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메드베데프(43·사진) 총리가 지난 7일 러시아연방 제5대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하면서 ‘메드베데프 대통령-푸틴 총리’라는 사상 초유의 정치 실험이 시작됐다.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연방이 출범한 뒤 전임자가 임기를 무사히 끝내고 투표를 통해 당선된 후임자에게 권좌를 내준 것은 처음이다. 후임자는 불혹의 나이를 갓 넘긴 최연소 대통령이다.특히 국민들의 전폭적인 인기 속에 임기를 끝낸 대통령이 다음 정권에서 총리에 취임한 것은 러시아는 물론 세계 정치사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새로 출범한 러시아의 ‘쌍두 권력 체제’가 비상한 관심을 모으는 이유다.메드베데프 신임 대통령은 1991년 소련의 해체와 시장경제의 태동을 경험한 소위 ‘486세대(40대·1980년대 학번·1960년대생)’다. 그는 1965년 9월 푸틴 대통령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학 교수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대학도 푸틴 대통령과 같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소련 정부가 금지했던 딥 퍼플 등 헤비메탈 음악에 심취할 정도로 자유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 영어에도 능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도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이나 콜호스(집단농장) 지원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메드베데프는 법학박사 학위를 갓 취득한 1990년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보좌관이던 대학 13년 선배 푸틴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이후 푸틴이 총리가 되자 내각 사무실장으로, 대통령이 되자 크렘린 행정실장으로 따라다니며 푸틴을 보좌했다. 2000년 거대 국영 가스회사인 가즈프롬의 이사회 의장직에 임명됐고 2005년 11월엔 제1부총리로 발탁됐다. 급기야 지난해 12월 푸틴 대통령의 지원 속에 크렘린 내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집권당의 대선 후보로 공식 지명됐고, 경쟁력이 떨어졌던 다른 3명의 후보들을 따돌리면서 크렘린의 새 주인이 됐다.일각에선 그를 160cm의 작은 키에 유약한 성격의 선비형 관료로 묘사하며 과연 러시아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인가에 물음표를 달고 있다. 반면 외유내강형 카리스마를 지닌 합리적인 인물이란 평가도 있다.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푸틴에 비해 친서방 성향이라고 할 수 있는 메드베데프의 등장에 기대를 걸고 있다. 동유럽 미사일방어(MD),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확장, 무기 감축 협정 등으로 꼬여 있는 외교 문제에 우호적인 무드가 조성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다.하지만 메드베데프 앞에 놓여 있는 정치적 벽은 높다.먼저 ‘실세 총리’에 취임한 푸틴은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인 메드베데프 대통령을 조정해 나랏일을 ‘수렴청정’하려 들게 뻔하다. 더욱이 푸틴은 내각의 수장뿐만 아니라 여당인 통합러시아당의 의장직도 맡아 국가두마(하원)까지 장악하게 됐다. 대통령 못지않은 영향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 셈이다.총리직은 대통령의 3연임을 금지하는 헌법을 피해가기 위한 푸틴의 임시 거처일 뿐 추후 다시 대통령으로 출마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으로서 권력을 행사하는데 한계를 보일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대목이다. 권력의 ‘교체’가 아니라 ‘교대’라고 표현하는 이유다.실제로 최근 발표된 메드베데프 정권의 제1기 내각 명단은 푸틴 총리의 최측근 인사들로 채워졌다. 푸틴 정권에서 총리를 맡았던 빅토르 주브코프와 이고르 슈발로프 전 대통령보좌관이 각각 제1부총리로 임명됐다.이런 가운데 잠복해 있는 크렘린 내 계파 간 권력 다툼이 노골화되거나 정책 결정 과정에서 둘 사이에 불협화음이 발생할 경우 쌍두 체제에 금이 가고 치열한 권력 싸움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러시아 최대 정파이며 민족주의와 반(反)서방 성향이 강한 ‘실로비키(정보기관·군·검찰 출신들)’의 견제도 상당할 것으로 예측된다. 실로비키는 푸틴의 핵심 지지 세력으로 지난해 12월 푸틴이 메드베데프를 후계자로 지명할 당시 강력하게 반발했었다.푸틴의 유산인 물가 불안과 부의 불균형 등 경제적인 과제도 난제다. ‘오일머니’ 유입으로 성장 기조가 계속 유지되고는 있지만 11%를 넘는 고인플레이션은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고 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정부가 최근 수년간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인플레가 여전히 러시아의 주요 문제로 남아 있다”면서 “정부는 앞으로도 인플레 억제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유병연·한국경제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