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새로운 자신을 만나고 비춰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느린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라오스 루앙프라방, 인도네시아 발리, 일본 오키나와 고하마지마, 필리핀 바타네스 등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마음을 만날 수 있는 여행지를 소개한다.

라오스
욕망이 멈추는 곳, 루앙프라방
[Big story] 그곳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루앙프라방에서의 시간은 사람이 걷는 속도로 천천히 흘러간다. 여행자들은 최대한 게을러지기 위해,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루앙프라방에 며칠 머물다 보면 모든 욕망은 덧없어진다. 그래서 어떤 여행자들은 당초 계획보다 라오스에 더 머물고, 어떤 여행자들은 서둘러 라오스를 떠난다.

라오스 북부에 자리한 루앙프라방은 프랑스 식민지 풍의 건물과 라오스 전통 양식의 집, 수많은 사원들이 어울린 작은 도시다. 거리는 승려와 아이들, 어슬렁대는 배낭여행자들로 한가롭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자유로움과 순진함, 종교적인 경건함으로 가득 차 있는 도시가 바로 루앙프라방이다. 유네스코는 1995년 루앙프라방 지역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
라오스는 불교 국가다. 라오스 전체 인구의 95%가 불교도다. 루앙프라방을 걷다 보면 한쪽 어깨를 내놓은 채 주홍색 장삼을 입고 다니는 소년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승려는 아니고 수행자(노비스)다. 일종의 견습 승려인 셈인데 라오스 남자들은 과거에는 의무적으로 3개월에서 1년 동안 사원에 들어가 수행했다고 한다.

루앙프라방에는 약 50여 개의 주요한 사원이 있는데, 이 가운데서도 씨엥통 사원(왓 씨엥통)이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사원으로 꼽힌다. 주요 건물이 라오스 전통 양식으로 건축돼 있는데 세 겹의 지붕이 지면 가까이까지 내려온 것이 특징이다. ‘황금 도시의 사원’이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 크고 작은 사원 건물 내외부에는 화려한 황금 장식과 각종 보석 장식이 새겨져 있다.

루앙프라방에서 가장 큰 볼거리는 탁밧이다. 우리말로 ‘탁발’이라는 스님들의 아침 공양의식인데 루앙프라방을 찾는 여행자들이 이를 보기 위해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 오직 루앙프라방에서만 볼 수 있다. 루앙프라방에 자리한 사원의 승려들 수백 명이 마을을 돌며 아침거리를 공양하는데 장엄한 이 행렬은 보는 이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탁밧은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춰 사원에서 탁밧을 알리는 북이 울리며 시작된다. 대략 새벽 6시쯤이다. 이 시간이면 골목마다 사람들(주로 여자)이 자리를 깔고 무릎을 꿇은 채 스님들을 기다린다. 예전에는 이 탁밧에 루앙프라방 현지인들만 참여했지만 널리 알려지면서 여행자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탁밧 행렬이 시작되는 지점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외국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가까운 태국에서 온 관광객들과 금발의 서양 관광객들도 많이 볼 수 있다. 최근에는 탁밧 체험을 해볼 수 있는 패키지 여행 상품도 나와 있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참여해볼 수 있다.

탁밧 체험은 독특한 심적 체험을 제공한다. 해 뜰 무렵, 길 저편에서 붉은 가사를 입은 맨발의 스님들이 바리때를 메고 천천히 걸어온다. 그들이 읊조리는 독경소리가 거리에 낮게 울려 퍼진다. 탁밧 행렬에는 300~500명의 승려들이 참여한다. 루앙프라방에는 사원만 80개이고, 스님은 1000여 명이 있으니 이 지역 스님 절반 정도가 탁밧에 참여하는 셈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승려들이 앞장서고 서열에 따라 승려들이 한 줄로 서서 큰 스님의 뒤를 따르는 풍경은 보는 이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들의 행렬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마음이 숙연해지고 가슴 한편에서 잔잔한 파문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준비해 온 찰밥(카오니아오)을 조금씩 떼어 스님들에게 공양한다. 이 찰밥과 음식을 준비하고 몸을 정갈하게 하려면 새벽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다고 하니 루앙프라방 사람들이 얼마나 깊은 불심을 간직하고 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탁밧 행렬을 끝낸 스님들은 각자의 사원으로 돌아가 공양을 시작한다. 바리때에 담긴 음식을 다 풀어 놓고 함께 나눠 먹는다. 물론 여행자들도 이들 스님의 아침 식사 자리에 함께할 수 있다.

루앙프라방에서 사원은 학교로서의 역할도 겸한다. 수많은 노비스들이 사원에서 공부를 한다. 영어, 수학, 공학 등을 배운다. 여행자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일종의 템플스테이인데, 불교에 대해 공부하고 명상 수련을 할 수도 있다. 각종 비정부기구(NGO) 단체와 연계한 봉사와 기부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는데 이들 단체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의미 있는 휴가를 보내는 한 방법일 듯. 현지 NGO인 아동문화센터(CCC)는 오지의 초등학교에 연필, 공책, 칫솔 등 학용품과 간단한 생활용품을 보내는 일을 한다. 라오스에 가기 전 신지 않는 구두나 사용하지 않는 학용품 등을 가져가 기부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루앙프라방을 여행하다 보면 ‘스테이 어너더 데이’라고 쓰인 스티커를 볼 수 있다. 이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크고 작은 공동체와 가게들이 연계해서 벌이는 캠페인(www.stayanotherday.org)으로, ‘스테이 어너더 데이’ 간판이 붙어 있는 곳에서 파는 제품을 사면 수익금의 일부가 공동체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 판매하는 제품은 라오스 사람들이 땀과 정성으로 만든 순수 ‘메이드 인 라오스’다.

식민지 시대에 한 프랑스인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베트남 사람들은 벼를 심고, 캄보디아 사람들은 벼가 자라는 것을 보며, 라오스 사람들은 벼가 익는 소리를 듣는다.” 이들 프로그램에 참여하다 보면 이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꼭 탁밧 체험이 아니더라도 루앙프라방은 머무는 것 자체가 명상이고 힐링인 곳이다. 씨엥통 사원에서 조마 베이커리까지 약 2km에 이르는 왕복 2차선 도로가 여행자 거리인데, 게스트 하우스와 카페, 레스토랑이 길 양편으로 늘어서 있다. 여행자들은 아침 늦게 일어나 이 거리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 자전거를 빌려 동네 여기저기를 쏘다닌다. 그러다 지치면 카페에 들어가 워터멜론 셰이크를 마시며 친구들에게 엽서를 쓴다. 저녁이면 메콩 강의 노을 속에 앉아 여행자들과 어울려 맥주를 마신다. 시간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내버려두는 일. 루앙프라방은 여행과 휴식이 같다고 믿는 이들에게 최적의 장소인지도 모른다.


인도네시아
사람·신·예술이 어울려 빚어낸 요가의 섬, 발리
[Big story] 그곳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라는 영화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뉴요커의 삶이 의미 없이 느껴지기 시작한 주인공 ‘리즈’는 ‘나는 도대체 누구지’, ‘난 왜 이렇게 살고 있지’와 같은 원초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되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이탈리아, 인도, 발리를 떠돌다 마침내 발리 내륙에 위치한 ‘우붓’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에게는 서핑과 일광욕, 코코넛 나무가 늘어선 해변이 발리의 전부로 알려져 있지만, 이곳 우붓에는 리즈처럼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신비로운 체험이 기다리고 있다. 인도네시아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빌라에서 요가를 하고 유기농 음식과 마사지로 몸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요가 리트리트(Yoga retreat)’가 바로 그것이다. 발리는 자연 속에서 요가를 수련할 수 있는 ‘에코 빌리지’가 많아 전 세계에서 요기(남자 수련자)와 요기니(여자 수련자)가 몰려드는 곳이다.

대표적인 곳이 요가 반. 우붓 시내 끝자락에 자리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가 수련 센터다. 발리에서 요가를 가르치는 강사 상당수가 이곳 출신이다. 하루에 보통 15개 정도의 클래스가 진행되는데, 숙련 상태를 감안해 원하는 시간에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창구(Canggu) 지역에 위치한 데사 서니는 유기농 음식을 먹으며 요가를 수련할 수 있는 스튜디오다. 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스파와 피부에 좋은 소금이 뿌려진 풀장을 갖추고 있다. 스미냑(Seminyak)에 있는 지와 요가에서는 90분간 극한의 요가 체험을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통 ‘핫 요가’라고 부르는 ‘비크람(Bikram) 요가’를 전문적으로 배우는 스튜디오다. 강도 높은 수련을 원하는 요가 강사들이 전 세계에서 모인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는 데 반해 발리인의 90% 이상이 힌두교를 믿고 있어 각 가정과 섬 곳곳에서 수많은 사원을 볼 수 있다. ‘신들의 섬’이라는 발리의 애칭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발리를 걷다 보면 발길 닿는 곳마다 신을 만난다. 우리나라의 도깨비와 비슷하게 생긴 바롱신도 있고, 독수리처럼 생긴 가루다신 조형물도 볼 수 있다. 발리 거리를 걷다 보면 집이나 가게 앞, 사당 등에 야자수와 과일, 꽃으로 치장한 바구니가 놓인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짜낭’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다. 짜낭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발리인들도 자주 볼 수 있다.

발리에서 딱히 할 일은 없다. 며칠을 보내다 보면 자기 안의 무언가가 뭉클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정확히 묘사할 수는 없지만, 눈부신 햇살 앞에서 ‘없어도 되는 것들을 부여잡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버리려 했던 것들이 사실은 내게 소중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 그곳이 바로 발리다.


일본
이 바다 앞에선 ‘난쿠루 나이사’, 오키나와 고하마지마
[Big story] 그곳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서울에서 비행기로 4시간. 그리고 드디어 해변에 도착한다. 무겁고 두터운 코트를 벗어던지고 반바지에 티셔츠로 갈아입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엄청 고무돼 있다. 왜냐하면 여기는 오키나와니까. 세상에서 가장 맑고 투명한 물빛을 볼 수 있는 곳이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키나와로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대부분은 오키나와의 본섬인 나하로 간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오키나와에 딸린 작은 섬들을 찾는다. 고하마지마는 세상과 동떨어진 것 같은 작은 섬이다.

이시가키공항에 내려 페리를 타고 다시 10여 분 가면 고하마지마에 닿는다. 이 섬에는 이루마레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작은 해변이 있다.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가진 해변이다. 밤이면 눈부신 은하수가 어두운 하늘을 가로지르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스쿠버다이빙 명소로도 유명하다. 다이빙을 즐기다 뱃전으로 올라와 뱃머리에 드러누우면 눈에 들어오는 푸른 하늘. 솜뭉치처럼 떠 있는 뭉게구름을 보며 여행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벌러덩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계가 그렇게 복잡하고 바쁠 이유도, 또 할 일이 그렇게 많을 까닭도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필리핀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건 무엇일까, 바타네스
[Big story] 그곳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바타네스라는 곳이 있다. 필리핀 최북단, 루손 섬과 대만 사이에 위치한 1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제도다. 강한 태풍이 자주 지나가 ‘태풍의 섬’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섬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필리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낙천적이라고 하는데, 바타네스 사람들은 필리핀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낙천적인 사람들 같다. 섬에는 1만8000명 정도가 살아가는데, 2000년대 초반까지 자급자족을 했다고 한다.

여행을 하다 보면 한 마을이 완벽한 한 세계를 이루는 곳을 만나게 된다. 더 이상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오직 선의로만 가득한 그런 곳. 바타네스도 그런 곳이다. 세상 사람 가운데 “바타네스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 손들어봐” 해서 1만8000명만 뽑아 모아놓은 것 같은, 그런 섬.

그렇게 바타네스에서 지내다 마닐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동차나 양복 혹은 구두를 사는 일 따위로 피곤했던 적이 많았다는 사실. 인생에는 훨씬 중요한 일이 많은데, 가령, 북태평양을 질리도록 바라보는 일 같은, 그런 일에 소홀했다는 사실. 바타네스에서 당신은 가만히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하고 머리를 텅 비울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