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의 합병설은 11월 9일 한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금융위원회는 서둘러 “합병을 권유하거나 강제 합병을 추진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고 해양수산부도 합병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현대그룹은 “어떤 권유나 통보도 받은 사실이 없다”고 했고 한진해운은 “정부로부터 검토를 요청받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강제 합병’이라는 표현의 문제일 뿐 ‘합병에 따른 장단점을 보고하라’는 의견이 한진해운 쪽에 전달됐고 ‘정부 지원 없이 당장은 어렵다’는 의견을 담은 보고서가 올라간 것은 사실로 확인된다.
‘한계 기업’ 전락한 빅 2
정부의 해운업 구조조정 시나리오에 대해선 9월 서별관회의가 진원지로 거론된다. 서별관회의는 경제부총리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리는 경제금융 상황 점검 회의다. 최근 정부는 증권사 리서치센터에 해운업 업황과 양사 상황을 문의하기도 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KDB산업은행이 여태 생명 연장에 도움을 주는 식으로 지원해 왔는데 그것이 구조조정에 맞는지에 대해 의문이 남을 것”이라며 “정부가 밑그림을 그려 놓은 상태에서 시너지 효과에 대해 얘기를 꺼내야 하는데 앞서 언론을 통해 시너지가 없다고 홍보되면서 합병에 어려움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이번 기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시그널은 여러 차례 포착됐다. 왜 구조조정의 첫 주자로 해운이 지목된 것일까. 배경에는 심각한 업황 부진이 있다. 현재 국내에 등록된 해운 선사는 모두 200여 개 업체에 이른다. 이들 대부분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물동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간신히 연명하고 있다. 2위 현대상선은 5년째 적자 상태로 10분기 누적 적자액이 6796억 원에 이른다. 1위 한진해운은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다가 올 들어 흑자로 반전하는 데 성공했지만 누적 적자가 3000억 원이 넘는다.
현금 흐름 압박은 특히 시급한 문제다. 성수기에도 불구하고 한진해운의 3분기 영업이익은 107억 원에 그쳤다. 현대상선은 그 이하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한진해운의 3분기 이자비용은 840억 원, 현대상선은 2분기 652억 원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양사 모두 이자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신지윤 KTB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기업 구조조정 대상 기준으로 분류되는 이자보상배율이 1 이하로, 정부가 얘기하는 한계 기업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이자비용을 갚는다고 하더라도 돌아오는 원금 만기는 더 큰 문제다. 배를 사거나 빌리면서 생긴 선박 차입금으로, 큰돈이 나가는데 곳간은 비어 있다. 금융시장의 신뢰를 잃어 채권 발행도 어렵다. 양사가 채무 불이행(디폴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은 한진해운이 1조3600억 원, 현대상선은 9700억 원으로 추산된다.
그동안 정부는 해운업에 대한 지원으로 ‘만기 회사채 연장’에 초점을 맞춰 왔다. 이에 따라 양사가 KDB산업은행 차환분을 제외하고 내년까지 갚아야 할 만기 채무 상환 금액은 각각 9200억 원, 8100억 원이다. 양사가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각각 4000억 원 이하로, 자산 매각이나 최대 주주의 증자 없이 자체 영업 현금으로 막는다면 각 5000억 원대 후반의 영업이익이 필요하다. 현재의 업황을 감안할 때 자체 영업만으로는 재무 부담을 해소할 수 없는 게 분명해 보인다.
물론 양사 모두 그동안 자체 재무구조 개선을 통한 구조조정을 진행해 왔다. 한진해운은 대한항공의 증자, 터미널 매각, 벌크 전용선 부문 부분 매각을 단행하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해 재무구조 개선 목표액인 1조9745억 원의 98%에 이르는 1조9285억 원을 이행했다. 현대상선도 액화천연가스(LNG)선 사업 부문을 매각하는 등 팔 수 있는 선박을 정리하며 부채를 떨어뜨리는 노력을 해 왔다.
글로벌 업황 예상도 ‘깜깜’
다만 두 회사의 온도차는 엿보인다. 컨테이너선이 80%인 한진해운은 그나마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2013년 최대 주주가 대한항공으로 바뀌면서 비빌 언덕도 생겼다. 현대상선은 현대그룹의 모기업으로 그룹 매출의 80%를 차지하는 주력이다. 그런데 컨테이너선보다 적자 폭이 큰 벌크선을 30% 보유하면서 영업이 더 악순환에 빠졌다. 정부의 합병안이 한진해운이 주도해 현대상선을 인수하는 것으로 방향이 맞춰진 것은 이 때문이다.
사이클 산업으로 불리는 해운업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7년째 다운 사이클이다. 세계 경기 부진으로 물동량이 줄어들어 수요가 부족한 반면 1만8000TEU(1TEU=20피트 컨테이너 1개) 이상 초대형 선박의 공격적인 공급과잉으로 글로벌 치킨게임 양상을 벌여 왔다. 세계 1위인 덴마크의 머스크를 비롯한 유럽 해운사들이 주도한 판이었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컨테이너 운임을 나타내는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10월 TEU당 300달러 선이 붕괴되며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국내 해운사들도 선박 투자 타이밍에 대한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해운업의 경쟁력은 원가에서 나온다. 원가 경쟁력을 확보해 운임료를 낮춰 공급하는 곳이 주도권을 갖는 구조로, 선박 값이 저렴한 불황기에 적절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게 방법이다. 한국 해운사들들은 투자 적기를 놓치면서 적절한 선박 포트폴리오를 구성하지 못했다.
강성진 KB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양사는 5년간 배를 한 척도 발주하지 못했고 운임이 떨어지면서 계속 손실이 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머스크는 불황기에 충분한 현금을 유지하는 재무 정책, 호황기보다 30%까지 낮은 가격에 선박을 발주하는 선박 운영 정책을 추진했다. 유럽 대형사들이 2012년 이후 최근까지 역대 실적을 기록할 정도로 앞서가는 사이 한국 대표 해운사들은 격차를 더 벌리면서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이미 악화된 재무 상황도 경쟁력 회복을 막는 요인이다. 한 해운 업체 관계자는 “거슬러 올라가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를 겪으며 정부가 요구하는 부채비율 200%를 맞추기 위해 양사가 아까운 선박 120여 척을 팔았고 이를 채우기 위해 호황기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비싸게 배를 주문한 것”이라며 “20년 장기 계약인데다 위약금에 묶여 팔고 싶어도 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해운 업황 전망도 불투명하다. 신지윤 리서치센터장은 “유럽 쪽 물동량이 감소할 뿐만 아니라 경기가 좋은 미국에서까지 물동량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점은 공급뿐만 아니라 수요 측면에서도 회 복의 기미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라며 “기존의 해운 사이클을 벗어난 구조적 어려움에 봉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구조조정과 관련된 논의는 합병설과 매각설로 요약된다. ‘강제 합병’을 부인한 상황에서 특수목적회사(SPC) 등 제삼자를 통한 매각설이 정부가 바라는 그림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현대상선의 구원투수로 현대차그룹이 거론되기도 한다. 극단적으로는 팬오션과 대한해운의 사례처럼 채권자가 주주로 올라선 뒤 매각 수순을 밟는 방법도 있다. 다만 이때에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현대상선 경영권을 포기해야 한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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