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커 스페이스 확산…공개 소프트웨어·3D프린터로 누구나 ‘만들기’ 가능} (사진)'2015 대한민국 과학기술창작대전'에서 시민들이 3D 프린터를 이용한 전자 의수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동훈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지금 중·장년층인 독자들은 기억하겠지만 해마다 봄이면 고무 동력 비행기 날리기 대회 때문에 학교가 들썩거리곤 했다.
모든 학생이 운동장에서 각자 만든 비행기를 어떻게든 멀리 날리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데, 어떤 친구는 종이 날개에 분무기로 적당량의 물을 골고루 뿌려 비행기 날개를 팽팽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고무줄이 끊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나무젓가락을 끼워 최대한 고무줄을 꼬아 동력을 극대화하기도 했다.
이런 제각각의 방식을 적용하며 학생들은 비행기를 뜨게 하는 양력, 앞으로 나가게 하는 추력, 비행을 방해하는 항력 등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만들기’의 즐거움은 초등학교를 끝으로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대학 입시 위주의 교육제도에 적응하기 위해 보충 학습을 받거나 학원에 다니다 보면 ‘만들기’의 즐거움은 지나친 사치가 되기 때문이다.
◆메이커 운동 핵심은 ‘즐거움’
‘만들기’의 중요성이 디지털의 확산과 함께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실 ‘만들기’라는 의미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DIY라는 용어가 떠오르듯이 우리는 이미 알게 모르게 무엇인가를 늘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들기’가 ‘메이커 운동(Maker Movement)’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의미 부여되는 이유는 그 배경에 바로 디지털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메이커 운동은 2005년 미국 정보기술(IT) 출판사인 오라일리의 데일 도허티 부사장이 주창하면서 시작됐다.
‘MAKE’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디지털 기술의 혁신은 누구든지 어렵지 않게 만들고 더 나아가 사업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정신을 주창한 것이다.
이와 함께 메이커 페어(Maker Faire)를 2006년부터 시작하며 각자 만든 작품들을 서로 보여주고 나눠줌으로써 하나의 운동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매년 봄과 가을에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 대규모 메이커 페어가 열린다.
2014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 150여 곳에서 공식적인 행사가 진행 중이다. 메이커 운동은 ‘우리 모두는 만드는 사람들이다’라는 기본 정신으로 출발한다. 만들고 배우고 놀고 나누면서 참여를 통해 변화를 이끌고 이것이 개인의 즐거움으로 남아도 되고 또한 하나의 사업 분야로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메이커 운동의 핵심 가치다.
다보스 포럼으로 불리며 더 잘 알려진 세계경제포럼(WEF)은 매년 1월 스위스의 다보스에 모여 연례 총회를 개최한다. 비록 독립적 비영리재단 형태로 운영되지만 그 영향력은 그 어떤 정부 협력 기구에 못지않을 정도로 막강한 다보스 포럼은 금년에 46회째를 맞이하며 핵심 의제를 ‘제4차 산업혁명의 이해’로 다룬 바 있다.
4차 산업혁명은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핵심 가치는 디지털과 제조업의 결합이다. 디지털 기술의 확산으로 쇠퇴해 가는 제조업이 바로 디지털로 부흥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디지털화된 스마트 산업으로 변모함으로써 제조업 역시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될 수 있는 분야로의 탈바꿈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디지털 기반 산업의 핵심 가치가 바로 개인적 차원에서의 ‘만들기(making)’이고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사람(maker)’이 되기 위한 환경을 만드는 ‘메이커 문화(maker culture)’의 확산인 것이다.
디지털이 메이커 운동을 통해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기반이 다져져야 한다. 먼저 오픈 소스 하드웨어다. 제작에 필요한 회로도나 설명서, 인쇄회로기판 도면 등을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하고 이와 동일하거나 또는 활용한 제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하드웨어는 필수적이다.
이미 몇몇 하드웨어는 기술에 대해 특허 라이선스도 없고 또한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제품 개발에 대한 리소스를 공개해 놓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것을 바탕으로 하드웨어의 제작 방법을 배우고 또한 수정·배포·제조할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아두이노, 라스베리 파이, 비글본, 인텔 갈릴레오 등과 같은 하드웨어는 아이부터 성인까지 많은 사람들이 활용하는 대표적인 오픈 소스 하드웨어다.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역시 동일한 이유로 필수적이다. 자유롭게 배포가 가능해야 하고 소스 코드가 공개돼야 하고 수정 가능해야 하며 2차적 저작물로 만드는 것도 허용돼야 하고 누구든지 어느 분야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소프트웨어라고 해서 어렵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미 전 세계에서 많은 사용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스크래치(Scratch)라는 프로그램은 프로그래밍을 전혀 모르는 어린이와 청소년은 물론 프로그램 초심자들이 쉽고 재미있게 프로그래밍을 익힐 수 있도록 만든 프로그래밍 언어다.
명령어가 블록으로 돼 있어 마우스를 이용해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식인데, 게임이나 애니메이션과 같은 것을 쉽게 만들 수 있도록 돼 있어 이를 통해 프로그래밍 기법을 익힐 수 있다. 이미 1500만 개의 프로젝트가 공유되고 있을 정도로 많은 결과물이 소개되고 있다.
◆창조경제혁신센터가 허브 역할
또한 메이커 정신에 걸맞게 오픈 소스 커뮤니티는 동일한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각종 문제를 해결하고 노하우를 공유한다. 국내외 관심 분야에 따라 수많은 커뮤니티가 있는데, 어려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좋은 사례를 공유하며 유사한 프로젝트를 따라 하며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키기도 한다.
이제는 일반인에게도 친숙한 3D 프린터는 결과물을 직접 만들어 낼 수 있는 중요한 도구다. 3D 도면을 바탕으로 3차원 물체를 만들어 내는 프린터인데, 기존의 금형 방식은 비싸고 제조 시간이 긴데 비해 3D 프린터는 플라스틱 재료를 녹여 노즐에서 분사하는 방식으로 가격과 시간을 대폭 줄임으로써 소량 다품종·주문형·개인화에 적합한 도구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크라우드 펀딩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크라우드 펀딩은 제안된 아이디어에 대한 필요성과 가능성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지에 따라 성공 여부가 좌우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작자가 자금을 모집하는 동시에 시장에서의 성공 가능성도 예측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메이커 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민·관 협력 지원이 활발하다.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는 메이커 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하는데, ‘메이크올닷컴(makeall.com)’이라는 사이트를 통해 한국식 메이커 운동을 대중화하기 위한 다양한 지원 사업을 진행 중이다.
특히 창조경제혁신센터는 메이커들의 네트워크 허브로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데, 1만5000여 건의 멘토링과 6000건에 가까운 시제품 제작을 통해 창업에 이르는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
이 밖에 콘텐츠코리아랩·테크노파크·시제품제작터·팹랩·아이디어팩토리·창업공작소 등 66개 기관이 참여하는 메이커스 네트워크와 전국 광역시·도 19개 거점센터와 39개 소규모 센터, 29개 초·중·고교에 설치돼 있는 무한상상실, 서울 18곳을 포함해 전국 총 84곳에 설치돼 있는 메이커 스페이스에서는 멘토링, 시제품 제작 지원, 아이디어 등록, 장비 대여, 창업 지원 등의 도움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2018년부터 소프트웨어 교육 필수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현재 산업화에 치중돼 있는 각종 지원 정책을 ‘모든 사람이 메이커가 될 수 있다(zero to maker)’는 문화 운동으로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저변이 깔려 있게 된다면 ‘산업으로서의 메이커(maker to market)’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단기적 성과 위주의 접근이 아닌 메이커 문화를 정착하기 위한 장기적 관점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장기적 관점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역시 교육이다. 레고 블록을 만지작거리며 유아 때부터 경험한 ‘만들기’의 즐거움을 초등학교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도록 새로운 교수법이 적용돼야 한다.
가령 유아 교육에서 ‘프뢰벨 교육법’과 같은 아동의 상상하기·꾸미기·놀이를 중시하는 교육법이 디지털 시대의 어린이에게 어떻게 적용돼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초·중등교육에서도 하버드대 교육심리학과 가드너 교수가 주창한 다중 지능(Multiple Intelligences)에 대한 재고를 통해 논리수학 지능과 언어 지능, 공간 지능 등이 고루 발달될 수 있게 ‘만들기’와 관련한 새로운 교육법이 필요하다.
또한 정책적 기반 마련은 필수다. 예를 들어 2018년부터 초·중등 소프트웨어 교육이 필수화되는데, 초등학교는 17시간의 소프트웨어 교육이 기초교육으로 제공되고 중학교는 34시간의 소프트웨어 교육이 필수 교과로 진행된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것과 같은 “대학 입시에 자꾸 부담을 주면 안 된다는 것도 중요한 얘기지만 입시와 연계가 안 되면 잘 배우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 그래서 이것(소프트웨어 교육)을 절대 평가를 하든지 해서 어떻게든지 배우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식의 교육법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만들기’의 출발점과 도착점은 바로 재미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만드는 것은 즐거운 과정이다. 누군가 이것을 만들라고 시키면 그것은 노동이 되지만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드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즐거운 놀잇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디지털은 놀이를 산업으로 확장할 수 있는 마법을 제공하기도 한다.
메이커 운동이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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