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에 눈뜬 B2B 기업들
‘기업 간 거래(B2B) 시장에 세일즈는 있어도 마케팅은 없다’는 말이 있다. 고객이 누구인지 뻔한 B2B 시장에서 마케팅 활동은 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복잡하게 시장조사를 하고 전략을 짜느라 골머리를 앓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거래 당사자들과의 인간적인 거래를 쌓는 것이 더 낫다는 자조적인 의미도 포함돼 있다. 그래서 기업·소비자 간 거래(B2C) 시장과 달리 상대적으로 B2B 마케팅에 대한 관심은 지금까지 저조하게 유지돼 왔다. 하지만 최근의 동향을 보면 B2C 마케팅 못지않게 B2B 마케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자 상거래, B2B 시장서도 위력
이처럼 B2B 마케팅에 관심이 증대되고 있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경제의 글로벌화 진척과 기술 수준 향상에 따른 제품의 동질화 현상이다. 이에 따라 제품 간의 차별화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고객사들이 공급자에게 요구하는 니즈는 품질·비용·운송(QCD)으로 대변된다. 이 세 가지 니즈 때문에 점차적으로 공급자의 제품 차이가 점차 없어지고 있다. 글로벌 제조 및 역량과 자원의 공유, 기술 수준의 급속한 발전에 힘입어 예전보다 제품 차별화의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점에서 중국 기업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예전에는 인건비 등의 비용 우위를 활용해 저가 중심의 공급 전략을 구사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체적인 기술 개발과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품질력과 기술력을 향상시켰고 이제는 선도 업체와 근소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선진 기업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을 기반으로 상당한 수준의 기술력과 제품력을 선보이고 있어 점차적으로 B2B 시장에서 중국 기업의 압력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둘째, B2B 시장에서 전자 상거래가 일상화되고 있는 점도 B2B 마케팅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있다. 왜냐하면 B2B 거래에서 인터넷 사용의 확대는 고객사와의 긴밀한 유대 관계보다 제품 자체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고객사가 제품을 검색하고 비교하는 데 비용도 거의 들지 않는다. 또한 다수의 신규 공급자들의 참여도 용이해지기 때문에 선택의 폭도 그만큼 넓어지는 등의 이점으로 B2B 전자 상거래는 앞으로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2013년에 미국 UPS의 조사에 따르면 기업의 구매 담당자가 제품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 가장 선호하는 방법으로 기업의 웹사이트와 검색 엔진이 49%였다. 이에 비해 거래처 및 판매 담당자에게 정보를 수집하는 경우는 12%에 그쳤다. 이 밖에 기존 사용자 경험과 카탈로그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또한 구매 시 가장 선호하는 방법으로 인터넷이 40%를 차지하고 있다. 이미 구매 활동에 인터넷을 활용하는 수준이 거의 절반에 이르고 있는데 이는 B2B 분야에서도 인터넷을 활용한 정보 조사와 구매가 일상화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셋째, 기업 경영 환경의 복잡성 및 불확실성의 증대로 고객사의 사업 부진이 공급사의 부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급사로서는 그저 고객사의 주문에만 대응하는 구조로는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공급사도 향후 시장 변화에 촉각을 세우고 트렌드를 읽고 때로는 고객사를 리드해야 하는 니즈가 증대되고 있다.


GM에만 의존하다 파산한 델파이
미국의 자동차 부품 공급사인 델파이는 제너럴모터스(GM)에서 1999년에 분사했다. 델파이는 분사한 이후에도 GM에 대한 사업 비율이 50%가 넘었다. 고객사인 GM의 요구 조건에 충실히 부응하면서 델파이는 한때 부품 업계의 2위까지 차지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고객사인 GM의 사업 부진이 계속되면서 결국 2005년 파산 보호 신청을 하게 된다. 고객사가 처한 복잡한 경영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전략이 변화해야 한다. 따라서 시장을 읽지 않고 고객사 주문에 대응만 하다가는 어느 순간 심각한 경영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면 B2B 마케팅은 B2C 마케팅과 어떤 점이 다를까. 세계적인 마케팅의 대가 필립 코틀러 노스웨스턴대 켈로그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자신의 저서 ‘B2B 브랜드 마케팅’에서 다섯 가지 차이점을 설파하고 있다.


첫째, ‘산업재의 복잡성’으로 B2B 마케팅의 주된 대상인 산업재는 일반 소비재와 달리 표준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객사의 개별적인 니즈에 맞춰야 하는 솔루션적인 성격을 띤다. 둘째, ‘파생적 수요’로 B2B의 수요는 고객사의 최종 고객 수요에 따라 발생하는 파생적 성격을 갖고 이는 소비재에 비해 변동 폭이 심하고 비탄력적인 특성을 지닌다. 셋째, ‘국제성’으로 B2B 아이템은 기능과 성능에 주안점을 두기 때문에 전 세계 유사성을 지닌다. 따라서 B2C와 달리 국가별 변형이 불필요하다. 넷째, ‘개별 고객의 중요성’이다. B2B 기업은 B2C 기업에 비해 고객의 수가 현저히 적다. 그리고 소수의 구매자들이 거래액과 판매량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따라서 고객사와의 밀접하고 지속적인 관계 형성이 매우 중요하다. 다섯째, ‘조직 차원의 구매’로 산업재의 구매 의사 결정은 소비재에 비해 매우 복잡해 고객사 조직 내부의 다양한 부서가 구매 과정에 참여한다. 또한 전문가로 구성된 구매 조직이 구매를 담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B2B 마케팅의 특성을 고려하며 성공적인 B2B 마케팅 사례들을 통해 3가지의 B2B 마케팅의 전략적 방향성을 살펴본다.
마케팅에 눈뜬 B2B 기업들
브랜드 구축한 바스프, 금융 위기에도 두각
첫째, 고객과 소통할 수 있는 핵심적인 마케팅 메시지의 개발이 요구된다. 앞서 언급한 상황처럼 이제는 제품의 기능보다 고객에게 어떻게 어필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더군다나 전자 상거래를 통한 거래의 확대는 이의 필요성을 더욱 부채질한다.


독일의 바스프는 B2B 제품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B2B 기업이다. 화학·전자·약품 등 생산되는 제품이 8000개가 넘는다. 하지만 일반 고객들에게는 단지 비디오테이프를 만드는 기업으로 인식돼 있었다. 비디오테이프는 이미 1980년대 철수한 사업임에도 말이다. 더군다나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으로까지 부정적 이미지가 부각돼 바스프는 이러한 고객의 인식 전환이 필요했다.


바스프는 고객에게 제공하는 차별화된 가치를 설정했고 이를 브랜드 이미지로 활용했다. 그것은 ‘고객과 환경보호’였다. 바스프는 이를 고객에게 확산하기 위해 무엇보다 세일즈팀의 교육 훈련에 역점을 뒀다. 이는 인텔의 광고를 통한 ‘인텔 인사이드’ 캠페인과 다른 접근 방법이었다. 바스프는 대대적인 광고보다 고객과 직접 부대끼는 세일즈팀 육성에 주력했다.

이러한 교육 훈련의 목표는 세일즈팀이 어떠한 상황에서든 바스프 제품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고객들에게 일관된 메시지를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바스프 브랜드는 신뢰받는 브랜드로 점차적으로 변화됐고 가격 프리미엄도 형성됐다. 이에 따라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에도 오히려 매출과 순이익이 증가하는 기염을 토했다.


IBM은 2004년 12월 PC 사업에 대한 매각을 발표한다. 이후 IBM은 컨설팅, 기술 관련 서비스, 소프트웨어 등 B2B 사업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했다. 그래서 IBM은 2008년부터 ‘스마터 플래닛(Smarter Planet)’이라는 캠페인을 통해 IBM의 브랜드를 새롭게 구축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B2B 기업으로서 IBM의 사업 영역은 공공 안전, 교통 시스템, 수자원 관리, 도시 관리, 교육 등으로 확대됐다. 이러한 영역에서 IBM은 인텔리전스와 시스템을 활용해 더 똑똑한 세상,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스마터 플래닛을 통해 기업과 공공 조직의 리더들에게 새로운 IBM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인식시켜 나갔다.


둘째, 고객사의 니즈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과 선제적 대응이 요구된다. 사업 환경의 불확실성이 증대되면서 B2B 기업도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도록 고객사를 따라가기보다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상품 기획 역량이 요구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품 기획이 B2B 기업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품 기획이 제대로 힘을 발하기 위해서는 B2B 기업은 고객사의 니즈만 살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고객사의 고객, 즉 최종 고객의 니즈도 파악해야 하는데 이러한 점이 B2B 기업에는 상품 기획에 어려운 점으로 작동한다. 이 때문에 B2B 기업은 기술 동향과 전망뿐만 아니라 고객사와의 밀접한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듀퐁의 제품 중 항공기의 내장을 코팅하는 폴리머 제품이 있다. 이 제품으로 항공기 내장품을 코팅하면 때가 잘 타지 않고 얼룩이 묻어도 쉽게 잘 지워진다. 이는 청소를 빠르게 할 수 있다는 경제적인 가치만 고려한 것이 아니다. 항공사의 고객들이 항공사의 안전성을 평가할 때 기내 청결도를 하나의 안전성 평가 지표로 활용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즉 항공기를 이용하는 최종 고객의 입장을 분석하고 이러한 고객사의 고객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성적인 가치를 제품 개발에 활용한 것이다.


롤스로이스는 자사의 항공기 엔진을 사용하는 고객들이 출력이 좋고 견고한 엔진만을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했다. 엔진의 성능보다 효율적인 엔진 사용을 통해 전체적인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고객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롤스로이스는 고객의 밸류 체인을 분석하고 어디에 성과 저해 요인이 있는지 파악했다. 이러다 보니 엔진의 구매에서 스케줄링, 운항, 유지 보수 등에서 다양한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단순 엔진 판매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상황에 따라 엔진을 임대해 주고 효율적인 사용을 위한 스케줄링 등 전문 지식을 제공했다. 또한 인력 파견을 통해 사후 관리를 제공하는 새로운 사업 형태로도 전환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구매 계약 한 건에 5.4명 승인 거쳐
셋째, 고객사의 구매 의사 결정이 용이하도록 고객사의 집단적 합의를 지원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B2B 기업의 고객사에는 구매 의사 결정에 관여하는 구매 집단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회사의 규모를 불문하고 단독적으로 의사 결정이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다. 미국의 CEB라는 기관에서 약 5000명 이상의 기업 B2B 구매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 건의 구매 계약을 체결하기까지 평균적으로 5.4명의 공식적인 승인이 필요한 것으로 파악됐다. 여기에는 마케팅·운영·재무·법무·구매 등 여러 부서가 포함된다.

각 부서의 이해관계가 얽히면 기간과 비용도 소요될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거래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 따라서 구매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공급사의 솔루션을 지지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킴벌리 클라크 프로페셔널은 기업들을 대상으로 위생 및 안전 관련 제품과 서비스를 공급하고 있다. 이 회사는 구매 집단의 의사 결정이 용이하도록 시설 평가 또는 현장 조사라고 불리는 공동 학습의 기회를 제공한다. 회사 홈페이지를 활용해 현장 조사 서비스를 홍보하고 ‘학습 투어(Learning Tour)’의 이점을 설명하는 메일을 잠재 고객들에게 송부한다. 고객이 요청하면 이 회사는 전문 인력을 현장으로 파견해 개선 방안을 조언하고 협의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의사 결정권자들의 요구 사항을 반영하는 참고 자료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고객사에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안하는 보고서를 보내 의사 결정을 지원한다.


B2B 기업의 환경은 녹록하지 않다. 지금까지 오랜 기간 유지했던 고객사와의 관계가 하루아침에 깨질 수도 있는 환경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질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양적인 측면에서도 고객 기반을 다져야 한다.


현재 고객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잠재적 고객까지 확보하기 위해서는 시장 및 트렌드를 파악하고 고객의 고객까지 고려해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또한 고객에게 신뢰할 수 있는 기업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강성호 IGM 세계경영연구원 교수
마케팅에 눈뜬 B2B 기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