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즉흥적 기부 끝이 안 좋다?
기부 문화 확산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은 높지만 번번이 유류분의 굴레를 넘지 못한다. 왜 한국은 미국의 빌 게이츠처럼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때 박수를 쳐주지 못하는 걸까.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기부는 대부분이 ‘즉각적인 현금 기부’다. 해를 거듭할수록 기부에 대한 인식도 변하고 그 양태도 매우 다양해지고 있고 최근에는 현금뿐만 아니라 재산적 가치가 있는 다양한 대체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현물 기부(gift-inkind), 주식 기부, 부동산 기부, 포인트 기부 등 그 종류도 다양하며, 기부 방법도 즉시 기부, 분할 기부, 신탁 기부(유보적 기부), 상속재산 기부, 유산 기부 등 여러 가지다. 하지만 기부자 입장에서는 어떻게 기부해야 할지, 기부를 선택하면 어떤 유익이 있는지, 누구에게 물어봐야 제대로 알려주는지 잘 모르겠고, 기부하는 게 영 쉬워 보이지 않는다. 유산 기부는 통상 이런 복잡한 유형의 기부 자산과 기부 방법들이 다 얽혀 있다.

가족 동의 없는 기부, 뒤탈 가능성 높아
최근에 유산 기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관련한 이슈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유산 기부는 기부자 혼자 결정하기 어려운 매우 복잡한 기부 의사 결정이다. 간혹 단순히 ‘기부하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가족 간에 분쟁이 생겨서 욱하는 마음으로 즉흥적으로 찾아와 유증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유산 기부는 전문가와 충분히 상담하고 사후 재산 분할과 기부 사이에서 법률적, 제도적으로 잘 설계하지 않으면 ‘끝이 좋지 않을 수 있는 복잡한 사후 재산 관리 절차’다.

유산 기부를 결심하는 대부분의 기부자는 처음에는 ‘의미 있는 사회 환원’에 마음이 끌려 상담을 시작하지만 곧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심을 접게 된다.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평소 기부자가 가족들과 충분한 상의를 거쳐 기부를 계획하는 경우는 성공할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 만약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힐 때 기부자가 가족을 설득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전 재산 기부를 강행한다면 공익단체는 가족들의 공공의 적이 되고 나아가 상속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유류분 소송으로 가게 된다.

기부와 유류분에 얽힌 몇몇 특별한 경험이 있다. 우연인지 몰라도 필자가 경험한 모든 유류분반환 청구 소송은 ‘부모자식 간에 내가 받을 유산을 기부했다고 소송한 경우’는 아니다. 유증을 상담하는 과정에서 자녀들과 배우자에게도 유산을 얼마간 남기도록 기부자에게 권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자녀들은 부모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따르고 좋은 방향으로 합의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 환원까지 고려할 심성을 지닌 부모들에게 양육 받은 자녀들은 부모들의 결정을 존중하는 법을 은연중에 배웠을 수도 있다. 문제는 기부자(피상속자)가 복잡한 가족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자녀 없이 홀로 살다가 죽음을 맞는 기부자에게 가정이 있는 형제들이 있는 경우다.
약 15년 전 홀로 살던 기부자가 한 기관에 유산 기부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명을 달리해 고인 재산을 그 공익법인이 상속 받아 처분했던 적이 있다. 고인 생전에 유증 절차에서 가족관계를 다 확인했었고 분명히 유류분청구권 대상자가 없었다.

고인은 자신의 기부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온전히 장학금에 써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듣고 왔는지 고인의 장례식장에 이복형제가 나타난 것이다. 고인에게는 복잡한 가족관계가 있었고 1980년대 국가 호적제도 갱신 과정에 서류 오류를 발견하게 됐다.

고인과 이복형제는 40년 이상 서로 왕래한 적도 없고 서로의 재산 형성에 기여한 바도 없고 그 이후에도 고인을 기려줄 마음이 전혀 없는 ‘남’이었지만 법률적 사실관계를 확인해보니 가족관계가 남아 있었다. 그 이복형제는 이미 장학금으로 기부된 10억 원에 가까운 고인의 재산을 유류분으로 청구해 받았다.
[BIG STORY]즉흥적 기부 끝이 안 좋다?
유류분의 굴레에 기부 의지 실종
한번은 지방대에서 교수로 지내던 분이 있었는데 독신으로 홀로 지내다가 갑자기 암으로 판명돼 제대로 치료도 못 하고 별세했다. 고인의 재산은 수십 년간 고인 곁에서 친가족처럼 돌봐 왔을 뿐 아니라 고인의 병상을 마지막까지 지켜준 사촌누이에게 유산으로 남겨졌다.

이 출가한 사촌누이는 자신의 가정이 유복했고 보다 중요한 곳에 고인의 재산이 쓰이고 고인의 뜻이 기려지기를 바라면서 상속재산의 상당한 부분을 좋은 일에 후원했다. 그런데 고인에게는 이미 20년 전에 가출해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모친이 호적상에 있었고, 그 모친에게는 이복형제가 있었으며 모친은 실종신고도 되지 않은 채 거취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나라는 친가족제도가 강해서 사망신고를 가족만이 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사망하면 법적으로 최근친관계에 있는 친족만이 사망신고를 할 수 있다. 고인이 사망함과 동시에 고인의 이복형제에게는 고인의 사망 사실이 고지됐고, 이 이복형제는 장례식장에 한 번 오지도 않은 채 이미 후원된 돈 중에서 30%를 수령해 갔다.

이렇게 유산을 기부하고자 유언을 남긴 기부자들의 삶은 참 안타깝고 귀했다. 자신은 생전에 어렵게 살았지만 자신의 재산은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을 사후에 전했는데, 말 그대로 고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법적 가족이 유류분이라는 제도 안에서 혜택을 본 것이다.
[BIG STORY]즉흥적 기부 끝이 안 좋다?
원래 유류분은 기부자(피상속자)가 일방적으로 무분별하게 재산을 처분할 때 피해를 보게 된 가족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제도인데 실제 기부와 관련돼 일어나는 사례들은 그렇게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닌 경우가 많다.

물론 기부와 무관하게 가족 간의 재산 분할 갈등이 발생하고, 피상속권자가 치매에 걸려 바른 판단을 할 수 없어 가족 간 분쟁이 생길 때 적용되는 유류분 제도는 유족들의 생존권을 보호하고, 법정상속분의 일정 비율에 상당하는 부분을 보장받도록 일정 정도 보호 기능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기부 문화 확산과 개인 재산의 사회 환원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무조건적인 유류분 제도의 적용은 이와는 다른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유류분 제도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1977년이고 그 법률적 계보는 독일, 스위스, 프랑스 등(대륙법권)에서 찾고 있다. 이 국가들은 사적재산권 보호가 강조되는 국가들이며 기부 문화가 상대적으로 덜 발달된 나라들이다. 한편, 기부 문화가 활성화된 미국이나 영국(영미법권)에서는 유류분 제도가 없다.

어떤 제도이든 사회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 유류분이 도입된 시기는 부모 부양에 대한 책임이 자녀들에게 있었고 가족 간의 의무와 권리가 중요했던 시대였으나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자녀들이 부양하지 않는 노인 부모들의 복지를 국가와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져 가야 하는 고령사회에서 사회 자산 확보를 위해 유류분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능성을 제기할 필요는 없는 것일까.
가족제도의 안정과 자녀들의 재산권은 당연히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자수성가한 기부자가 빌 게이츠처럼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한다고 할 때 자녀들이 축복하고 온 국민이 박수치며 환영하는 그날이 올 수 있을까.

법정 기부에 대한 권리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 유류분 제도가 무조건 옳다고 결론짓기보다는 유언자의 온당한 유증도 수용될 수 있는 유연한 조정 가능성을 만들어 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된다.
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이사·월드비전 기업특별후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