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 스트레스’ 익명 앱에서 자유찾는 직장인들
솔직한 감정 표현 가능해 인기…민감한 내용에 기업들도 ‘긴장’

사장님만 모르는 우리 회사 이야기
감정을 속이고 남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던 직장인들 사이 최근 익명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애플리케이션(앱) 열풍이 불고 있다.

공개 SNS와 달리 자신의 속마음과 감정을 여과 없이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은 왜 자신을 감추는 익명성 속으로 숨어들고 이들이 사용하는 앱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봤다.

7년 차 직장인 조모(33) 씨는 얼마 전 익명 앱 ‘블라인드’에 가입했다. 이 서비스 가입 전 조 씨는 “회사 선후배들은 모두 긍정적이고 회사에 불평불만도 없는 존재들”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최근 블라인드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며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지 못할 뿐 모두 나처럼 불만이 많은 ‘미생’들”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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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에도 울리는 카톡…두통에 우울증까지

최근 많은 직장인들이 ‘카·페·인(카카오톡·페이스북·인스타그램)’ 스트레스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퇴근 후 울려대는 카카오톡 등 모바일 메신저 공해는 물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직장 상사와 거래처 직원의 친구 신청이 들어오는 날이면 하루 종일 ‘수락’ 여부를 두고 고민에 빠진다.

친구 신청을 받자니 본인의 사생활이 노출될 것이 우려되고 거절하자니 상사와 거래처 사람이 섭섭함을 느껴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직장 내 SNS 공해는 국내뿐만은 아니다. 이미 유럽에서는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근무 종료 이후 근로자에게 연락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방안을 마련했거나 추진 중이다. 이른바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이다. ‘연결되지 않을 권리’는 근로자가 퇴근 후 업무와 관련된 전화·e메일·메신저 등을 받지 않을 권리를 의미한다.

하지만 국내 상황은 다르다. “일이 있으면 집에서라도 해야 한다”는 기업 문화 때문에 ‘근무시간과 퇴근 이후’를 명확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온라인과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며 직장인들의 업무는 가정에까지 이어진다.

대기업인 S사 홍보실에 근무하는 이모(38) 팀장은 “퇴근 이후는 물론이고 새벽·주말 할 것 없이 상사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가 날아온다”며 “업무 특성상 민첩한 대응과 확인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 사안이 아닌 일로 ‘카톡’을 보내면 속에서는 욕설이 나온다”고 말했다.

또 서울의 K초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황모(27) 씨는 “카카오톡 프로필이 학부모는 물론 아이들에게까지 공개되면서 사진을 바꿀 때마다 무슨 일이 있느냐는 메시지를 받는다”며 “최근에는 카카오톡 프로필에 있는 남자 친구 사진을 아이들이 평가하는 모습을 본 뒤 아예 프로필 사진을 지워버렸다”고 말했다.

이처럼 SNS 때문에 직장인 상당수가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지만 아직 국내에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없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지난 3월 30일 발표한 ‘연결되지 않을 권리’와 ‘엮이지 않을 권리’에 대한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1040명의 직장인 중 62.3%(648명)가 스마트폰의 ‘항상 연결’로 불편이 증가했다고 답했다.

또 업무 시간 외에 ‘연결되지 않을 권리’와 사적으로 ‘엮이지 않을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대답은 응답자의 대부분인 86.6%(900명)가 동의했다.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법률 혹은 회사 내규 등에 명문화하는 것에 대해서도 전체의 85%(884명)가 찬성한다고 답했다.

◆‘연결되지 않을 권리’ 없는 대한민국

국내와 달리 해외에서는 이미 2013년 독일 노동부가 업무 시간 이후 비상시를 제외하고 상사가 직원에게 전화나 e메일로 연락하지 못하도록 하는 지침을 발표했다. 또 프랑스는 이와 관련한 입법을 준비 중이며 여러 유럽 국가들도 ‘연결되지 않을 권리’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 중이다.

유럽 소재 기업들도 근로자의 개인 시간을 존중하자는 정부 정책에 따라 이를 적극 시행 중이다. 폭스바겐은 근로시간 종료 30분 이후부터 스마트폰으로 회사 e메일 접속을 차단하고 있고 도이체텔레콤 역시 업무 시간 외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연락하는 것을 사규로 금지하고 있다.

이들 국가와 기업들은 퇴근 후 근로자에게 가해지는 업무 지시가 장기적으로 근로자는 물론 기업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판단한다. 실제 영국의 데이비드 루이스 박사는 “스트레스에 관한 연구에서 휴일 직장 상사로부터 받는 메시지는 번지점프나 배우자와의 다툼에서 오는 스트레스만큼 해롭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양정애 한국언론진흥재단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의 직장인들은 스마트폰 때문에 ‘항상 연결’돼 있어 업무 차원에서는 편의가 증가한 측면이 있지만 업무 시간이 실질적으로 늘었다고 생각한다”며 “업무 관련인들과의 소통이 편리해졌다고 느끼는 대신 불필요하게 사적으로 엮일 일도 많아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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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직장인, 익명 앱으로 모인다

‘카·페·인’ 스트레스에 많은 직장인들이 서비스를 탈퇴하거나 익명성을 띤 대체 서비스로 둥지를 옮기고 있다. ‘연결되지 않을 권리’에 더해 그동안 ‘카·페·인’은 소위 ‘자랑질’ 콘텐츠로 뒤덮여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직장인들은 ‘나만 불행하다’는 상대적 박탈감과 우울 증상을 겪기도 했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을 통해 ‘나는 이렇게 잘산다’를 보여주기 바빴다. 인스타그램을 통해서는 ‘나는 이렇게 잘 먹고 있다’는 모습을, 카카오스토리는 ‘내 아이는 이렇게 잘 크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때문에 페이스북은 자랑질을 빗댄 ‘페북질’, 인스타그램은 먹다와 인스타그램을 더한 ‘먹스타그램’, 카카오스토리는 아이(베이비)를 더한 ‘베이비스토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만큼 자신의 속내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SNS를 사용해 온 것을 꼬집는 별칭이다.

하지만 이런 SNS에 싫증 난 사람들이 하나둘 익명 앱으로 옮겨오며 자신을 감추지 않고 속내와 자유로운 감정 표현을 나타내고 있다. 자신의 좋은 일상보다 슬픈 일상을 털어놓고 위로 받길 원하는 직장인들에게 익명 앱은 ‘소화제’ 같은 존재가 됐다.

특히 현재 1250여 개의 회사 라운지(게시판)가 열려 있는 블라인드는 익명성에 더해 보안성까지 갖췄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회사 내에서 ‘을’일 수밖에 없는 20~30대 직장인들은 블라인드를 통해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지만 반대로 부정적 이야기까지 함께 외부로 흘러나오는 등의 후유증도 발생하고 있다.

블라인드 내 회사 라운지는 직장인들이 자사에 대한 단순 평가는 물론 비판과 험담이 가득하다. 인사에 대한 부당성, 업무 지시에 대한 불만, 회사와 상사에 대한 불평 등 누구에게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내용의 글들이 공유된다.

이 때문에 블라인드를 통해 대기업들의 부조리한 문화와 사건·사고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조현아 대한한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건이다.

대한한공 블라인드에는 조현아 부사장이 마카다미아 때문에 비행기를 세웠다는 게시 글이 올라왔고 이 글이 외부로 알려지며 파문이 확산됐다. 결국 대한한공 조양호·조현아 부녀는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또 대한항공은 ‘땅콩항공’ 등으로 조롱받기도 했다.

두산인프라코어 역시 블라인드의 글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회사가 20대 신입 사원에까지 희망퇴직을 적용했고 그것이 언론에 알려지며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두산이 수년간 공들였던 ‘청년에게 희망을’ 준다는 기업 이미지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기업들, 차단보다 불만 이유에 귀 기울여야”

블라인드를 통해 기업의 치부가 속속 드러나자 각 기업은 블라인드 사용 단속에 나서고 있다. 최근 포스코와 대한항공이 블라인드 사용 자제를 직원들에게 요청했고 일부 기업은 인사팀을 동원해 블라인드 앱에 올라오는 글들을 수집, 이 중 부적절한 내용은 게시물 신고를 통해 ‘블라인드(차단)’ 요청을 하기도 한다.

K기업에 다니는 이모(33) 씨는 “얼마전 블라인드 앱에 대한 모니터링 지시가 내려왔다”며 “혹시 모를 기업 비밀이나 외부로 알려져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의 글이 있는지 자체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기업 전산팀의 김모(42) 부장은 “최근 위에서 블라인드 인증을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을 검토해 보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회사가 서비스 이용을 차단해 봐야 또 다른 가입 방법이 생기기 마련인데, 굳이 회사가 왜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모르겠다”고 강조했다.

블라인드를 만든 팀블라인드 측은 이 같은 기업들의 차단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일축한다. 정영준 팀블라인드 대표는 “국내는 물론 해외 역시 폐쇄형 SNS가 큰 주목을 받고 있다”면서 “정보와 소통의 창을 차단할 것이 아니라 왜 그 같은 불만이 나왔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기업들이 블라인드 가입 절차인 e메일 인증을 차단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이를 대비해 다양한 가입 방법을 마련해 뒀다”고 지적했다.

정 대표가 밝힌 블라인드 가입 방법은 ▷회사 e메일로 블라인드가 지정한 주소로 인증 요청을 보내는 방법 ▷페이스북 또는 링크드인에서 회사 e메일로 인증 받은 뒤 블라인드와 이를 연동하는 방법 등이다.

또 최근 일부 기업은 블라인드에 회사 이야기를 올리는 직원에 대해 적극적으로 명예훼손이나 취업 규칙 위반 등의 사유로 징계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마저도 기업 관계자들의 ‘헛물켜기’로 그칠 공산이 크다.

정 대표는 “블라인드 서버는 미국과 일본 등에 나뉘어 있고 개발 단계부터 글쓴이를 특정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에 제공할 정보가 없다”며 “지금까지 일부 정보 제공 요청이 있었지만 우리가 줄 수 있는 정보도 없고 준 적도 없다”고 확인했다. 실제 블라인드는 미국에 법인을 두고 있다.

블라인드 이외에도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폐쇄형 SNS에는 ‘어라운드’와 ‘모씨’가 있다. ‘모씨’는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모씨’에서 이름을 따온 앱이다. 이용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담은 카드 메시지를 공유하며 댓글을 달 수 있다. 특히 공개형 SNS와 달리 자신의 감정 표현이 솔직하다. 이 때문에 직장인들은 이 앱을 ‘힐링 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라운드’ 역시 타인의 글에 공감 표현과 댓글을 달며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이용자가 증가세에 있다. 또 위치 기반 서비스인 ‘두리번’ 역시 익명을 통해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매력에 인기를 모은다.

익명으로 기업 정보를 공유하는 잡플래닛은 이미 직장인들 사이에 유명하다. 2014년 선보인 잡플래닛은 해당 기업에 근무했던 직원들이 익명으로 장점과 단점, 경영진에게 바라는 글 등을 게시할 수 있다. 승진 기회 및 가능성, 복지 및 급여, 업무와 삶의 균형, 사내 문화, 경영진 등 5개 영역에 걸쳐 5점 만점으로 평가하고 전반적인 총점을 매긴다.

이와 함께 총평과 장단점, 경영자에게 바라는 점, 지인에게 추천할 것인지 여부를 적게 돼 있다. 기업 리뷰와 함께 직급별 연봉 정보, 입사 시험 후기 등도 별도의 카테고리로 구분돼 있다.

한 예로 삼성전자에 달린 댓글들을 살펴보면, 장점으로 복지 및 시스템·급여·커리어 등을 꼽고 있다. ‘사내 병원, 운동 시설, 맛있고 다양한 조·중·석식 무료, 자율 출근제, 자율 복장, 업계 최고 수준의 급여, 성과급, 야근 수당, 글로벌 시장에서 일할 수 있고 중요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기회, 네임 밸류 등’이 장점으로 언급됐다.

SNS 전문가인 정동훈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는 “스마트폰 등의 발달로 개인의 노동 강도가 세지고 프라이버시는 침해당하는 일들이 증가하고 있다”며 “현대인들은 이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기 때문에 폐쇄형 SNS를 선호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 교수는 또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는 유럽 등에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논의가 활발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면서 “직장인들은 해결법 대신 스스로 익명성을 가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경비즈니스 김태헌 기자 kt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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