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당 월세 4만원…젊은 예술가들 모여든다
회색빛 낮은 건물들 사이로 쉴 새 없이 쇳소리가 들려온다. 좁은 골목길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철제 공장마다 검은 작업복을 걸친 직원들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용접 작업에 한창이다. 30년도 넘게 기름밥을 먹으며 이곳에 뿌리 내린 소상공인들이다. 공장 지대였던 이곳에 터를 잡고 식당과 가게 등을 꾸리며 살아온 주민들도 적지 않다.건물 2층으로 올라가면 예상치 못한 공간이 펼쳐진다. 철제 구조물이나 버려진 목재가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좁은 계단을 따라가다 보면 덩그러니 빈방 안에서 조소나 회화 작품에 열중하고 있는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이곳으로 흘러들어와 그저 철공소뿐이었던 공장 지대에 예술의 기운을 불어넣은, 새로운 주민들이다.
오랜 공업지대였던 영등포 문래동에 ‘철공소와 예술 공방’의 만남이 이뤄지고 있다. ◆철공소에 숨어든 200여 명 예술가
사람들은 예술과 문화를 따라 모여든다. 그 사람들을 따라 돈이 흐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머무르는 곳을 따라가다 보면 ‘뜨는 상권’이 보인다. 요즘 젊은 예술가들이 새롭게 선택한 곳은 영등포의 ‘문래동 창작촌’이다.
영등포의 오랜 공장 지대였던 문래동은 1960년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영등포구 일대가 산업단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후 철공소와 철강 자재 점포가 하나둘 들어서고 기존 주택들도 공장과 점포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철공 단지’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곳 철공소들은 용접에서부터 셔링(시트를 만들기 위해 코일을 풀어나가며 커팅해 일정한 가로세로 크기의 판을 만드는 작업)까지 철제의 절단 및 가공과 관련한 모든 작업을 소화하고 있다. 일상적으로 철공소 작업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보니 늘 매캐한 냄새와 분진이 가득 차 있는 동네다. 이 때문에 최근까지 이곳 문래동 창작촌은 외지인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 공간이나 마찬가지였다. 문래동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다. 철강 산업이 쇠퇴기에 진입하면서 문을 닫는 철공소가 늘어났고 빈 공장이 넘쳤다. 그에 따라 임대료는 하락했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이 빈 공장을 창작 공간으로 재활용하기 시작했다. 폐공장과 창고가 예술적 건물로 변모하기 시작하니 외지인의 발길도 하나둘 늘었다. 문래동이 ‘문래동 창작촌’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2010년 무렵부터다. 서울문화재단에서 창작예술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문래예술공장’이 문을 열며 현대예술 작가들이 모여들어 본격적으로 창작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문래동 창작촌은 현재 100여 개의 작업실에서 250여 명의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스산한 분위기’까지 느껴지게 만드는 이 동네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단순하다. 먼저 낮은 임대료다. 문래동으로 모여드는 예술가들은 홍대에서부터 이주해 온 이들이 대부분이다. 홍대 상권이 커지면서 치솟은 임대료에 등 떠밀린 예술가들은 변방으로 밀리다 못해 최근에는 아예 홍대 주변을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는 추세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크게 두 지역이다. 성동구 성수동과 바로 이곳 영등포구 문래동이다. 특히 이곳 문래동은 예술가들이 작업실을 얻기 위한 월세가 매우 낮다. 철공소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이곳의 생활환경은 열악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열악한 환경 때문에 1층엔 철공소가 성업 중이지만 2층은 대부분이 비어 있는 공간으로 방치된 곳이 많았다. 이곳 임대료가 3.3㎡(1평)에 4만 원 안팎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성수동 폐공장을 활용한 작업실이 33㎡(10평)를 기준으로 50만~60만 원에 형성돼 있는 것과 비교하면 문래동이 성수동보다 조금 더 낮은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문래동은 서울 시내 몇 안 되는 ‘비빌 언덕’이나 마찬가지다. 젊은 예술가들에게 문래동의 ‘소음과 분진이 넘치는 열악한 생활 환경’은 낮은 임대료 외에도 또 하나의 매력 요소를 만들어 준다. 바로 자유로운 작업 환경이다. 늘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자욱한 먼지가 끊이지 않는 문래동에서는 철공소 사이사이 숨어든 젊은 예술가들이 빈 공간에서 ‘어떤 소음’을 일으키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빈 공간에서 벽을 뜯어내고 그림을 그리든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출해 내든지 문래동에서는 모두 허용되는 것이다.
작품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소음이나 쓰레기 배출’ 등의 문제로 이웃 주민들로부터 여러 차례 민원을 받고 갈등을 겪어 왔던 예술 작가들로서는 이보다 더 최적화된 작업 환경이 없다. 문래동 창작촌에 유독 조각이나 시각 미술을 하는 작가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는 이유다.
철공소와 예술 공방이 ‘공생’을 시작하며 이 동네의 풍경 또한 달라지고 있다. 공장 지대의 거친 특성과 예술 작가들의 대범하고 자유로운 기질이 더해져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 낸 것이다. 쇳소리 가득한 회색빛 골목을 거닐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벽화를 만나곤 한다. 철공소 위층에는 목재를 다듬고 도자기를 만드는 공방이 있다. 이들 공방은 대부분이 간판조차 내걸지 않는 곳이 많다. 간판이 걸려 있더라도 조그마한 크기로 눈에 띄지 않게 숨겨 놓은 곳들이 대부분이다. 마치 보물찾기 하듯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다. 지금의 문래동은 제철 장인과 예술 작가 모두의 ‘생계 터전’이다. 이 독특한 풍경을 담아내기 위해 이곳을 찾는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늘어나면서 문래동 창작촌은 최근 사진 출사지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고 있다. 그러니 이곳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상권은 아니다.
최근 들어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외지인이 늘면서 카페나 음식점 같은 상업 시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한 단계다. 문래동 창작촌을 거닐다 보면 곳곳에 ‘초상권을 존중하는 매너 있는 촬영 문화를 만들어 주세요’와 같은 문구가 붙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외지인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철공소의 제철 장인들이 작업에 방해를 받는 경우가 늘어난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철공소와 예술 작가들이 함께 고민한 결과 감각 있는 간판에 이와 같은 안내 문구를 내걸었던 것이 지금은 이곳 문래동 창작촌의 또 다른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평일엔 근처의 직장인들이 찾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주말에 데이트 나온 젊은 연인이나 관광객이다. 문래동에서 운영 중인 수제 함박스테이크 가게인 칸칸엔인연 관계자는 “근방 에이스테크노타워·에이스하이테크시티 등 지식산업센터가 있어 평일 점심때 음식점이나 카페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이 직장인”이라고 설명했다. 북 브런치 카페 ‘치포리’는 “평일과 주말의 고객 구성이 매우 다르다”며 “주말에는 창작촌의 이색적 분위기를 느끼러 온 관광객이 많다”고 밝혔다. 문래동 창작촌에 자리 잡은 지 4년 차인 ‘골드테구 가죽공방’ 정찬구 대표는 “다양한 연령대가 문래동 창작촌을 찾는 편”이라며 “최근 젊은 층 유입이 많아지면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나 인터넷에 홍보가 되는 것 같다”고 답했다.
◆이질적 풍경, 출사지로 인기
이처럼 문래동의 변화된 모습이 SNS를 통해 화제가 되고 매스컴을 타면서 이 지역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 문래동 창작촌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2년 전과 맞물려 서울시가 문래동 일대를 도시환경 정비구역으로 지정한 것 또한 투자 열기에 불을 붙였다. 서울시는 2013년 7월 준공업지역을 새로운 지역 거점으로 만들기 위해 ‘도시환경 정비 계획 추진 및 정비구역 지정계획’을 고시했다. 부동산 월드 공인중개사무소에 따르면 2014년 3.3㎡당 1300만~1500만 원 했던 매매가가 현재는 1300만~2000만 원 이상 호가한다.
임대료 역시 소폭 상승했다. 도로 주변에 있는 건물은 2013년 3.3㎡당 3만 원 했던 월세가 2015년 현재 4만~5만 원이다. 인도 주변은 2013년 3.3㎡당 월세가 2만~3만 원이었다면 2015년 4만 원으로 올랐다. 보증금은 통상 월세에 10개월을 곱한 금액이다. 권리금은 이 지역 대부분이 창고나 공장이었기 때문이 없는 곳이 많다. 가격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16.5㎡(5평) 정도의 작업실을 구하는 데 20만 원 안팎이면 충분하다. 문래동 창작촌에서 살짝 벗어난 문래사거리 골목은 월세가 조금 더 낮다. 이곳에 자리한 82.5㎡(25평 매장)는 2014년 월세 60만 원, 보증금 600만 원, 권리금 7500만 원이었다. 하지만 1년 새 월세 80만 원, 보증금 1000만 원까지 올랐다. 권리금은 미정이다. 3.3㎡(1평) 당 월세로치자면 3만~4만 원 정도다. 문래동 창작촌에서 만난 한 예술가는 “창작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임대료는 더 싸진다”며 “대부분이 철공소 2층에 자리해 작업실 면적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월세 부담이 다른 곳과 비교해 매우 적은 편”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월드 공인중개사무소 박재욱 대표는 “2013년 초까지만 해도 젊은 예술가들이 들어갈 빈방이 넘쳤다”며 “그런데 지금은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매매도, 임대도 매물이 없어 거래를 못 한다”고 전했다.
예전에는 예술 작가들이 작업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을 많이 찾았다면 최근에는 카페나 음식점 등 상업 시설을 운영하기 위한 문의가 늘고 있다는 것도 차이다. 박 대표는 “임대료가 워낙 낮았기 때문에 1~2년 새 월세가 올랐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상당히 낮은 편”이라며 “아직까지 상승 폭이 크지 않지만 당분간은 오름세가 계속될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칸칸에인연’ 관계자는 “문래사거리 중심으로 대로변과 근처 골목길에 상업 점포가 들어서고 있다”면서 “아직은 한산한 편이지만 곧 상권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문래동 창작촌이 예술가들의 근거지를 기본으로 성장한 ‘제2의 홍대 상권’이 될 수 있을지는 조금 더 지켜 볼 일이다. 안민석 FR인베스트먼트 연구원은 “상권의 특수성이 워낙 강한데다 골목을 중심으로 확장성이 크기 때문에 향후 상권이 성장할 여지는 매우 크다”며 “하지만 홍대 상권처럼 성장하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오래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에 예술적인 감성이 강해진다면 ‘꾸준한 성장’을 기대할 수 있지만 상권의 특성상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기에는 한계점 또한 뚜렷한 만큼 ‘급속도로 성장할’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다. 기본적으로 홍대는 주거지를 바탕으로 한 상권이었다. 이에 비해 문래동은 공장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공소라는 생계 수단을 기본적인 성격으로 깔고 있는 지역인 만큼 많은 소비자들을 불러들여 그에 따른 불편을 해소하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더욱이 이제 막 이곳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예술 작가들조차 문래동 창작촌이 빠르게 상업화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취재 중 만난 한 중견작가는 “이곳에 있는 작가들은 최근 2~3년 새 몰려온 이들도 많지만 5~7년 전부터 터 잡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며 “싼 임대료를 찾아 이곳으로 왔는데 최근 이곳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되는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빈곤 지역의 임대료 시세가 오르면서 지금까지 살고 있던 사람들, 특히 예술가들이 다른 지역으로 쫓겨 가는 현상을 말한다. 그는 “이곳 건물주들은 대부분이 공장을 운영하고 있어 임대료에는 관심이 없는 이들이 많다”며 “1~2년 사이에 부쩍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 같아 걱정하는 작가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예술적 감성이 더해져 문래동 창작촌의 가치가 재평가 받고 상권이 형성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그 속도가 지나치게 급속도로 진행되는 것을 경계하는 이유다.
선종필 상가뉴스레이다 대표는 “문화적 성격을 바탕으로 성장한 상권은 그 문화적 감수성을 잃게 되면 상권으로서의 힘도 잃게 될 때가 많다”고 지적한다. 문래동 창작촌은 제철 공장과 예술 작가가 함께 머무르는 공간이기 때문에 홍대나 성수동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새로운 상권으로 힘을 갖고 있는 지역이다. 이 때문에 상권이 빠르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철공소들이 다른 지역으로 밀려난다면 그것 또한 문래동 창작촌 상권이 성장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 대표는 “철공소와 예술 공방이 같이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문래동 상권의 성장을 좌우하는 핵심 키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돋보기-철공소 2세와 작가 만남 잇따라
철공소와 예술 작가들이 공존하고 있는 문래동 창작촌에는 ‘이질적인 두 산업’이 함께 성장하기 위한 노력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올해 4월 문래 소공인 특화지원센터와 예술인복지센터는 ‘예술인 파견 사업’을 진행했다. 해당 프로젝트에서 예술가와 철공소 경영 2세는 오랜 시간 축적된 철강 기술로 아이디어 상품을 함께 개발했다. 최두수 작가는 송호철 작가, 정동구 영상감독, ‘재연정밀’ 안성모 팀장, ‘경성기계’ 김성회 팀장과 ‘팽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최 작가 팀은 철강 기술을 활용해 한국 전통문화와 시각미가 담긴 디자인 팽이를 제작했다. 최 작가는 “문래동 철공소는 오래된 만큼 높은 기술력을 지니고 있다”면서 “섬세한 디자인 팽이로 이러한 기술력을 녹여냈다”고 설명했다. 최 작가 팀이 제작한 총 20종의 디자인 팽이는 지난 9월 소공인 경진대회에 출품됐다. 12월에는 5종을 새로 만들어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에 참가한다. 최 작가는 “철강 기술로 단순 부품뿐만 아니라 하나의 멋진 완제품 제작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디자인 팽이는 철강 기술의 새로운 가능성”이라고 답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강여름·이지연 인턴기자 ㅣ 사진 김기남·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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