이 가속됐다. 더욱이 그동안 잠재돼 있던 9000억 달러에 달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부실 파문마저 확산되는 추세다.‘중국 쇼크’를 계기로 그동안 ‘다우지수의 사상 최고치 행진’에 가려졌던 미국 경제의 약점이 한꺼번에 노출된 셈이다. 특히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문이 주택 경기 침체를 가속화할 것으로 전해지면서 경기 연착륙 전망에도 ‘노란불’이 켜진 상태다.월가의 대표적 이코노미스트인 스티브 로치 모건스탠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등 주택 담보 대출 위기가 소비를 제약하며 파급 효과(spillover effect)를 나타내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미국 경제의 자본 지출이 약해지고 있고 저축률도 낮은 상태인 데다 GDP 대비 소비가 70%로 사상 최대 수준이어서 앞으로 큰 문제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경기는 여전히 견조하다’경기 침체 우려에 대한 정책 입안자들의 입장은 한마디로 ‘이상 없음’이다. 버냉키 의장은 “성장률 하향 조정은 예상됐던 것”이라며 “경제는 예상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고 일축했다. 폴슨 재무장관도 “경기 침체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지만 지금 미국 경기는 아주 양호하다”며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최근의 글로벌 금융시장 파동도 곧 진정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견지하고 있다. 윌리엄 풀 세인트루이스 연방은행 총재도 “경기 침체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고 확언했다.이처럼 정책 입안자들이 낙관론을 주장하는 것은 경기 둔화가 예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FRB는 올 성장률을 2.5~3.0%(작년 3.3%) 수준으로 예상했다. 따라서 최근 경기를 침체로 빠져드는 게 아니라 연착륙하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제가 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문제도 다른 부문으로 전이되지 않고 있는 만큼 섣부른 비관은 금물이라는 시각이다. 실질소득이 견조하게 증가하고 있는 데다 고용 사정도 호조를 보이는 만큼 주택 경기 침체 등의 여진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이에 대해선 일부 민간 전문가들도 동의하고 있다. ‘강세장의 여제(女帝)’로 불리는 골드만삭스의 수석 투자전략가 애비 조셉 코헨은 “물가 압력이 줄어든 점을 감안하면 견조한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아직 바닥을 치지 않은 주택 경기와 모기지 부실이 변수가 되겠지만 그리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씨티그룹의 수석 투자전략가 토비아스 레브코비치도 “펀더멘털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조정을 매수 타이밍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시한폭탄 ‘서브프라임 모기지’최근 미국 경제의 시한폭탄으로 등장한 것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다. 이는 신용도가 취약한 사람에게 2~3%포인트의 금리를 더 받고 빌려 주는 모기지(주택 담보 대출)를 말한다. 주택 경기가 호황일 때 금융회사들이 대출을 경쟁적으로 늘리다보니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작년에 급속히 증가했다. 전체 3조 달러의 모기지 시장 중 20%인 6000억 달러가량이 서브프라임 모기지일 정도다.서브프라임 모기지는 주택 경기가 둔화되면서 문제가 됐다. 신용도가 취약한 사람이 원리금을 제때 갚지 못하면서 대출의 상당 부분이 부실로 변하고 있는 것. 당연히 이를 취급한 모기지 회사들이 1차 타격을 받았다. 20여 개 서브프라임 모기지 회사가 문을 닫았을 정도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회사를 사들인 세계 3위 은행인 HSBC의 경우 작년 부실 채권이 106억 달러에 달했다.서브프라임 모기지는 경제에 두 가지로 영향을 미친다. 직접적으론 금융회사에 대한 파장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취급 회사는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에 더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증권을 매입했거나 모기지 회사에 대출을 해준 대형 금융회사들도 영향권에 들어간다.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등 내로라하는 투자은행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이러다보면 전체 금융회사가 영향을 받는다. 부실 채권 증가에 움츠러든 금융회사들은 대출 심사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신용 경색 현상이 야기될 수 있다. 자칫하면 경제 전체에 불똥이 튈 수 있다는 얘기다.다른 하나는 주택 경기에 대한 악영향이다. 부실 채권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압류 부동산이 늘어난다는 걸 의미한다. 또 금융회사들의 대출 조건이 까다로워지면 아무래도 집을 사자는 세력이 줄어든다. 이는 주택 경기 침체를 부채질하는 요인이 되고, 결국 성장률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물론 서브프라임 모기지 문제가 다른 경제 부문으로 확산됐다는 징후는 없다. 그러나 파문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업체→프라임 모기지 업체→대형 금융회사’로 확산되고 있어 앞으로도 그러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다보니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미국 경제의 시한폭탄으로 등장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따라서 모기지 부실이 어느 수준에서, 언제 진정될지 여부가 미국 경제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울 가장 중요한 요소로 지적되고 있다.뉴욕=하영춘·한국경제 특파원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