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지 자연에 변형을 가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연 그대로만이 최상이며 일체의 인위적·인공인 것은 배격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인간에 의한 개발은 당연히 최악이다. 그들은 고속도로 반대, 중화학 단지 반대, 포항제철 반대, 신공항 반대, KTX 반대, 새만금 반대였다. 평생 반대로 일관한 늙은 교수에서부터 젊은 활동가까지 세대·지역·성별·종교의 구분도 없다.
어떤 사고 구조를 가졌기에 그들은 사사건건 반대 또 반대만 외칠까. 심지어 자신이 틀렸다는 게 명백히 드러나도 생각을 고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인지 부조화 때문일까. 정치적 견해 때문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대중은 또 왜 그렇게 쉽게 동조할까. 자연 훼손에 대한 소박한 반발일까, 아니면 문명에 대한 적대감일까. 무지의 소산일까.
이런 반(反)문명적 사고의 이면에는 오랜 기간 인류의 DNA에 각인된 자연정령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다. 새로운 기술·기계·물질에 대한 거부감과 공포는 다양한 변종으로 나타난다. 인류의 과학기술 문명이 발전할수록 그 혜택을 누리는 동시에 문명에 대한 반감도 커진다.

개발은 惡, 보존은 善…‘아바타’식 편향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2009년 작 ‘아바타’는 외계 행성 판도라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다. 자연을 벗 삼아 사는 나비족의 평화로운 삶을 지구인이 불도저로 짓밟는다는 설정이다.
외양은 SF인데 내용은 미국 인디언들의 수난사를 떠올리게 한다. 누구나 분개할 만한 ‘자연 대 개발’의 선악 구도다. 국내에서 1330만 관객(역대 4위)을 모을 만큼 반향도 컸다.
‘아바타’와 유사한 프레임을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아바타’는 미야자키의 ‘모노노케 히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 하나같이 인간이 훼손한 자연의 복수를 담고 있다. 환경 파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는 점에선 교훈적인 면도 있다. 자연물 하나하나에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아바타’ 유형의 정령주의는 대중의 공감을 쉽게 얻는다.
하지만 ‘아바타’식 프레임에 지나치게 기울어진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자연에 손대는 것은 무조건 악(惡)으로 간주하는 환경교조주의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의 개조 없이 개별 인간이, 아니 70억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대안이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한 무책임한 몽상이 되고 만다.
현생인류가 등장한 것은 12만 년 전쯤이다. 인류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광포한 자연과 투쟁했다. 지진·태풍·해일 등의 천재지변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존재였다. 본능적으로 ‘어머니 자연(mother nature)’에 경외심을 갖고 자연을 영적 존재로 여기는 자연정령주의가 생겨났다.
원시종교에선 대개 해·달·바다·강·산·바위·나무 등을 숭배했다. 나아가 영혼·신령·정령·요정 등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애니미즘(animism)은 현대 종교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탈레스·아낙시만드로스 등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물활론(物活論 : hylozoism)도 같은 맥락이다.
인류사를 24시간으로 환산하면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 문명은 고작 3분에 불과하다. 인류 DNA에 ‘자연정령주의적’ 사고가 깊이 각인된 이유다. 그렇기에 ‘자연으로’라는 구호는 아주 자연스럽게 인간의 마음속에 파고든다. 자연은 선, 인공은 악이라는 이분법이 인간 심리 속에 내재화돼 있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친근감은 반대로 자연적이지 못한 것, 즉 인공적·인위적인 것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으로 발현된다. 가장 원초적인 반응이 먹을거리 불안 심리다. 가공육 발암물질 논란이나 화학조미료·식품첨가물·유전자변형식품(GMO) 등에 대한 무조건적인 불신도 그런 현상이다. 일부 종교 신자들의 수혈 거부에도 내 몸 안에 외부 물질이 들어와 나를 다른 존재로 바꿔 버릴지 모른다는 거부감이 투영돼 있다. 새로운 물질·기계·기술에 대한 공포는 산업혁명 이후 인류 DNA에 깊이 각인됐다. 19세기 초 영국 직물 공업 지대에서 벌어진 러다이트(기계 파괴) 운동은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겼다는 반감과 기술 문명에 대한 공포가 더해져 파괴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현대판 러다이트 운동’에 숨은 공포
원시공동체 향수가 환경교조주의 낳아

영국의 여류 작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년)’은 문명 발전에 비해 인간의 의식이 지체된 데서 비롯된 산물이다. 과학기술 문명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현대의 유나바머와 블랙 해커들은 현대판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부를 만하다.
요즘 로봇이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란 우려도 그 기저심리에선 동일하다. 히피·비건(극단적인 채식주의자)·프리건(극단적인 반소비주의자) 등처럼 생활에서 다양한 문명 거부 행태가 나타난다.
물론 자연은 잘 보존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생존을 위해선 자연의 효율적 이용도 필수적이다. 그러려면 개발만능주의를 지양해야겠지만 환경교조주의자들도 이제는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연을 보존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조건 개발 금지가 아니다.
에드워드 글레이저 하버드대 교수가 ‘도시의 승리’에서 지적했듯이 고밀도 도심 개발로 도시를 더욱 집적화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환경보호라는 역설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자연을 사랑한다면 자연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환경론자들의 바이블인 ‘월든’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2년여 동안 자급자족하며 전원생활을 예찬한 것이다. 문명을 멀리하는 생활은 현대인의 로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너도나도 소로처럼 살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될까. 세상의 어떤 숲과 호수도 파괴와 오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에겐 타당해도 전체에는 최악이 되고 마는 소위 ‘구성의 오류(부분적 성립의 원리를 전체적 성립으로 확대 추론함에 따라 발생하는 오류)’다. 더구나 소로는 월든으로 가기 직전 1844년 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강변에서 순전히 부주의로 숲 121만㎡를 잿더미로 만든 장본인이다.

오형규 한국경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Vitamin’ 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