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비즈니스=김현기 기자] SK그룹의 전신인 선경직물공장은 일본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1953년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공장을 사들여 재건한 이가 바로 고 최종건 SK그룹 창업 회장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7세. 가진 것이라곤 신의와 성실이 전부였다.
1944년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18세의 나이에 선경직물공장 수습 기사로 입사한 최 창업 회장은 입사 9년 만에 정부로부터 회사를 인수했다.
![[대한민국 신인맥④] SK, 지성과 도전 정신 겸비한 ‘형제 경영’](http://magazine.hankyung.com/magazinedata/images/raw/201602/ce8a274be85a542594bd0fbbc1f4232c.jpg)
하지만 전쟁으로 몸담았던 공장이 파괴되자 직접 복구에 나섰다. 고장나 버린 100여 대의 직기의 부속을 활용해 직기 4대를 재조립했다. 그렇게 출범한 선경직물은 불과 5년 만에 보유 직기 1000대를 돌파했다.
1968년 원사 생산에 도전
수원의 작은 직물 공장에서 출발한 선경직물은 인견사(인조 명주실)를 생산했다. 선경직물의 ‘닭표 인조견’은 당시 사람들이 믿고 사는 품질 보증 마크로 통했고 봉황새 이불감, 곰보 나일론, 크레퐁 등은 장안의 화제를 몰고 온 히트 상품이었다.
1955년 광복 10주년 기념으로 치러진 전국산업박람회에서 선경직물은 영예의 부통령상을 수상했다. 최 창업 회장이 창업 초기부터 한결같이 외쳐 온 ‘품질 제일주의’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당시 수상 업체에 지원된 300만 환의 융자는 훗날 선경직물이 주식회사로 상장하는 데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각종 직물을 개발·생산해 국민 의류 생활 개선에 기여한 선경직물은 1962년 업계 최초로 레이온 태피터를 홍콩에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1969년 국내 최초로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에도 성공, 국내 최고의 원사 생산 기업(현 SK케미칼)으로 거듭났다.
창업 회장의 동생인 고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도 이즈음에 합류했다. 최 선대 회장은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62년 11월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서울대 농화학과를 다니던 그는 1956년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1959년 시카고대 대학원에 진학해 경제학 석사를 마쳤다. 최 선대 회장이 본격적으로 회사에 합류함으로써 선경직물은 불굴의 도전 정신을 지닌 형 최종건과 지력을 갖춘 동생 최종현 형제 경영 체제를 갖추게 됐다.
SK그룹 창업 스토리에 빠질 수 없는 가신들도 이때 등장한다.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은 1965년 12월 최초의 대졸 신입 사원으로 입사했다. 진주고 출신의 그는 서울대 상과대를 나왔다. 대학 동기인 이순석 SK 전 사장의 권유를 받고 입사를 결심했다.
직물만 생산하던 선경직물이 원사를 생산하게 된 것은 1968년이었다. 당시 국내에는 직물 공장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크고 작은 직물 공장이 800여 개 있었다. 원사 공장을 지으려면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다.
하지만 돈만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해외 선진국으로부터 기술을 배워 와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모가 작은 직물 생산업자가 원사 공장을 짓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이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최종건·최종현 형제가 힘을 합쳐 도전한 것이다. 형의 특유한 도전 정신과 시카고대 경제학 석사 출신 동생의 지력이 모였다. 그 무렵에는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국내 외환 대출을 생각해 내 공장 설비를 도입했다.
그 결과 1971년 화학섬유의 본고장인 미국에 폴리에스터 원사를 수출했다. 이에 따라 SK는 직물에서 원사까지 수출하는 종합 섬유 기업으로 성장했다.
최종건 창업 회장은 내친 김에 석유 사업에도 진출하기 위해 도전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1973년 11월 48세의 젊은 나이에 운명을 달리했다. 선경그룹의 후임 총수 자리는 자연스럽게 동생인 최 선대 회장에게로 돌아갔다.
왕성한 활동량을 자랑하던 형과 달리 동생은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회사 내에서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임직원들은 신임 회장의 경영능력에 물음표를 제기했지만 이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최 선대 회장 취임 이후 선경직물은 1976년 사명을 (주)선경(현 SK네트웍스)으로 바꾸고 종합상사로 변모했다. (주)선경은 섬유·합판·플랜트 등 품목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수출해 ‘대한민국 코리아’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72년 설립된 선경석유 역시 같은 해 선경화학(현 SKC)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1978년 선경화학은 국내 최초로 폴리에스터 필름 독자 개발에 성공해 미국·프랑스·영국 등 해외 주요 선진국을 깜짝 놀라게 했다.
![[대한민국 신인맥④] SK, 지성과 도전 정신 겸비한 ‘형제 경영’](http://magazine.hankyung.com//magazinedata/images/raw/201602/4c17cf6d430ea880db3eefe115f8e977.jpg)
SK그룹 일가에는 국가와 사회를 생각하는 SK 특유의 가풍이 있다. 기업은 국가와 사회 기반이 탄탄해야 성장할 수 있다고 보고 국가와 사회 번영을 위해 기업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을 쏟아부었다.
최 선대 회장은 인재 육성을 평생 과제로 삼았다. 미국 유학 시절 학비를 벌기 위해 접시닦이와 골프클럽 청소를 하면서 동양인이 겪어야 했던 불편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는 이런 불편에서 벗어나려면 강인한 국력으로 일류 국가가 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자원과 자본이 없는 이스라엘이 미국 사회에서 무시당하지 않는 이유가 우수 인재에 기반 한 국력에 있듯이 한국도 그런 방법으로 일류 국가가 돼야 한다는 것이 최 선대 회장이 당시 내린 결론이었다.
귀국 후 그는 우수한 두뇌를 발굴, 선진 학문을 배워 국가와 사회에 환원하는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내가 돈을 버는 이유는 인재와 학자군 양성에 있다”며 국내 처음으로 해외 유학을 지원하는 한국고등교육재단을 1974년 11월 설립했다.
재단 설립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500달러로 1년 동안 해외 유학을 하려면 생활비를 포함해 연간 7500달러 정도가 필요한 시절이었다. 재단은 무려 5년 치 경비를 지원했다.
지난 40년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글로벌 금융 위기 등 극심한 국제경제 환경 속에서도 SK는 “경제가 어렵더라도 인재 양성은 계속돼야 한다. 재단은 내가 끝까지 챙긴다”는 선대 회장의 유지를 이어 왔다.
그 결과 하버드대·스탠퍼드대·매사추세츠공과대(MIT) 등 유수의 대학에서 620명의 박사학위자를 배출했고 지금도 200여 명이 해외에서 유학 중이다.
고등교육재단 출신의 석학은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와 정진성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외에 한국인 최초의 하버드대 종신교수인 박홍근 교수, 천명우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 한진용 남가주주립대(UCLA) 경제학과 교수, 이수종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등이 있다.
‘장학퀴즈’ 역시 SK그룹을 대표하는 인재 양성 프로그램이다. 1973년 2월 첫 방송을 시작, 40여 년간 이어지며 방송 횟수 1950회, 출연 학생 1만6000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또 ‘SK장웬방’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수출되기도 했다.
‘장학퀴즈’는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문화 코드이기도 했다. ‘장학퀴즈’ 시작 당시만 해도 고등학생 대상 퀴즈 프로그램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최 선대 회장은 “시청률 조사를 안 해도 된다. 방송에 기업이나 상품 광고가 아닌 ‘패기’와 같은 공익 캠페인을 진행하라”며 진정성에 집중했다.
나눔과 기부 실천하는 최신원 회장
최 창업 회장의 차남이자 최태원 회장의 사촌형인 최신원 SKC 회장도 오랜 기간 나눔과 기부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2003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을지로 최신원’이라고 적힌 거액의 기부금을 전달됐다. 이후 이 여섯 글자가 적힌 기부금 봉투는 5년간 이어졌다.
모금회는 수소문 끝에 봉투의 주인이 최신원 회장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최 회장이 현재까지 모금회를 포함해 자선단체에 기부한 사재는 24억원에 달한다. 현직 기업인 중 개인이 기부한 금액으로는 최고 액수다.
그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신조로 남모르게 기부했지만 요즘에는 더 이상 숨기지 않는다. “누가 기부한다는 게 소문이 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 나눌 수 있다. 더 많이 알려서 기부 문화를 정착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하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2008년 11월 발표한 개인 기부자 명단에 따르면 현직 기업인으로 최고액인 3억3200만원을 기부(6년간)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에 대기업 회장으로 처음으로 가입하게 됐다.
모금 단체를 직접 이끌며 기부 문화 확산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1년 7월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 5대 회장으로 취임한 뒤 2017년까지 모금회장을 연임했다.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한 개인 재산만 24억원에 달한다.
최 회장은 2012년 11월 세계 고액 기부자 모임인 세계공동모금회가 만든 세계리더십위원회의 한국 대표로 위촉됐다. 현재까지 유일한 아시아 국가 위원이다. 세계리더십위원회 위원이 되려면 세계공동모금회에 10만 달러(약 1억2345만원) 이상 기부해야 한다.
또 세계공동모금회 활동에 적극적인 다국적기업 회장급이어야 하고 교육과 소득, 건강 증진 사업뿐만 아니라 고액 기부자 프로그램 확장에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하는 등 가입 조건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둘째 딸 결혼식에서 받은 축의금 전액을 기부해 눈길을 끌었다.
henrykim@hankyung.com
[기사 인덱스]
1.[대한민국 신인맥④]SK그룹 ‘미래 먹거리’를 책임진 바이오·제약·신에너지 부문 리더들
2.[대한민국 신인맥④]최태원 회장의 ‘뚝심 경영’…내수 기업에서 수출 기업으로
3.[대한민국 신인맥④]최태원 회장의 숨은 인맥 ‘브이소사이어티’
4.[대한민국 신인맥④]SK그룹 지배 구조 혁신 실험 ‘수펙스추구협의회’
5.[대한민국 신인맥④]SK하이닉스 임원 15% ‘카이스트’ 출신
6.[대한민국 신인맥④]‘에너지·바이오’에서 미래 금맥 캔다
7.[대한민국 신인맥④]지성과 도전 정신 겸비한 ‘형제 경영’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