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삽 뜬 한·일 해저터널 공사

일본 규슈 사가 현 북서부의 가라쓰 시에선 작지만 큰 의미의 터널 공사가 진행 중이다. ‘한·일 해저터널’ 지질 조사를 위한 탐사 터널 공사다. 현재 지상으로부터 547m 길이까지 해저터널이 뚫려 있다. 터널 끝 지점은 해저로부터 44m 아래다. 이 공사를 주관하고 있는 일본 코다기술연구주식회사의 후지하시 겐지(60) 사장은 “앞으로 1300m까지 더 파고 들어갈 것”이라며 “지금까지 조사로는 한·일 해저터널을 건설하는데 지질적·기술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논란이 돼 온 한·일 해저터널이 민간 수준에선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를 중심으로 한 국제하이웨이건설사업단이란 민간단체가 경제적 타당성 연구 등을 마치고 기술 검토에까지 착수한 상태다. 이 사업단은 한·일 해저터널이 일본과 한반도는 물론 중국을 건너 전 세계를 하나로 잇는 평화 터널이 될 것이란 신념을 갖고 1982년부터 탐사 갱도 시추 작업에 나섰다.국제하이웨이건설사업단은 거제도~쓰시마섬~가라쓰를 잇는 A, B노선과 부산~쓰시마섬~가라쓰를 연결하는 C노선 등 모두 3개 잠정 노선안을 놓고 타당성과 경제성 등을 검토했다. 그중 거제~쓰시마섬~가라쓰의 서측 구간을 잇는 A노선이 가장 적절한 것으로 평가됐다. 부산~쓰시마섬~가라쓰가 연결되는 C노선의 경우 가장 길고, 특히 지진대를 지난다는 게 결정적 약점으로 꼽혔다.이 때문에 사업단은 쓰시마 거제도 등지에 터널을 시추하기 위한 땅도 구입하는 등 활발하게 사업을 추진해 왔다. 탐사 터널 공사를 위해 가라쓰 시에만 9만9150㎡(옛 3만 평)의 땅을 확보한 상태다. 다만 사유지를 벗어난 해저에서 시추하기 위해서는 양국 정부의 허가가 필요한 만큼 일단 가라쓰 지역의 시추는 중단된 상태다.사업단 측은 한국과 일본 내에서 우호적인 여론이 조성돼 양국 정부가 해저터널 건립에 본격적으로 나설 경우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업에 적극 참여한다는 방침이다.= 원래 한·일 해저터널 구상은 1981년 통일교 문선명 총재가 국제평화고속도로 건설 방안 중 하나로 제안하면서 논의가 본격화됐다. 이후 일본에서는 1983년 홋카이도대 명예교수였던 사사 야스오 씨가 일·한터널연구회를 설립해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갔다. 연구회는 △정책·이념 △지형·지질 △설계 시공 △환경·기상 등 4개 전문위원회를 두고 25년간 조사와 연구를 한 뒤 ‘터널 건설이 가능하다’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한국 측에선 2003년 한국교통연구원과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이 건설교통부 발주를 받아 ‘한·일 해저터널 필요성 연구’에 관한 용역을 실시한 게 지금까지 유일한 연구다. 당시엔 ‘타당성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하지만 2007년 허남식 부산시장이 공식적으로 한·일 해저터널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겠다며 적극 나서 논의가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부산시는 작년 6월 부산발전연구원(BDI)에 관련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사업 타당성 연구를 시작했다.한·일 해저터널에 대해선 두 나라 정치권에서도 꾸준히 관심을 보여 왔다.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이 한·일 해저터널의 가능성 등에 대해 언급했고 일본에선 2000년 모리 요시로 당시 총리가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참석해 직접 제의하기도 했다. 2007년엔 고건 전 총리가 한·일 해저터널 건설 방안을 대선 공약으로 검토하면서 화제가 됐다.작년 11월 청와대 대통령실 국정감사에서는 한나라당 김정권(김해시 갑) 의원이 한·일 해저터널 사업 타당성 검토 필요성을 묻자 정정길 대통령실장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변하면서 다시 주목 받았다. 앞서 지난해 10월에는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한국 측 재계 인사 15명과 도요타자동차 회장 등 일본의 주요 경제인 12명이 참석한 한·일재계회의에서 한·일 해저터널의 공동 연구를 주장하기도 했다.하지만 천문학적 건설비에 따른 불확실성, 한·일 간 신뢰 부족 등으로 아직 공식 추진되지는 못하고 있다.= 한·일 해저터널은 규슈에서 최단거리인 거제도까지 뚫더라도 거리만 200km가 넘어 영국 프랑스를 잇는 유로터널(50.5km)의 4배나 되는 세계 최장 해저터널이 된다. 공사 기간만 10년 안팎, 총 건설비는 160조∼200조 원으로 추정된다. 천문학적인 금액이지만 국제하이웨이건설사업단 측은 이 터널의 예상 물동량 등을 토대로 분석할 때 완공 후 15년이면 건설비 회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또 일단 한·일 해저터널이 건설되면 기대할 수 있는 경제적 효과가 매우 크다는 게 사업단 측의 설명이다. 한·일 해저터널을 주장하는 일본 측 민간단체인 국제하이웨이재단 카지쿠리 겐타로 이사장은 “한·일 해저터널이 생기면 한국과 일본이 자동차 2시간 거리로 가까워진다”며 “연간 산업 파급효과도 한국은 54조 원, 일본은 88조 원에 달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일본이 대륙으로 보내는 수출 물량의 통행료만 받아도 이득”이라고 덧붙였다.북한의 경우도 일본과 한국의 대륙으로의 수출 물량 통행료로 경제적 수입을 톡톡히 올릴 수 있을 전망이다. 국제하이웨이재단 카지쿠리 이사장은 “한·중·일 경제협력이라는 큰 틀에서도 한·일 해저터널은 뚫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숭실대 신장철 교수는 지난해 말 부산발전연구원이 주최한 관련 세미나에서 “한·일 해저터널은 한·일 관계뿐만 아니라 동북아와 유라시아 차원의 경제 통합과 지역공동체 구축을 위해 추진돼야 한다”며 찬성했다.일본의 경우 한·일 해저터널이 개통되면 한국을 거쳐 중국은 물론 유럽까지 철도로 연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정치·경제적 효과가 예상된다. 이 때문에 일부에선 한·일 해저터널이 일본의 대륙 진출을 도와주는 역할에 그치면서 오히려 한국의 물류 기지로서의 역할이 축소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란 반대론도 있다. 한국의 일부 경제학자들은 한·일 해저터널은 한국보다 일본이 얻는 정치·경제적 효과가 훨씬 크다며 한국이 앞장서서 한·일 해저터널을 추진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한다.= 부산대 최열 교수는 “한·일 해저터널이 들어서면 일본은 수많은 나라와 육지로 연결되지만 한국은 일본 밖에 연결되지 않아 공간적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그 터널은 동남권 경제를 일본이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일본이 얻을 수 있는 혜택은 엄청나지만 한국의 피해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며 “깊이 있는 연구와 국민적 합의 도출이 선결 과제”라고 지적했다.더구나 이 문제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 간의 역사와 지정학적 환경, 동북아의 정치 및 경제 질서까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에서 양측이 쉽게 합의점을 찾기는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국내 일부 전문가들은 일본이 1920년대부터 대륙 진출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처음 계획한 뒤 1939년부터 민관 합동으로 주도면밀하게 추진해 오고 있다고 주장한다.특히 국제하이웨이건설사업단이 탐사 터널을 뚫고 있는 규슈 북서부 가라쓰 시는 과거 임진왜란 때 일본의 30만 대군이 한반도 점령을 위해 출병한 장소이기도 하다. 경제적 논리와 함께 역사적인 관점에서도 한국 측이 계획에 찬성하기 껄끄러운 대목이다. 사업단 관계자는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던 시발점에서 두 나라의 가교가 될 한·일 해저터널이 시작된다는 것은 또 다른 역사적 의미가 있다”며 “꼭 과거 지향적으로 나쁘게 볼 게 아니라, 오히려 아픈 과거를 딛고 새로운 미래와 평화를 창조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어쨌든 한·일 해저터널은 경제적 타당성만이 아니라 역사·정치·지정학적 측면에서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앞으로 풀어야 할 큰 숙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한·일해저터널연구회 고문인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은 “한·일 해저터널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 국민 간 신뢰 없이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사업”이라며 “이 때문에 기술적 타당성이나 경제성 이전에 마음과 역사 문화의 문제”라고 강조했다.가라쓰(일본 규슈)= 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