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이 아닌 '생태'로…겸손해진 인간
1962년 한 권의 책이 조용히 세상에 나왔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바로 그 책이다. 그러나 그 책이 던진 메시지와 여파는 결코 조용할 수 없었다. 20세기 환경 분야에서 최고의 고전이라고 불리게 된 이 책은 과연 지금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각성하게 한 예언서와 같았다.

무분별한 살충제의 남용으로 파괴되는 야생 생물계의 모습을 파헤친 그녀의 고발은 충격을 줬다. 그리고 이런 충격은 자연스럽게 환경문제에 대한 대중의 사고를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그녀가 이 책을 썼던 시기는 환경문제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때였다는 점에서 이 책의 영향력이 훗날 얼마나 엄청난 파급효과를 이끌어 냈는지 주목해야 한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봄의 침묵’에 대한 인간의 반성적 성찰이다. 봄은 깊은 잠에 빠진 동물들이 동면에서 깨어나 활발히 움직이고 눈과 추위에 웅크렸던 싹들이 본디 모습을 보여주는 때다. 겨울은 침묵이었다면 봄은 거대한 합창이다. 그것은 자연이 선사하는 교향곡이다.

세상을 깨운 고전 ‘침묵의 봄’

그런데 봄이 침묵에 빠졌다. 그것은 봄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왜 봄은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환경의 중요한 고리가 파괴됐기 때문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깨뜨려진 자연’은 더 이상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생태계는 파괴됐고 환경은 재앙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밭의 잡초를 일일이 손으로 제거하는 건 너무나 어렵다. 작물을 가꾸는 것보다 김매는 게 더 힘들 정도다.

그런데 그런 잡초를 너무나 간단히 제거할 수 있다니 누가 외면하겠는가. 그러면 너도나도 제초제를 뿌리게 된다. 그렇게 토양은 죽어가고 그 토양에서 자라난 작물은 우리의 입으로 들어간다. 그런 악순환이다. 벌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마구잡이로 살충제를 뿌려댄다. 그리고 그 폐해의 악순환도 그대로 이어진다. 마침내 숲에서 새가 사라진다. 그래서 봄이 됐는데도 새가 노래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침묵의 봄’이다. 그리고 그 침묵은 결국 생명의 침묵으로 이어질 것이다.

책의 시작이 ‘내일을 위한 우화’라는 소제목인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우화란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첫째는 환경의 문제가 과학의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과 둘째로 우리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방치하면 곧 훨씬 더 심각한 폐해가 돌아올 것이라는 경고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카슨은 기업을 옹호하는 한 남성으로부터 공산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매카시즘이 채 가시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그 비난은 야비했지만 꽤나 심각한 위협일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언론은 엉뚱하게도 결혼하지 않은 이유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여성이 부리는 히스테리가 아니냐는 비난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박사 학위가 없기 때문에 카슨은 전문적 과학자가 아니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나돌았다. 전국해충방제협회는 카슨을 조롱하는 노래까지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거꾸로 이런 시도들은 ‘침묵의 봄’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일종의 ‘역노이즈 마케팅’이 된 셈이다. 기업들의 저항은 극렬했다. 오죽하면 출판사가 보험을 들고서야 책을 낼 수 있었을까. 카슨은 이 책을 통해 극단적 과학주의가 불러온 환경오염의 결과를 낱낱이 폭로했다. 이러한 비난들에 대해 카슨은 일일이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자신의 일에 대한 신념과 과학자로서의 객관성에 대한 확고한 태도 덕분이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일 뿐

카슨은 개인적으로는 병마와 고통 그리고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세상의 불의와 거짓과 탐욕에 맞서 의연하게 싸웠다. 그녀가 이끌어 낸 변화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그 저항과 훼방 또한 더욱 교묘하고 집요하며 강력하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탐욕과 불의를 막지 못하면 끝내 공멸할 것이라는 자각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카슨의 용기와 진실에 대한 신념, 세상과 자연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신뢰다.

그런데 최근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환경에서 생태로 전이하는 문제다. 카슨의 의도와 달리 환경이라는 말 자체는 인간 중심적인 용어다. 한자로 고리 환(環)이라는 것도, 영어의 ‘인바이어런(environ)’ 혹은 ‘서컴(circum)’이란 말도 ‘둘러싸다’라는 뜻이다. 무엇을 둘러싸는가. 바로 인간이다. 그러므로 환경이라는 말 자체는 여전히 중심에 놓인 인간이라는 주체에 종속적으로 존재하는 대상 혹은 객체로 규정된다.

그에 반해 생태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가 아니라 공존하는 각각의 주체로 파악된다. ‘이칼러지(Ecology : 생태)’라는 말의 ‘에코(eco)’는 집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연유한다. 즉 생명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생태는 자연과 분리돼 인간 중심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의 인간, 자연과 공존하는 인간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생태는 유기체가 생존을 유지해 가는 데 미치는 환경이다. 인간도 그 유기체의 한 종일 뿐이다. 따라서 환경보다 생태라는 개념이 더 널리 쓰이고 있다.

2015년 말 파리에서 유엔기후변화협약이 열린 2주일은 지구의 생존이라는 차원에서 역사상 가장 귀중한 시간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각국의 협약이 어떻든 이제는 인류 모두가 절대적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강대국들이 ‘온난화’라는 말 대신 ‘기후변화’라는 말을 요구한 배경을 깨달아야 한다. 온난화는 에너지 낭비국의 책임과 관련될 수 있지만 기후변화라는 말은 자연적 상태라는 의미여서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전히 자연에 대한 인간과 이익 중심이라는 사고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필요한 낭비가 없는 자연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활에 만연한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고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며 비용을 지출할 용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기술 문명 세계관의 연장에서 바라보는 인간 중심의 환경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공존하는 생태의 개념으로 확장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