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제분, 사모 펀드 손으로
한국제분 매각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 중이다. 한국제분이 시장에 나온 지 사흘 만에 우선협상대상자가 선정됐다. 사모 펀드(PEF) 운용사 JKL파트너스다.
매각 주간사인 EY한영회계법인은 지난 12월 1일 예비 입찰을 실시하고 4일 우선협상자로 JKL파트너스를 선정했다. 대개 인수·합병(M&A) 시 예비 입찰 후 본입찰을 거쳐 우선협상자를 선정하는 데 4~6주의 시간이 소요되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속도다.
매각이 완료되면 한국제분 경영권은 JKL파트너스로 넘어간다. JKL파트너스는 올해 초 하림그룹과 손잡고 국내 최대 벌크선사인 팬오션을 1조80억 원에 인수한 PEF 운용사다.
EY한영 관계자는 “동아원그룹 오너가 한국제분 경영권을 내놓고 전사적인 재무구조 개선에 나섰다”며 “한국제분 매각이 마무리되면 그룹의 유동성 위기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큰불은 막았지만 이미 동아원그룹은 해체 수순에 접어든 상태다. 2014년 부채비율이 789%에 달하는 등 유동성 위기에 빠지자 동아원그룹은 올 초부터 비주력 계열사 및 자산 매각을 통해 재무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동아원그룹 총부채는 6445억 원으로 매출액(6469억 원)에 버금간다. 한 해 전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영업 손실은 175억 원, 순손실도 776억 원에 달했다.
금융감독원은 2014년 그룹의 감사 보고서를 분석하고 ‘계속기업 존속 불확실성’ 판정을 내리기도 했다. 이는 기업이 매출 부진 등으로 계속 존속하는 데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상장폐지될 위험이 있다는 뜻이다. 또한 동아원그룹의 전체 차입금 3111억 원 가운데 1년 이내 만기가 도래하는 금액이 2133억 원에 달해 상환 압박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위기에 내몰린 이 회장은 작년 12월 패션 사업(이탈리아 패션 의류 계열사 모다리슨)을 필두로 수입차·와인·외식업 등 비주력 계열사 및 자산 매각에 나섰다. 올해만 총 7건의 매각을 완료하며 동아원그룹은 2000억 원의 자금을 만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금융회사 상환용으로 쓰여 유동성 위기를 막지 못했다. 이 회장이 경영권을 포함한 대규모 유상증자를 계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동아원그룹은 2007년 설립한 마세라티·페라리 판매사 포르자모터스코리아(FMK)를 올해 6월 사돈 기업인 효성에 200억 원에 매각했다. 이 회장의 3녀와 조현준 효성 사장이 결혼하면서 동아원과 효성은 사돈 관계를 맺었다. 2013년 호텔신라로부터 인수한 외식업 계열사 탑클라우드 코퍼레이션(TCC)은 지난 11월 영업양도 방식으로 120억 원에 매각했다. TCC 소유 와인문화공간 포도플라자 건물(강남구 신사동) 역시 150억 원에 팔았다. 포도플라자의 새로운 주인은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가족들이다. 부인 김영식 씨가 40%, 두 딸(연경·연수)이 30%씩의 지분을 TCC로부터 매입했다. 8월에는 LG상사가 나서 동아원그룹의 유류 및 화공약품 보관·운송 업체인 당진탱크터미널을 306억 원에 인수했다.
캄보디아 사료 계열사인 코도피드밀(매각가 68억 원)은 CJ제일제당에, 와인 수입사인 나라셀라의 지분 80%를 250억 원에 매각했다. 계열사 대산물산 소유 운산빌딩(강남구 논현동)을 역시 392억 원에 팔았다.
이 밖에 동아원그룹은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 있는 시가 1500억 원 규모의 와이너리 다나 에스테이트를 비롯해 단하유통(작년 기준 자산 83억 원, 매출 176억 원), 해가온(자산 33억 원, 매출 49억 원), 기타 부동산 자산 등의 매각을 추진 중이다.
첫째, 동아원그룹은 본업인 제분 사업과 다소 연관성이 떨어지는 신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해 왔다. 2000년대 후반부터 수천억 원을 들여 공격적으로 확장해 온 동아원그룹의 신사업은 대개 수입차·와인·외식·패션 관련 분야다. ‘페라리를 타는 와인 마니아’로 유명한 이 회장의 취미와 관심이 반영됐다고 여겨지는 사업들이다. 하지만 의욕과 달리 수익을 내지 못한 신사업들은 결국 빚을 떠안은 채 그룹의 ‘짐’이 되고 말았다. 최근 매각 완료 리스트에 오른 대부분의 회사들이 여기에 속한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사업 간 시너지를 내기가 쉽지 않은 이종 산업에 진출하면서 안정적인 수익을 내온 제분업까지 위기를 맞게 돼 그룹 전체의 위기가 온 것”고 지적했다.
‘콜옵션’ 넣어 정상화 후 되살 수도
둘째는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동아원’의 재무구조가 악화됐다는 점이다. 동아원그룹은 사업 다각화를 벌이는 과정에서 동아원을 통해 자회사에 대한 지분 투자 소요 자금을 차입금으로 조달했다. 2008년 이후 코도(해외 와인 사업, 190억 원), 당진탱크터미널(180억 원), 중국·캄보디아의 사료 자회사(150억 원), 코지드(해외 농산물 자원 개발, 70억 원) 등 자회사에 대한 지분 투자가 지속됐다.
또한 지주사인 한국제분의 어음과 차입금, 사모 사채, 전환상환우선주(RCPS) 등에 상당 금액을 동아원이 지급보증하고 있다. 이는 결국 동아원의 재무구조를 악화시켰다. 동아원이 무너지면 그룹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그룹으로서는 서둘러 구조조정에 나선 것 역시 그룹 보호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제분 증자를 통한 매각이 완료되면 경영권은 인수자에게 넘어가지만 이 회장에게 회생의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매각을 통해 한국제분의 자본을 확충하고 동아원그룹을 살린 뒤 재무적 투자자(FI)와 공동경영 체제로 운영, 안정화되면 ‘콜옵션’ 등의 거래 조건을 삽입해 경영권을 되찾을 수도 있다. 금호그룹 등 유동성 위기에 처한 대기업들이 FI를 통해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 추후 경영권을 다시 가져오는 방식을 자주 보여 왔다는 점에서 동아원그룹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구조를 짤 가능성이 높다.
PE 업계 관계자도 “한국제분 투자는 FI를 통한 자본 유치여서 유상증자로 50% 이상의 지분을 팔더라도 오너 일가는 향후 경영권을 다시 가져올 수 있는 그림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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