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어리고 과거 급제도 늦은 이순신의 승승장구 못 참아
삼국지의 '정보'는 끝내 '나이 어린 주유'의 지휘 받아들여
[문화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삼국지] ‘상대적 박탈감’에 굴복한 원균
침팬지는 오이를 즐겨 먹는다. 그들에게 포도는 특식에 속한다. 미국의 한 대학교에서 이런 연구를 한 적이 있다. 똑같은 과제를 시키면서 모든 침팬지에게 오이를 줬다. 오직 한 마리의 침팬지에게만 포도를 줬다.

그러자 이것을 본 다른 모든 침팬지들이 잘 먹던 오이를 일제히 집어던지며 급식을 거부했다. 침팬지도 동일한 상황에서 공정한 보상을 받지 못할 때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소리다.

이런 뿌리 깊은 평등 심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좋은 계약을 성공시켜 회사에 큰 공헌을 한 팀이 있다. 그 팀의 A와 B는 현재 월급 500만원씩 받고 있다. 만일 회사 사장이 이렇게 제안하면 A는 흔쾌히 받아들일까.

“내가 격려 차원에서 월급을 올려주겠네. A 자네는 600만원으로, 공로가 가장 큰 B는 650만으로 올려 주겠네!”

아마도 A는 사장의 제안을 절대로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지 못할 것이다. 기여도에 따라 자율적으로 성과급을 나눠 가지라고 한다면 n분의 1로 나눠 가지려는 게 사람의 심리다. 공헌도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남이 나보다 더 받는 꼴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삶의 만족도를 물어보면 대개는 자신만의 절대적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남들과 ‘비교’해 판단한다.

잘 알려진 충무공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비롯됐다. 1592년 5월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충무공은 전라좌수사, 원균은 경상우수사로 동급의 지휘자였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옥포해전, 7월 사천해전, 8월 한산도대첩에서 조선 수군을 승리로 이끈 특등 공신은 단연 이순신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원균은 충무공과 연명으로 선조에게 장계를 올리려고 시도했다.

아마도 원균은 이순신의 전공을 가로채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이순신과 이름을 나란히 올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강직한 이순신은 이를 거부했고 두 사람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그 휘하에서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극력 반발하며 항명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 원균은 이순신보다 나이도 다섯 살이나 많고 과거 급제 연도도 10년 가까이 일렀다. 한참 후배인 어린 이순신이 자신의 상관이 된 것을 원균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유비, 황건적 토벌 공 세우고도 홀대받아

원균처럼 객관적인 전공이 뚜렷이 차이가 나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연공서열만 앞세우며 군기를 문란하게 하는 다소 뻔뻔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하물며 같은 노력을 했거나 그보다 더 많은 공을 세웠는데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 박한 대우를 받았다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심리가 이런 만큼 논공행상을 포함한 인사관리는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

원균과 비슷한 심보를 가진 사람이 소설 ‘삼국지’에도 나온다. 오나라 손권 막하의 장수 정보가 그런 사람이다. 정보는 손견·손책 형제 때부터 큰 공을 세운 이른바 건국 공신이다. 손책이 죽고 손권이 오나라를 통치하게 되자 정보는 주유와 함께 각각 좌우 도독이 된다.

그러다가 적벽대전을 앞두고 주유가 대도독, 정보는 부도독이 돼 자신보다 한참 어린 주유의 지휘를 받게 되자 정보는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정보는 불만을 품고 군사훈련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병을 핑계로 자신의 아들 정자를 대신 내보내는 등 군기를 문란하게 한다.

“아버지! 주 도독은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고 전략·전술이 뛰어나 충분히 대도독의 자격이 있사옵니다.”

주유의 용병술과 용인술에 감복한 아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정보는 마침내 주유를 찾아가 자신의 경솔한 처신을 사죄하고 주유의 명을 따르겠다고 다짐한다. 이러한 정보의 처신은 끝까지 이순신을 시기하고 모함하다가 칠천량 전투에서 참패해 왜군의 손에 목숨을 잃은 원균의 행태와 대조적이다.

소설 ‘삼국지’의 초반은 황건적의 난이 배경이다. 황건적의 난은 중앙정부에서는 외척과 환관이 발호해 정치가 타락하고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일반 농민들의 땅을 헐값에 사들이거나 강제로 빼앗는 등 농민들이 상대적인 박탈감을 넘어 생존 자체에 위협을 받으면서 들고일어난 것이다.

민란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 없이 무조건 무력 평정하는 것이 과연 옳은 처사였는지 논란이 많다. 어쨌거나 유비 3형제가 처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린 것은 황건적의 난을 토벌하면서부터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승인을 받은 정규군도 아니고 의용군에 불과한 유비 부대의 전공은, 그것이 아무리 크다고 한들 이미 썩을 대로 썩어 기강이 무너진 후한 조정에 의해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비는 황건적 토벌에 빛나는 전과를 올렸지만 외척과 환관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조정에서는 자신들과 안면이 있거나 뇌물을 바친 자들을 우선적으로 챙겼기 때문이다.

유비는 중산부 안희현이라는 작은 고을의 현위가 됐다. 이런저런 줄을 잡고 요로에 청탁해 별군사마 벼슬을 받게 된 손견과 비교하면 더욱 보잘것없는 자리였다.

유·관·장 3형제는 상대적 박탈감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뇌물을 요구한 독우에 대해 사정없이 채찍질을 하는 등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감독관에게 감히 폭력을 가한 사건은 이런 심각한 상대적 박탈감의 표현이었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